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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백두대간 재넘이문화 - 종교길

백두대간 아래 연풍, 왜 가톨릭 성지가 있을까
한말 박해피해 대거 이주 인구 증가할 정도
화전 농사에 옹기 구으며 비밀 교우촌 건설
유교성향 강한 경상도 포교에는 다소 시간
개신교, 비슷한 경로에 보부상길 많이 이용

  • 웹출고시간2012.07.02 16:30:1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785년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다. 북경에서 한국 가톨릭 최초의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李承薰)이 서울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기도회를 갖다가 순찰 중이던 포졸에게 적발됐다.

이때 교인으로는 남인계 집안인 정약전, 약종, 약용 삼형제와 10여명의 교인들이 김범우의 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당시 순교자들을 처형했던 형구돌 모습이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당겼다.

결국 "서학(西學)에는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른다"며 종교적 양심과 신념을 굽히지 않은 김범우는 우리고장 단양(일부에서는 밀양 단장 주장)으로 유배된 끝에 장살(杖殺) 후유증으로 1년만에 사망했다.

현재 한국 가톨릭은 김범우를 첫번째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은 한국 가톨릭에 대한 박해의 신호탄이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충북 중·북부 지역과 원주, 영월 등 강원 남부지역의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남한강 물길을 따라 올라온 후 괴산, 연풍, 제천, 단양 , 강원도 남부지역 등 백두대간 서쪽 산골로 대거 숨어들었다.

이들은 산자락 토굴 등에 은거하며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굽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신앙 네트워크를 갖췄고 그것은 교우촌으로 성장했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매우 굵직한 마디를 형성하고 있는 황사영(黃嗣永·1775∼18011) 백서사건은 이때 발생했다.

황사영은 스승이자 처삼촌인 정약종((丁若鍾·정약용 형)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는 입교 직후에 발생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단하고 관직 진출을 단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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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황사영은 박해 피난지 제천 배론의 토굴에서 '황사영 백서'를 썼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천 배론(舟論)의 토굴로 피신·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북경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쓰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다. 그는 이 편지를 황심(黃沁)이라는 인물 등에게 시켜 1801년 10월에 떠나는 북경 동지사(冬至使) 일행편에 끼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발각돼 체포되었다.

이후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부도죄로 음력 11월 한양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어머니·작은아버지·아내·아들은 모두 귀양을 가야만 했다.

역사 속으로 묻힐 뻔했던 황사영 토굴은 지난 1976년 발견됐으나 그 사연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야마구치(山口正之)가 1936년 8월 25일 배론을 찾아온다. 그는 황사영이 1801년에 8개월간 은거했고, 또 백서를 쓴 토굴을 찾아 그의 저서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에 이렇게 적었다.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6번지 최재현 집의 북쪽 부엌 뒤에 있으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이 집은 1866년 박해때 처형된 프랑스인 푸르티에 신부가 신학교를 설립했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토굴의 구경은 약 1m 반 양쪽을 돌로 쌓아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당일은 매몰되어있는 까닭에 굴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국가톨릭계와 제천시는 지난 1976년 이 기록을 토대로 지적도 등본에서 '구학리 646번지'의 토굴을 확인하게 된다.

천주교리 번역 사업에 매진했던 황석두(黃錫斗·1815∼1866)도 백두대간 아래인 연풍 병방골(지금의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이 고향이다.

그는 1866년 충남 내포(內浦)에서 다블뤼 주교와 함께 피체, 서울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은 후 보령(保寧)에서 3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함께 순교했다.

이처럼 수도권에서 남하한 가톨릭 신앙이 백두대간을 재넘이하는데는 다소의 시간이 걸렸다.

가톨릭 신앙이 백두대간을 넘어 경상도 지역으로 전교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1820년대이다.

고려대 최영준 교수는 그의 역저 '영남대로'에서 가톨릭이 백두대간을 재넘이 하는 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구한말 유입된 그리스도교는 대략 세 방향에서 남쪽으로 전파됐다. 이중 두 갈래가 백두대간 고개를 넘었다.

'천주교는 소백산맥에 이르러 영남지방의 유교적 문화전통의 장벽을 깨지 못한 채 한 동안 단양-충주-연풍-괴산 등을 잇는 선에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드디어 문경, 상주, 예천, 안동, 진보 등 소백산맥의 영로와 인접한 고을로 침투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후에는 영남대로를 따라 의성, 대구 등으로 전파되기에 이르렀다'-393쪽>

신앙이 전파되었다고 해서 그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과 같은 경전이 공급돼야 하고 또 신부와 같은 영적 지도자도 있어야 한다.

이 시기에 충청도와 경상도의 백두대간 고개를 넘나들며 이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 최양업(崔良業·1821∼1861)이다.

최양업은 12년 동안 백두대간 고개를 넘나들며 혼신의 전교 활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그는 고개를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넘나들었다고 해서 후에 '땀의 순교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는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이른바 조령 3관문을 거의 통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나 있는 샛길로 빠지거나 조령관의 수구(水口)을 이용한 것으로 한국천주교사는 적고 있다.

최양업은 당시 연풍과 문경 등지의 교우촌에서 비밀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교우들은 거의 모두 비신자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 속에서 비신자들과 아주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교우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래서 열심한 교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조선의 알프스라고 할 수 있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이화령과 새재를 넘던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문경 진안리의 한 주막에서 과로가 겹친 데다가 장티푸스까지 걸려 며칠 후 선종하였다.

백두대간 영저 마을인 충북 연풍에 성지가 위치하는 것은 구한말 박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칼래(N. Calais, 니콜라오) 신부가 그 뒤를 이어 백두대간 동쪽 사면의 경상도 비밀 교우촌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유 토마스의 안내를 받아 경상도에서 충청도 교우촌을 가려다 이화령의 연풍주막 근처에서 검문을 당했다. 연풍성지 측은 그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거기 어디로 가는 길손이요? 토마스가 대답했다. 충주로 가는 나그네요.

혹시 조정에서 체포하라는 천주학쟁이들이 아닌가· 아니, 우린 천주학 같은 것 모르오.

그래도 알 수 없으니, 주막으로 가서 조사해 보아야겠소.'-<연풍성지 홈페이지>

칼래 신부는 한때 체포될 위기에 직면했으나 엽전으로 기지를 발휘해 현장을 탈출, 진천 삼박골 교우촌(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도착하게 된다고 연풍성지 홈페이지는 기록했다.

한국 개신교도 비슷한 루트와 환경을 통해 선교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감리교신학대학교 이덕주 교수는 그의 저서를 통해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보부상길을 많이 이용했음을 강조했다.

'옛날 서울에서 남도 땅으로 가려면 천안, 추풍령, 충주(조령, 죽령 포함) 등 세 갈래 길이 있었다. 경부선 철도가 놓이기 전 복음도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확산되어 갔다. 남도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서울에 왔다가 새로 들어온 '야소교' 소식을 듣기도 했다. 이처럼 세 갈래 길로 남도와 서울을 오가던 전도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선비의 고향 충청도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선비들의 고장 중에서>

/ 조혁연 대기자

자료 도움: 충북대 사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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