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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백두대간 재넘이문화 - 유배길

"슬픔을 머금은 채 어머님과 이별하고…"
이문건, 음성-괴산-연풍-문경거쳐 성주로 귀양
유배길임에도 괴산에 이틀 머물며 처가 일 처리
윤선도 죽령에 이르러 "이 고개 또 넘아야 하나"
충주 유배지로 자주 지정, 칠성에는 노수신 적소

  • 웹출고시간2012.06.25 16:05:4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선시대에는 태(苔), 장(杖), 도(徒), 유(流), 사(死) 등 이른바 오형이 존재했다.태는 회초리로 치는 것, 장은 곤장으로 때리는 것, 도는 징역형, 유는 귀양보내는 것, 사는 말 그대로 사형을 의미한다.

이중 유배는 사형에 버금가는 형벌로 중형에 속했다. 그러나 유배형은 조선시대 사대부치고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빈번하기도 했다.

유배형의 첫 시작은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다. 헤어진다는 것, 그것도 기약없이 이별하는 것은 슬픔을 동반한다.

조선 인조-숙종 연간의 인물로 김만중(金萬重·1637∼1692)이 있다. 그는 평안도 선천, 함경도 극변, 경상도 남해 등에서 유배를 당하는 등 일생의 상당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낸 인물이다.

때문에 김만중은 한글소설 '사씨남정기'의 저자로 잘 알려졌지만, 유배시를 많이 짓기도 했다. 그는 평안도 선천으로 첫 유배를 떠나며 가족과 헤어지는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슬픔을 머금은 채 어머님과 이별하고 / 손을 들어 친척들과 헤어졌네 / 가을날 서성길에 / 관하에 홀로 가는 사람이라네 / 또 망발인 줄 분명히 알지만 / 어떻게 깊은 은혜 갚을 수 있나 / 그래도 구구한 뜻이 있지만 / 이제부터 피지 못할까 두렵네.'

유배하면 남해안과 서해안의 절해고도와 함경도 삼수갑산 등을 떠올리게 된다. 유배와 관련된 각종 논문을 보면 이들 지역에 유배를 많이 보냈던 것이 사실이다.(유배지 지도 참고)

조선시대 의금부에서 발행한 '의금부노정기'라는 문헌이 있다. 여기에는 한양에서 유배지까지 당도해야 하는 시간이 적혀 있다.

충청도의 경우 아산은 2일半, 충주 3일半, 부여 4일半, 공주 3일半, 직산 2일이라고 적혀 있다.

나머지 지역은 제주도 13일, 강진 11일, 해남 11일, 진도 12일半, 북청 12일, 삼수 17일半, 갑산 15일半으로 적혀 있다. 유배 여정이 가장 긴 곳은 함경도 경원으로 24일 걸린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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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신은 육지속 섬으로 보이는 괴산에서 2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했다. 원은 적소가 있던 곳으로, 산막이 옛길 끝 부분이다. 수몰로 다소 이전됐다.

이는 섬과 국경지역의 오지 뿐만 아니라 전국이 유배지가 됐음을 의미하고 있다. '유배지 지도'에서 보듯 충주도 유배지로 자주 선정됐다. 백두대간 자락에 해당하는 괴산 칠성에서 조선전기 문신 노수신이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유배지는 섬, 국경지대가 많은 편이었으나 충주도 유배지로 자주 설정됐다.

조선 성종-중종 연간의 인물로 이행(李荇·1478∼1534)이 있다. 그는 연산군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에 반대를 하다 미움을 사 충주로 유배됐다.

그는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자신은 '단념한다'고 썼다. 당장 유배지에서 풀려날 수 업기 때문이었다.

'오랜 가뭄에 삼농이 병들었는데 / 아침에 오는 소나기 어지럽구나 / 정녕 멀리서 온 손님을 재촉하니 / 살짝 오른 취기가 엄습하네 / 풍년의 상이 이미 이뤄졌으니 / 부지런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쉰다고 말하지 말라 / 어찌 견디랴 병든 두 눈으로 / 북으로 돌아가는 구름 보내며 단념하는 것을'-<적거록>

내륙에 유배당했다는 것은 죄가 비교적 가볍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죄인일수록 한양에서 먼 곳으로 유배됐다. 이때 백두대간 고개를 넘어 동해안 지역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문학사에서 불멸의 위치에 올라 있는 윤선도(尹善道·1587 ~ 1671)는 그의 생애에 모두 세번의 유배를 당했다.

첫번째는 31살 때 함북 경원, 두번째는 경북 영덕(52), 서번째는 삼수갑산의 삼수(79)로 귀양을 갔다. 14년 4개월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는 1차 유배 후 이배를 하는 과정에서 조령을 지나갔고, 20년만에 다시 떠나는 유배에서는 백두대간 죽령을 넘었다. 그는 이때 심정을 시로 남겼다. 제목은 '죽령을 지나며'(竹嶺道中)다.

'지난번에는 일찍이 조령을 지났는데 / 이번에는 죽령에 와서 앞길을 묻네 / 어떡하면 지난날 걸었던 곳 피할 수 있을까 / 태평시절에 이 길을 찾아야 부끄러움 지우리'-<고산유고>

'어떠하든 유배는 가야 말아야 되는데 또 가게 됐다'는 서글픔와 원망이 배여 있다. 그의 유배는 병자호란 때 인조에게 안부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 죄의 전부였다. 그는 서인이 아닌 남인이었다.

유배길은 한시를 통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기류는 다르다. 그날의 일을 기록했기 때문에 이른바 '유배 루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고장 괴산에 묘소(최근 이장)가 있는 이문건(李文楗·1494-1567)의 '묵재일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문건에게는 조카 '휘'(輝)가 있었다. 그는 명종 즉위와 관련하여 '서열이 아닌 어진 이를 국왕으로 모셔야 한다'는 이른바 택현설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휘는 군기감 앞에서 처형을 당했고, 이문건도 연좌제에 따라 관향인 경상도 성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유배까지는 압송관이 동행했다. 이들은 금품을 요구하고 술주정을 하는 등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이문건은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최세옹'이라는 의금부 서리가 압송관으로 배정됐다. 이문건은 압송관이 찾아왔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새벽에 의금부 서리 최세홍이 나를 찾아왔다. 불러들여 만나보니 유배지가 성주로 정해졌다고 한다. 오늘 마패가 나오면 내일 출발할 수 있다고 한다. 술을 대접해 보냈다. 갓모자 1개, 목면 1동, 흰 가죽신 1켤레, 귀마개 1개, 비옷용 베옷 등을 최세홍에게 보내주었다. 그의 요구가 극히 많아서 충족시킬 수 없었다.'-<묵재일기>

이문건은 다음날 유배길에 올라 한강을 건너 경기도 양지, 용인 좌찬역, 음성 무극, 괴산, 연풍을 지나 백두대간 조령을 넘어 경상도로 들어갔다.

이문건은 한양을 떠나 금곡(지금의 무극)-음성-괴산-연풍-조령(백두대간)-문경-유곡을 경유한 끝에 경상도 성주로 유배를 갔다. 원안은 해당 지명이다.

이후 문경, 유곡, 상주, 선산을 경우한 끝에 성주에 도착했다.

한양에서 성주는 6백30리로, '의금부노정기'에 의하면 7일半 안에 유배지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이문건은 규정보다 3일 정도 늦은 11일 뒤에야 성주에 도착했다.

그는 처가가 있는 괴산까지는 4일만에 도착해 규정을 어느정도 준수했으나, 나머지 일정에서 3일이 더 늘어났다. 이는 괴산에 머물면서 조카 휘의 장례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이었다.

묵재일기를 보면 괴산에 머무는 동안 후한 접대와 물품을 제공받았다. 관에서 각종 물품을 보내왔고 지역사족과 친지들도 찾아왔다.

모두 이문건이 중종의 국상을 치를 정도로 고위관료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괴산에 머무는 동안 사내종 4구(명)와 말 3필이 추가로 한양에서 내려왔다.

그는 이 말을 타고 백두대간 조령을 넘어 경사도 성주로 향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유배 여정은 신분에 따라 큰 차이가 났다. 다만 이문건이 괴산에 머물 때 의금부 서리가 술주정을 해 자신이 유배인 처지임을 알게 했다.

이문건은 끝내 사면을 받지 못하고 관향 성주에서 사망했다. 따라서 그는 유배 해방의 기쁨을 담은 '해배시'(解配詩)를 쓰지 못했다. 해배의 기쁨은 김만중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이문건이 중도에 해배됐다면 똑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마루에 올라 어머님께 절을 올리니 / 손잡으시고 두 줄기 눈물 줄줄 흘리시네 / 잠시 한바탕 웃고 나니 / 떠나던 때의 슬픔 이미 사라지네 / 형님은 얼굴에 환한 웃음 띠시고 / 내 빨리 돌아왔다 기뻐하시네 / 아들 딸 그리고 조카들 / 다투어 내 곁을 둘러싸네 / 아내는 평소 병을 앓더니 / 떠날 때보다 훨씬 야위었네 / 부엌에서 점심을 재촉하더니 / 밤과 장에 어육과 푸성귀 차려있네 / 서울은 기후가 일러 / 봄빛 눈에 가득 들어오네'-<서포연보>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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