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충북 백두대간 재넘이문화 - 운반도구

수레 가속력 붙어 위험…'발구' 많이 사용
우마에서 바퀴뺀 모양…연풍 등에 한때 존재
가벼운 물품은 '바지게'라는 특수지게로 운반
바지게 졌던 선질꾼 백두대간 주막이 주거지
신작로·철도 등 문명 들어오면서 모두 사려져

  • 웹출고시간2012.07.09 16:27:3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선 전기에도 전통운반 수단으로 수레가 긴요하게 사용됐다.수레는 국가 재정의 원천이 되는 세곡(稅穀)은 물론 서민용 소금 운반에도 사용됐다. 세종실록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우리고장 충주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단월역(丹月驛)에서 양재역(良才驛)까지 도로(道路)를 정비하게 하고 수레를 사용하여 수송을 원활하게 하라는 계가 있었다. '충주 단월역에서 양재역까지 도로가 평탄하여 수레가 다닐 수 있으니 선공감으로 하여금 수레를 4대씩 만들어 주게 하여 잡물을 수송하게 하고…'

그러나 수레는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레는 예로부터 바퀴 둘레에 철판을 입히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조선후기 기록인 정조실록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여러 고을들이 모두 한두 마리의 우차(牛車)를 사용하여, 곡식을 운반하고 시탄(柴炭)을 실어나르느라 수백 리의 사이를 오고가고 했는데, 제작이 거칠고 둔하여 멀리 가기는 불가능했음은…'

이처럼 조선시대의 교통여건이 열악함을 벗어나지 못한 데는 도로관리도 한 몫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웃을 일이지만, 당시 조정은 도로가 너무 잘 관리되면 자칫 외적 침투로로 악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과거 문헌에는 '無道則安全'(무도즉안전), 즉 '도로가 없으면 안전하다'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지금까지의 언급은 이른바 평지로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백두대간 고개는 또 다른 통행 여건을 지니고 있다.

고개는 특성상 양사면이 가파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봉준령의 안부(鞍部·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지역)를 넘는 백두대간 재넘이는 이보다 더한 면이 있다.

따라서 백두대간 영로에서 만큼은 우마가 끄는 수레가 세곡, 소금 등을 반대 사면으로 운반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레바퀴는 마찰력이 없기 때문에 경사가 급한 고갯길에서는 아랫방향으로 가속도가 붙게 마련이다. 이 경우 세곡, 소금 등 하중이 많이 나가는 물품은 인력으로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관련, 최영준 교수는 그의 저서 '영남대로'에서 '영남대로의 약 75%(300km)는 수레 사용이 가능했으나 나머지 25%에 해당하는 80-100km 구간은 불가능했다'라고 적었다.

또 '한양-충주, 유곡-달성, 청도-밀양, 양산-부산은 수레 이용이 가능했다. 그러나 충주-유곡에는 조령과 관갑천 등 험로가 존재하고 밀양-양산 구간에는 작천, 황산천 등이 있어 수레 이용이 불가능했다'라고 서술했다.

발구의 모습이다. 백두대간 너머로 무거운 물품을 운반하거나 눈길에서 많이 사용됐다. 수레에 비해 마찰력이 크다.

충북, 경북, 강원도 등의 산골주민과 보부상들은 '발구'를 하중 물품의 백두대간 재넘이용으로 사용했다.(그림참조)

최교수는 이에 대해 '제작과정이 단순하기 때문에 문경, 연풍, 단양 등지의 주민들이 쉽게 만들어 사용했다'고 적었다.

발구는 바퀴가 없는 운반 기구로, 수레의 밑에 썰매 모양의 통나무를 붙였다. 그리고 땅에 닿는 아랫부분(일명 달애)은 지면에 평행이 되도록 깎아 땅이나 눈 위에서 잘 미끄러지도록 했다.

발구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길이는 3∼4m이며, 너비는 1m 내외였다.

이밖에 발통과 방틀으로 구성된 발구는 수송 능력이 눈이 쌓인 길일 경우 쌀 10-15가마를 싣고 하루에 30리를 주행했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때문에 원거리 수송이나 시각을 다투는 화물수송에는 부적합면이 있었다.

발구는 경부선(1905)과 충북선(1920년대)이 개통되고 또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빠르게 사라졌다. 지금은 일부 박물관에서만 겨우 볼 수 있다.

발구를 사용하려면 힘좋은 소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러나 보부상들은 이동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고개 정상을 넘을 때 잠깐 말고는 우마가 상시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경북 울진의 바지게꾼을 재현한 모습니다. 바지게는 일반 지게와 달리 발채를 얹지 않고 세로 막대(원)를 하나 더 세운다.

따라서 충북, 경북, 강원도의 보부상들은 체력적으로 감당할만 한 것이거나, 영로 아래까지는 '바지게'를 주로 이용했다.

'오나가나 바지게는 한 평생에 내 지겐가 /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넘고 /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가노 /…/'-<'십이령 바지게꾼'노래 일부>

인용문 중에 '바지게'라는 표현이 보인다. 울진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바지게는 달리 쪽지게, 선지게, 등금뱅이 등으로도 불렸다.

평지에서의 지게는 뒤에 가지가 나 있어 그 위에 발채를 얻는다. 반면 바지게는 가지가 없는 대신 지게 뒤로 막대가 하나 더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바지게는 서서 쉴 수 있도록 다리를 비교적 짧게 제작했다. 때문에 이들을 '선질꾼'이라고 불렀다.

조선후기 권정용(19세기)이 그린 '독장수'이다. 경상도 옹기장수도 백두대간 고개를 많이 넘었다.

최승순 교수의 논문 '강원문화연구'에 따르면 선질꾼은 지게 하나를 밑천으로 나이 40-50이 되어도 장가를 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선질꾼은 일정한 거주지가 없고 오가는 도중의 주막이 이들의 주거지였으나 명절에는 행상을 하지 않았다.

복장은 한복으로 중이적삼, 바지, 저고리, 허리띠, 대님, 감발 짚신에 머리에는 황색 수건을 동였다. 겨울철이나 눈이 오면 옥수수 표피 마른 것을 발에 대고 감발을 감았다.

옥수수 마른 표피는 족온, 족습에 크게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여름 짚신은 짚에 싸리나무 껍질을, 겨울 짚신은 가래나무 껍질을 섞어서 잤다.

최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선질꾼은 작은 단지를 취사용구로 가지고 다니며 밥을 지어 먹었다. 이들은 단지를 새끼로 짠 그물에 넣은 후 지게 목발에 달고 다니며 물있는 냇가에서 이를 돌틈에 걸어놓고 단지밥을 지어 먹었다.

반찬은 된장이나 고추장이 고작이고 산나물을 즉석에서 뜯어서 먹는 경우도 많았다.

소금을 진 선질꾼은 보통 40-50kg의 짐을 지게에 지고 하루 20km 이상을 걸었다. 이 경우 무게, 걷는 속도, 지형 등을 감안 할 때 경상도 상주에서 충주 경원창까지는 대략 3일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레, 발구, 바지게 외에 체구가 작은 말인 복마(卜馬)도 백두대간 재넘이 운반수단으로 이용됐다.

조선후기 화가 김득신의 '장터가는 길'(17세기)이다. 소등(원)에 씌운 것이 길마이다.

복마는 체구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90-100kg 의 짐을 운반할 수 있었다. 짐을 실을 때는 양쪽이 균형을 이루도록 길마를 사용했다.

복마는 대체로 수레를 사용하기 곤란한 영로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또 말이 휴식할 때는 짐을 풀어줘야 하기 때문에 주로 단거리 수송에 많이 쓰였다. <끝>

/ 조혁연 대기자

자료 도움: 충북대 사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