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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백두대간 재넘이문화 - 소금길

충북 염상들, 낙동강 가뭄을 반겼다
배 못올라오면 이윤쫓아 백두대간 고개 넘어
단양·영춘 지역에 고개발달 이유 '소금 루트'
조선후기 충주 목계에는 동해소금 일부 유입
소금값, 내륙·명절·비오는 날에는 더 비싸져

  • 웹출고시간2012.05.28 15:45:2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소금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인간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무기물이자 조미료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암염(巖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지인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소금 가격은 더 비싸졌다.

소금은 생명 필수품 외에 구황(救荒) 용도로도 매우 중요시 됐다. 큰 기근이 찾아왔다고 해서 나물류를 그냥 먹을 수는 없다.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이 필요했고, 또 염 섭취를 해야 부종(浮腫)을 예방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관련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굶주린 백성들이 비록 풀을 먹더라도 반드시 염장(鹽醬)을 먹어야만 부종(浮腫)에 걸리지 않는 것인데, 소금이란 영서(嶺西)에서는 없는 것이니, 청컨대 영동(嶺東)의 관염(官鹽)을 갖다가 영서(嶺西)에 적당하게 배급할 것이며…'-<세종실록>

소금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소금을 어물, 수철(水鐵), 목기(木器), 토기 등과 함께 이른바 5대 물종(物種)으로 여겼다.

목계나루 모습이다. 서해안 소금이 주로 유입된 가운데 일부 동해안 소금도 백두대간 백복령-영월을 거쳐 내려왔다.

때문에 당시 염상들은 소금의 이윤을 쫓아 백두대간 재넘이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소금은 중량이 많이 나가기 때문에 먼거리 운송은 물길, 가까운 거리 운반은 육로를 이용했다. 그러나 물길로의 운반은 육로와 달리 기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뭄이 크게 들어 수위가 현저히 낮아지거나 강바닥이 드러나면 염선 운항이 축소되거나 불가능했다. 또 낙동간 하구 주민들이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뱃길을 막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낙동강은 바다와 연해져 상선(商船)이 통행할 수 있는데, 하류 사람들이 그 이득을 독점하려고 서로 낭설을 퍼뜨리기를 '소금배가 만일 낙동강으로 올라가면 사람들에게 이롭지 않다.' 하여, 이 때문에 어염(魚鹽)이 극히 귀하여 흉년 구제에 크게 방해되니, 각별히 유시(諭示)를 내려 통행할 수 있도록 하소서."-<중종실록>

충청도 염상들은 이때 기민하게 움직였다. 낙동강 소금배가 경상도 내륙으로 거슬러 올라오지 못할 경우 서해에서 이입된 남한강 소금을 짊어지고 백두대간 재넘이를 했다.

역사지리학자 김재완 박사는 이에 대해 '가뭄이 들지 않은 평수기 때도 순흥, 풍기까지만 남한강 소금이 이입됐다'고 봤다.

나아가 갈수기가 되면 '낙동강 수운의 소강 종점이 달지에서 상주 낙동진으로 내려가면서 순흥, 풍기는 물론 예천, 함창, 안동, 용궁 등에도 남한강 소금이 공급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반면 역작 영남대로의 저자인 최영준(고려대) 교수는 '영춘, 단양, 황강, 금천, 괴산 등에서 하역된 남한강 소금이 베티제, 죽령, 벌재, 계립령, 새재, 이화령 등을 넘어 백두대간 남쪽 가까운 취락에만 공급됐다'고 밝혔다.

남한강 소금이 백두대간 어느 고개를 넘어갔는가에 대해서도 둘은 이견을 나타냈다.

충청도 염상들은 경상도 내륙이 가뭄이 들어 낙동강 배가 올라오지 못하면 이윤을 쫓아 백두대간을 재넘이 했다. 그러나 경상도 염상은 충북으로 잘 넘어오지 않았다. 남한강 수계로 서해안 소금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최영준은 ①영춘-순흥-봉화, ②단양-죽령-창락역-풍기, ③단양-벌재(고현)-은풍-예천 ④황강-송계-계립령-문경 등의 4개 경로를 제시했다.

이에 비해 김재완은 ①단양 작전포-죽령-풍기, ②영춘-의풍-영주, ③영춘-마구령-부석 등 3개 경로를 제시했다. 고고학적 물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의 주장을 검증하기는 쉽지 않다. 두 사람은 염상들이 조령(새재)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했다. 조령 관문에서는 공로(公路)인 까닭에 검문·검색이 심하게 이뤄졌다.

가뭄은 충북 북부의 남한강 수계 유역에도 심심찮게 찾아왔다. 실록에 '남한강 물길이 끊겼다'는 표현히 간간히 등장한다.

'충청도(忠淸道) 충원(忠原)의 달천(達川) 상류(上流)가 이틀 동안 물의 흐름이 끊어졌다.'-<숙종실록>

한 달 뒤에도 '충주 달천(達川)의 상류 수지탄(殊池灘)이 이틀 동안 흐르지 아니하였다'라는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 이때 충주 일대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한강 상류에서는 경상도 내륙과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사료를 보면 이 지역에 대한 조선 전기와 후기의 염공급 형태가 달랐다. 조선전기의 남한강 상류지역은 소금 공급이 달릴 경우 경상도가 아닌 동해산 소금이 일부 유입된 것으로 나타난다.

지정학적으로 동해산 소금은 백두대간을 넘어 영서지방의 평창이나 영월까지 도달하면 그 이후부터는 수운을 통해 어렵지 않게 단양, 충주까지 하강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굶주린 백성들이 비록 풀을 먹더라도 반드시 염장(鹽醬)을 먹어야만 부종(浮腫)에 걸리지 않는 것인데, 소금이란 영서(嶺西)에서는 없는 것이니, 청컨대 영동(嶺東)의 관염(官鹽)을 갖다가 영서에 적당하게 배급할 것 이며….'

또 "강원도의 영동 각 고을 회계의 소금 4백 석을 영서 각 고을 민호에 나누어 꾸어 주고, 가을을 기다려서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시가에 의하여 잡곡으로 수납하여 회계에 기록하게 하소서"라는 내용도 이어진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도 비록 순수문학이기는 하지만 소금 운송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정선 아리랑에도 동해안 소금이 강원도 영서지방으로 유입되는 모습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소금장수 모습니다. 이들은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명절 때, 비가 오는 날에는 소금값을 더 받았다.

'우리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 얽어매고 찌거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 헐께눈에 노가지나무 뻐덕지개 부끔덕 / 세쪼각을 세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양 / 웃짐 지고 강능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 백복령 구비 부디 잘다녀 오세요.'

(다음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조선후기에는 서해안 소금이 다량 공급됐다. 한양의 상인들이 남한강 수계를 거슬러 올라와 단양, 영춘, 영월 뿐만 아니라 횡성, 평창 등 영서 산간지역까지 서해안 소금을 공급했다.

그렇다고 서해안 소금만 독점적으로 공급된 것은 아니었다. 이중환이 '택리지'(1751)를 쓴 18세기 중후반까지 백두대간을 재넘이 한 동해안 소금도 함께 공급되면서 각축을 벌였다.

이때 동해안 소금은 충주 목계 뿐만 아니라 범영서권인 원주까지 공급됐다. 물론 그 양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은 택리지가 표현한 우리고장 충주의 모습이다. 서해안 소금과 동해한 소금이 각축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서쪽은 목계인데, 강을 내려오는 생선배와 소금배들이 정박하에 세를 내는 곳이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산이 모두 이곳에 모여드니, 주민들이 모두 장사를 하며 부유하다.'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만난 뒤에 마을 북쪽으로 돌아거 흘러가므로 동남쪽으로는 영남의 물자를 받아들이고 서쪽으로는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교역하는) 여염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도 '동해 사람들이 영서(嶺西)로 무역하기 때문에'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동해안에서 남한강 상류지역으로 이입되는 소금은 '강원도 성마령-정선-남한강 하강' 혹은 '성마령-영월-남한강 하강' 등의 루트를 생각할 수 있다.

이것 외에 앞서 서술한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볼 수 있었던 강릉-대화-평창-제천과 영춘-여촌령-봉화 루트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괴산, 음성 지역에는 위치상 서해안 소금만 유입됐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우리고장 인물인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 괴산 괴강 주변을 읊은 '포구상선'이라는 시다. 인용문 중 '한강'은 괴강을 가리킨다.

'우리집은 강위에 있으니 / 닷내리는 곳에는 백사장이 밝다 / 바람은 한강 어귀에서 불어오고 / 내일은 생선과 鹽파는 날이다 / 문밖에 방사배가 매여 있고 / 멈춘 좇대는 사그늘 연기 속에 있다 / 배가에서 돛대와 배권을 요란스레 두드리니 / 마을 사람들이 백명 천명 모여든다.'

보은, 영동에는 서해와 남해산 소금이 경쟁을 벌였다.

반면 옥천은 낙동가 수계의 상주와 멀었기 때문에 서해의 강경소금이 직접 유입됐다. 강경소금은 청산까지 공급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소금은 중량이 많이 나가고 비 등 수분에 취약하기 때문에 아무나 다루지 못했다. 그러나 '작은 금' 또는 '흰 금'의 어원을 지닌 소금은 말 그대로 마진이 컸다.

특히 명절 무렵이나 눈비가 올 경우,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소금값은 더 뛰었다. 지명 '사승'(四升)은 소금 한 되와 콩 4되는 바꾼다는 뜻이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 도움: 충북대 사학과, 산림청,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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