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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백두대간 재넘이 문화 - 그림속의 주막

조선후기인 18세기 전기에 대중화 된 듯
숙종대 상평통보 보급후 수십년 지난 시점
실내가 아닌 간이형 주막도 함께 존재한 듯
조선전기 금주령은 병주·호주가 매번 대상
주막 등장 전에는 '미숫가루'도 여행 필수품

  • 웹출고시간2012.06.11 17:58:3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선시대 주막문화는 문헌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인 18세기 들어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조선시대 술과 관련된 표현으로 '甁酒'(병주),'壺酒'(호주), '酒幕'(주막), '酒肆'(주사), '酒家'(주가) 등의 낱말이 있다.

신윤복 '홍루대주'. 그림 속의 여인은 분명히 어딘가로부터 술을 사오고 있다.(왼쪽) 신윤복 '홍루대주' 부분. 원속의 병이 '甁酒'로 추정된다.

병주는 문자 그대로 병에 담겨진 술을 일컫는다. 신윤복의 그림 '홍루대주(紅樓待酒)'에 등장한 용기가 병주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1,2>

한 패의 한량들이 기녀방에서 술상이 나오기를 기다기고 있는 가운데 아이 딸린 여성이 병주로 추정되는 용기를 지니고 쪽문을 들어서고 있다. 이때의 병주는 분명히 근처 어디인가의 소매처에서 술을 사오는 모습이다.

'호주'는 '병주'와 용기 모양이 비슷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 조정은 가뭄이 크게 들면 금주령을 포고했다. 이때 '병주', '호주'가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뭄이 자못 심하니, (…) 무엇이든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랫사람들은 마음대로 태연히 술을 마시니, 이제부터는 甁酒까지도 금하게 하소서.'-<중종실록>

'어리석은 백성이 우연히 한 병의 壺酒를 마시고서 이로 인해 죄를 입는 자가 많으니, 매우 가긍(可矜)하다.'-<〃>

조선왕조실록을 기준으로 할 경우 '酒幕'이라는 낱말 표현은 숙종 29년(1703)에 처음 등장한다.

'호평부수 운(橒)이 그 아우 성(檉)과 더불어 판교(板橋)의 주막(酒幕)에 가서 머무르면서 술과 돈을 요구하고 포악한 짓을 함부로 자행하여, 끓는 물을 가지고 살에다 붓는 형(刑)을 더하니, 거기 살던 백성들이 달아나 흩어졌다. 종부시(宗簿侍)에서 그 죄를 아뢰니,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고 고신(告身)을 빼앗으라고 명하였다.'-<숙종실록>

이형록 '설일주막' . 충북 백두대간 주막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막하면 김홍도의 작품이 떠오르나 19세기 초기 인물인 이형록도 '雪日酒幕'(그림 3)이라는 풍속화를 남겼다.

길가 자리잡은 주막뜰에 주모, 여러 종류의 술병, 술상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주막뜰 밑으로는 한 마리의 개가 한가롭게 앉아 있고 지붕 위로는 주막을 알리는 깃발이 내걸려 있다.

충북 백두대간 영로상의 주막은 정황상 이형록의 '설일주막'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록에 등장하는 주막, 酒肆(주사),주가 등의 낱말이 건축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한자 상형성으로 추정컨대 주막은 막(幕)이 쳐져 있는 허름한 집, 주사나 주가는 주막보다는 다소 고급스런 술집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윤복 '주사거배'. 일반 주막보다는 조금 고급스러워 보인다.

신윤복의 그림 중에 '酒肆擧盃'(주사거배·그림4)가 있다. 잠깐 주막에 들러 술 한 잔을 하고 갈 길을 재촉하는 일행, 끝까지 안주를 집으며 술잔을 좀처럼 놓지 않는 일행, 술 한 국자를 더 떠주는 주모, 이들을 무심코 바라보는 '중노미'가 그림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담 너머 주막 풍경이 은밀하게 바라다 보이고, 담 아래 철쭉이 봄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중노미는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공짜손님을 감시하던 남자 고용인을 일컫는다. 대개 더부살이로 입에 풀칠을 했다. 주가는 '처마가 있는 집'(家)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사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풍속화에는 또 다른 그림의 유형이 등장한다. 바로 '간이형 주막'이다.

이인상 '유천점봉로도' 부분, 실내가 아닌 간이형 주막 모습을 하고 있다.

간이형 주막은 지금으로 치면 '포장마차 형'으로 볼 수 있다. 이인상(李麟祥·1745~1821)의 유천점봉로도(柳川店逢擄圖·그림5)가 이를 대표한다.

햇빛 가리개를 공통적으로 친 것으로 봐 낮 동안 계속 손님을 맞았을 것이다. 또 볏짚으로 만든 햇빛 가리개는 한번 설치하면 옮기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같은 장소로 계속 출근했을 가능성이 높다.

성격이 강직했던 이인상은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평소 좋아하던 우리고장 단양에 은거하여 시·서·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던 인물이다.

전유숙 '대쾌도' 부분. 간이형보다 기동성이 더 뛰어난 들병장수가 길가에서 술을 팔고 있다.

주막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나 조선시대 술판매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풍경으로 이른바 '들병장수형'이 있다. 유숙(劉淑)이 1847년에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대쾌도(大快圖·그림6)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한양의 사대문(四大門) 중 동쪽에 있던 광희문(光熙門)의 남쪽에서 벌어진 유희장면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좌판을 벌리고 술을 파는 들병장수와 돈을 꺼내는 한량의 모습이 보인다.

상투를 단정하게 튼 것으로 봐 몰락한 양반이 호구지책을 위해 거리로 나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풍속화이다.

그러나 들병장수가 기동성을 중시한 모습으로 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노점상의 술장사치인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풍속화를 통해 주막 문화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살펴봤다.

서두에 언급한 '甁酒'(병주),'壺酒'(호주), '酒幕'(주막), '酒肆'(주사), '酒家'(주가) 등의 낱말을 조선왕조실록 인터넷판에 키워드 입력하는 방법으로도 비슷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5개 낱말을 입력한 결과, 주막과 주가(주사 포함)라는 단어는 상평통보(1678년) 전에는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만약 주막이 존재했으면 주막이 금주령의 대상이 됐어야 하나 그 대상은 매번 甁酒와 壺酒였다. 때문에 조선시대 주막은 조선후기에 출현했음이 확실해 보인다.

풍속화 속의 주막도 18세기 전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다만 유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 '실내형 주막'과 함께 '간이형 주막'도 병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주막 출현에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상평통보였다. 그러나 이 부분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숙종대 상평통보가 주조·보급됐다고 해서 주막문화가 단박에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상평통보가 주조된 후 적어도 수십년이 지난 18세기 전기에 주막문화가 출현했다. 이는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화폐경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이때부터 이 땅의 여행자들은 쌀(행량), 반찬(행찬), 침구, 땔감 등과 같은 번거로운 여행물품도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됐다.

요즘은 미숫가루를 선식으로 많이 먹고 있다. 그러나 미숫가루는 조선시대 여행 중 필수로 휴대하던 행량의 일부로, 조선왕조실록은 이를 '미식'(麻+米食)으로 적었다.

'그 밖에 우구(雨具)와 미숫가루(麻+米食)와 마른 말먹이풀(乾馬枓) 등의 물건도 또한 잘 살피어 예비(豫備)하라.'-<세조실록>

'신이 사졸인(士卒人)으로 하여금 15일치의 양식과 20일치의 미식(麻+米食)을 싸가지고 가도록 하였었는데…'-<성종실록>

/ 조혁연 대기자

자료 도움: 충북대 사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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