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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백두대간 재넘이 문화 - 암행어사길

'조령'으로 넘어가서 '죽령'통해 복귀했다
조령으로 상·하행했던 조선통신사와는 달라
경상도 전역 'U자' 형태 감찰 겹치는 것 피해
보통 30-60리, 상황급하면 하루 100리 주파
관방 지역인 수안보 일대에 '통행금지' 존재

  • 웹출고시간2012.05.21 15:45:0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행방을 알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를 '제기선성'(除其先聲)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암행어사 임명장인 봉서에는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 또는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 표현이 씌여졌다. 전자는 '남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봐라'라는 뜻으로, 호남이나 충청우도(지금의 충남지역)로 향하는 암행어사에게 주어졌다. 후자는 '동대문을 나간 뒤에 열어봐라'라는 뜻으로, 경상·강원도와 충청좌도(충북)로 향하는 어사에게 전달됐다.

암행어사라는 표현은 중종 10년(1479)에 처음 등장했다. 같은 문장 안에 '어사', '암행어사'가 동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비교적 활성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사헌 김양경(金良璥)이 아뢰는 말이다.

"근일에 자못 듣건대 수령의 분수에 지나친 행동이 혹은 그 두곡(斗斛)을 크게 만드는 사람까지 있다고 하니, 경연관이나 어사(御史) 중에서 내보내어 규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암행어사(暗行御史)가 한 번 나간다면 탐관이 저절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중종실록>

암행어사는 소임을 마치고 귀환하면 공식 보고서인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각 한 통씩 작성해 왕에게 제출해야 했다. 서계가 정해진 서술 양식이 있는데 비해 별단은 효자, 열녀 등의 이야기를 임의 형식으로 작성했다.

암행어사 서계·별단은 일성록(日省錄)이라는 문헌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밖에 일기 형식의 암행어사 기록으로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박만정), 서수록(西繡錄·박내겸),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성의성), 남행일록(南行日錄·신정) 등이 정해지고 있다.

이중 신정(申晸·1628~1687)이 쓴 남행일록(南行日錄)에 충북 백두대간을 재넘이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신정은 현종 12년(1671) 경상도 암행어사를 하명받은 후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일기 형식으로 썼다.

1872년 지방 군현도로, 암행어사 신정은 조선통신사와 달리 백두대간 단양 죽령을 통해 경상도를 빠져나왔다. 용부원에 초가집이 밀집돼 있고 묘적사(妙寂寺)는 지금의 대강면 사동(寺洞)에 있던 절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충북 백두대간 조령(일명 새재)을 넘어 경상도로 하행했고, 귀로인 상행길은 백두대간 단양 죽령을 택했다.

신정의 기록이 암행어사 行路의 대표성을 갖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신정이 택한 행로는 대일외교를 수행했던 조선통신사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어서 또 다른 메시지가 읽혀지고 있다.

신정이 충북 백두대간을 재넘이 하는 모습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곧바로 단양으로 향하여 이숙을 뵙고 그 길로 식량과 노자를 구하여 죽령을 넘어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도를 펼쳐보니 추첨으로 뽑은 제비가 여러 고을들과는 길이 상당히 어긋나 있었다. 그래서 조령길로 바꾸었다.'-<남행일록 중에서>

신정에게 있어 백두대간 서쪽 사면인 충청도는 경유지이지 감찰대상 지역은 아니다. 이 때문인지 신정은 충청도 지역에서는 정보채집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백두대간 서쪽 산록인 연풍, 안보 일대에 이르러서는 다소 긴박한 움직임을 보인다.

'조금 있다가 조령을 넘으려고 하는데 고개를 넘은 이후에는 노자를 나눠주는 것이 민정을 살피는데 번거롭기 때문이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4시쯤에 행장을 재촉하여 출발해 조령의 고사리에 있는 주막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남행일록 중에서>

신정의 경상도 암행어사 경로로 붉은 선은 하행길, 푸른선은 상행길이다. 신정은 벡두대간 조령을 통해 경상도로 들어갔다. 단양 죽령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백두대간 조령을 넘어 경상도에 진입한 신정은 하루에 보통 30~60리의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사천-곤양 행로에서는 하루 100리를 주파하는 등 상황에 따라 강약을 조절했다. <그림 붉은 선>

신정은 한반도 꼭지점인 부산 동래를 반환점으로 상행로, 즉 복로(復路) 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는 경상도 동쪽인 의흥-신령-비안-예천-용궁-예천-풍기 등을 경유한 뒤 백두대간 단양의 죽령을 넘었다. <그림 푸른 선>

1872년 지방 군현도로, 암행어사 신정은 단양-청풍-수산-충주 순의 귀로를 택해 한양으로 올라갔다.청풍 한벽루가 지금 모습과 거의 같다. 금수산과 옥순봉도 그려져 있다.

앞서 서술한대로 조선통신사의 상행로(귀로)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후 신정은 백두대간 서쪽 산록(땅길)과 남한강 수계(물길)가 이웃해 있는 단양-청풍-수산역-황강역-충주를 경유한 끝에 영남대로를 타고 한양으로 복귀했다. <그림참조>

이 과정에서 청풍에서는 큰 아버지가 쓴 글이 한벽루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감회에 젖기도 한다. 또 충북 북부를 통과할 때 눈이 오는 등 기상이 악화되자 행로를 멈추고 서계를 미리 정리하기도 했다. <그림참조>

신정의 남행일록에는 충북 백두대간 재넘이 문화와 관련해 보이지 않는 정보가 담겨져 있다.

먼저 조선 조정은 암행어사가 백두대간 고개를 넘는데 있어 하행길과 상행길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다르게 편성해 행로의 중복을 막았다. 이는 경상도 지역을 U자 형태로 고루 감찰토록 의도한 결과였다.

이때 이번에는 상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충북통과 하행길은 지금의 도내 중부지역, 상행 때는 북부지역을 경유해 역시 행로의 중복을 피했다. 이는 하·상행길 모두 영남대로의 조령만을 고집했던 조선통신사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또 조선시대 통행 금지가 도시 뿐만 아니라 궁벽한 백두대간 영저마을에도 시행됐음을 알 수 있다. 신정의 남행일록을 보면 도시와 마찬가지로 조령 아래지역에도 '파루시'(罷淚時·새벽 4시)가 적용됐다.

이는 관문정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 통금이 농촌 전역에까지 시행됐는지는 신정의 남행일록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밖에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지도를 휴대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인이 지도를 준비했는지, 임금의 하사품인지 여부는 문헌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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