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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백두대간 재넘이문화 - 과거길

영남유생들에게는 출세의 상징이었다
숙종대 상주인물 권상일 과거일기 생생히 기록
문경 초곡 주막-조령-달천 주막 순으로 재넘이
돌아올 때는 조령 아닌 연풍-문경 경유 하기도
과거경비 만만치 않아 과거 임박하면 탄식한숨

  • 웹출고시간2012.06.18 17:53:4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영남 사람인 정랑 김오응·감찰 장위항 (…)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영남 사람들이 비록 다른 장점은 없으나 그래도 염치와 의리의 귀중한 것을 대략은 알고 있으므로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영조실록>

인용문 중 '백의'는 과거 낙방, 즉 홍패(과거 합격증)를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영남 유생들의 백두대간 고개에 대한 인식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충청도 주민들은 백두대간을 '뒷동산' 쯤으로 여겼다. 반면 경상도 주민은 출세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백두대간 고개를 넘어 홍패를 가져와야 자신의 출세는 물론 가문이 부흥하는 것으로 여겼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양민(평민) 이상이면 누구가 응시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이론상으로, 평민이 과거에 합격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유는 경제력에 있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과(지금의 고시) 최종 합격자의 평균연령은 35세다. 이는 5살부터 글을 읽기 시작할 경우 30년 후에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평균 6만3천명이 응시해 소과 2단계(초시, 복시)와 대과 3단계(초시, 복시, 전시) 등 5단계를 거쳐 최종 선발되는 인원은 33명이었다. 평균 2천대 1의 경쟁률인 셈이다.

이를 뒷받침하려면 경제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중노동에 시달렸던 평민이 밥을 먹으면 책만 보는 유생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영남유생들은 과거길로 다른 고개보다 문경 새재(조령)를 훨씬 선호했다.

백두대간 충북-경북 구간에는 영동 추풍령, 괴산 조령, 단양 죽령 등 3개의 큰 고개가 존재하고 있다. 영남유생들은 이중 괴산 조령을 의식적으로 선호했다.

죽령은 발음상 '죽죽 미끄러져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기 때문에'라는 설이 구전되고 있다. 반면 문경의 옛이름은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뜻인 '문희'(聞喜)였다.

때문에 영남 유생들은 한결같이 조령으로의 재넘이를 선호했다. 일종의 주술적인 주문이자 자기암시의 심리로 볼 수 있다. 지도에서 보듯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까지는 도보로 대략 5-6일이 소요됐다.

과거시험 여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당시 유생들이 남긴 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숙종-영조 연간을 산 인물로 권상일(權相一·1679-1759)이 있다.

경상도 상주 인물인 권상일은 그의 나이 스무살 때인 1698년(숙종 24) 부터 1759년(영조 35) 사망하기 열흘 전까지 무려 62년 동안 일기를 썼다.

현재 학계에서는 그의 일기를 호를 따 '淸臺日記'(청대일기)라고 부르고 있다. 일기를 보면 권상일은 20세부터 집에서 과거시험 준비를 시작한다. 이른바 '家塾'(가숙)이다.

그는 총기가 있어 7세 때 책을 읽기 시작하여 그해 겨울에 '史略'(사략) 7권을 모두 읽었고 13세 때 '논어', '맹자', '중용' 등 유학의 주요 경전을 모두 독파했다. 17세 때는 반복 공부에 몰입하며 대단한 집중력을 보이기도 한다.

'이때부터 또한 독서에 힘을 써 반복하는데 마음을 몰두하다 보니 침식을 잊는 지경에 이르렀다'(自是尤用力於讀書 潛心反復 至忘寢食)-<'청대일기' 중에서>

권상일은 24살부터는 이른바 산사 '居接'(거접)을 시작했다. 거접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이 산사에 모여 함께 공부하며 정보도 교환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가 거접한 산사는 상주 대승사와 금룡사, 문경 오정사, 예안 성천사 등이었던 것으로 일기에 나타난다.

그는 드디어 25살(1703)부터 '백일장'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백일장은 관찰사나 수령이 지방 유생들의 학업 장려를 위해 실시하는 시험으로, '都白'(도백) 또는 '官白'(관백)으로 불렸다. 그는 상주목사가 실시한 당시 백일장에서 '三下'의 점수를 받았다.

권상일의 과거시험 때의 백두대간 재넘이

권상일은 그의 나이 30세인 1708년 처음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간다.초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2차로 주어지는 회시(會試)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표 참조>

전회에서도 밝혔듯이 상평통보는 숙종대에 전국적으로 대중화됐다. 그러나 당시는 같은 숙종대라도 상평통보가 대량 유통되기 전으로,여행 식량인 '行糧'(행량)을 직접 준비해야 했다.

정황상 권상일의 집안은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 과거일이 임박하자 한양으로 갈 노자(路資)가 없음을 크게 걱정한다. 이때의 노자는 엽전이 아닌 여행물품을 의미한다.

'서행(서울행 지칭)이 임박했는데 집안에는 물건 하나가 없다. 민망하기 짝이 없다'(西行迫頭 家無一物 悶極)-<'청대일기' 중에서>

그는 과거시험일(2월 26-28일)보다 13일의 여유를 가진 음력 2월 13일 상주의 집을 나섰다. 이후 문경 초곡주막-조령-충주 달천주막 등의 여정으로 백두대간 재넘이를 했다.

그리고 여주 오갑주막-이천- 광주 경안역을 거친 끝에 2월 24일 과거 시험장이 있는 한양에 11일만에 도착했다. 보통 상주-한양의 도보시간이 5~6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여정이 다소 많이 걸렸다.

이는 첫 '京行'(경행)이 부담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권상일은 애석하게도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는 1일 낙방을 확인한 후 2일날 바로 한양을 출발해 4일만에 상주 집에 당도했다.

복로는 상경 때와 다소 달라 연풍을 경유했다. 권상일은 이천을 지날 때쯤의 낙방 심정을 일기에 적었다.

'실의에 찬 행색이 우습다. 구구한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지만 奉親과 人事 때문에 매우 괴롭고 서운하다.'(落魄行色可笑 區區得失 不足介懷 而奉親人事 是甚痛訣(言대신 角) -<'청대일기' 중에서>

조선시대 전국 각지에서의 햔양까지 도보 기간이다. 상주에서는 보통 5-6일이 소요됐다.

권상일은 2년 후인 1710년 두번째 회시에 도전했다. 이때의 백두대간을 경유하는 상경은 상주(家)-문경 초곡주막-충주 달천-여주 오갑주막-이천- 광주 경안-한양 순으로 31일의 여정이 소요됐다.

그는 이 과거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이때 상주집에 도착한 시간은 2년전 4일보다 훨씬 긴 15일이 소요됐다. 그는 중간중간 인사를 드리고 또 휴식을 하며 쉬엄쉬엄 하행했다.

긴장이 풀린탓인지 피곤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침에 오리촌에 이르러 종숙모를 뵈었다. 신원주막에 도착하니 계부께서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더위가 심해 견탄원에서 한나절 누워있다가 오정사에서 숙박하였다.'(朝抵梧里村 拜從叔母 到新院酒幕 季父主來待矣 熱甚到犬灘院 臥半日乘暮宿烏井寺)-<청대일지 중에서>

권상일은 문집에는 선유동을 소재로 한 한시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찾은 곳은 문경 사면의 선유동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때 '이전 시에 오로지 선유동을 읊은 것이 있는데 말이 대부분 허탄함으로 그 뜻에 반대하여 또한 2수를 읊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전 시' 송시열 제자인 노론계 인사들이 지은 시를 일컫고 있다. 그는 노론계가 아닌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남인계 인물이었다.

권상일은 비교적 빠른 9년의 도전, 그리고 백두대간을 두번 재넘이 한 끝에 조선 엘리트의 등용문인 문과에 합격했다. 그는 일기 외에 청대집, 초학지남(初學指南)·과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소대비고(昭代備考)·가범(家範)·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 등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 도움: 충북대 사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권상일은 백두대간 조령을 넘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갔으나 돌아올 때는 연풍을 경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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