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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백두대간 재넘이 문화 - 주막

주막이름 '느티나무형'이 가장 많았다
일제 강점기 그 다음은 '立石형·'삼거리형'
도내 면별로는 박달재 부근 봉양면이 최다
하늘재 부근 주막 전무, '잊혀진 고개' 반영

  • 웹출고시간2012.06.04 15:26:3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김홍도의 주막그림으로 나그네가 무척 시장했음을 보여준다.

전통시대 주막의 외형적인 모습은 풍속화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김홍도와 신윤복의 주막그림은 그 사실성이 돋보이고 있다. 주막 내부의 모습도 궁금하다.

이 부분은 옛문헌, 특히 조선후기~일제 강점기의 외국인 일기류와 보고서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선교가 샤를르 달레(C.C. Dallet·1829~1878)는 조선후기 주막의 밥상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72~1874년에 작성한 '조선교회사서론'에서 주막의 밥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보통 음식은 쌀과 고추와 남새이다. 살림이 넉넉한 사람은 거기에서 조금의 육물과 자반을 덧붙인다. 이런 식료품들은 소금물과 더불어 깨나 아주까리나 박하의 기름으로 요리한다. 쇠고기는 서울이 아니면 구하기 어렵고 염소고기는 보기 힘들고, 그 대신 개고기가 있는데 선교사들은 다들 그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채소에 관해서는 순무와 중국배추와 질경이 잎과 고사리 밖에는 별로 없는데, 고사리는 퍽 많이 소비된다.'

당시 주막상에서 4찬 이상이나 고기류의 구경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사리가 많이 소비된 것은 건조화가 가능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영국출신 여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1831-1904)과 일본인 이마무라 도모는 근대기 주막의 방구조와 숙박 풍속을 자세히 기록했다.

두 사람의 기록 시점은 전자는 1898년, 후자는 1909년으로, 모두 우리나라 근대기에 해당하나 10년 정도의 시간차가 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눈에 비춰진 근대기 주막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길가 헛간인가 할만 한 것이 처마 밑에 말먹이통과 말뚝이 있음으로써 겨우 여관인가 여기게 된다. 장깃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면 흙으로 된 바닥에 거적자리를 깐 것이 방이다. 角材를 대여섯 치 정도를 켜서 자른 베개 대여섯 개가 아무렇게나 거기에 뒹굴고 있다. 이 베개가 암시하는 것처럼 이 방은 나그네 한 사람이 결코 독점할 수가 없는 곳이다.'-<이사벨라 비숍>

두 이방인의 표현으로 미뤄 당시 주막에서는 베개용으로 목침이 일반적으로 제공됐고, 신분제한 없이 출입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막, 그중에도 영로 주막방의 최고 단골손님은 유랑 행상인 '선질꾼'이었다. 그들은 지게 하나를 밑천으로 나이 40~50이 돼도 장가를 들지 못하는 떠꺼머리 총각으로 평생을 노중(路中)에서 살았다. 노중의 주막이 이들의 주거지였다.

일제 강점기의 조령, 계립령 일대의 주막 분포도이다, 조령에는 주막문화 흔적이 남아 있으나 계립령-한원령 쪽은 주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분홍색 선은 충북과 경북의 도계이다.

충북에 '주막'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영조 때 저술된 여지도서(1757~1765) 때부터 이다. 그러나 이는 숙박용 '주막'이 아닌 지명이다.

주막이 통계학적인 분석이 가능하도록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조선통독부가 작성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와 1918년에 제작된 '조선 1:5만 지형도'이다.

먼저 조선지지자료에 등장하는 주막 이름을 분석한 결과, 당시 충북에는 전체 629개의 상업적인 주막이 존재했다.

『조선지지자료』의 충북도내 주막수

ⓒ ※총 629개
이를 군별로 살펴보면 청주군 141개, 진천군 73개, 제천군 68개, 단양군 62개, 영동군 60개 등의 순으로, 청주군에 뚜렷하게 많이 존재했다. <표1 참고>

이는 일부의 '주막이 유별나게 많았던 곳으로는 큰 고개 밑, 선착장, 광산촌 등이었다'라는 주장과는 좀 다른 것이다. 이번 분석은 당시 주막이 지형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인구 밀도가 높고 면적이 넓은 지역에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두대간 영저(嶺底)에 위치하면서 '작은 縣'으로 유지되다 행정 지위가 낮아진 황간, 회인, 연풍, 청산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단, 해당 사료는 도내 두 번째 대읍인 충주가 29개, 괴산이 4개 주막밖에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 조사의 정확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면내 주막수가 10개 이상인 곳

ⓒ ( )는 구체적인 숫자
면 단위별로 주막수를 비교하는 것은 '좁은 지역'의 상업발달 정도와 유동인구를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결과, 제천군 봉양면이 22개로 가장 많았고, 청주군의 8개 면(북이, 강내, 강서, 미원, 청주, 옥산, 낭성, 현도)이 그 뒤를 이었다. <표2 참고>

이는 앞서 설명한 '과거 주막은 인구밀도와 면적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어느 정도 부합되는 내용이다. 단, 당시 제천 봉양면에 왜 당시 도내 최다의 주막이 존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봉양면은 박달재의 영저 지역이고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것의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특정 사물이 지닌 명칭도 분명히 역사의 일부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당시 존재했던 충북도내의 전체 629개 명칭을 살펴본 결과, 노출 빈도수가 높으면서 같은 이름의 주막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출빈도가 높은 주막이름 유형(店 포함)

'느티나무형'이 10개로 가장 많았고, '立石형, '삼거리형', '新村형' 등이 그 뒤를 이었다.(표3 참조) '碑石형'도 '立石형'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석에는 銘文이 반드시 있으나 입석에는 없을수도 있어 별도로 처리했다.<표3 참조>

이는 근대기 충북지역의 주막이 어떤 곳을 선호했는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늘을 만드는 느티나무, 상징 표시가 될 수 있는 거석, 사람의 왕래가 많은 교통길목을 선호했거나 의도적으로 입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촌형' 주막은 새로 생겨난 마을의 주막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취락의 세포분열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두대간 영로는 어느 곳보다 주막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이를 토대로 괴산 조령과 단양 죽령의 백두대간 양사면의 영로 주막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났다.

먼저 조령은 백두대간 동쪽 사면(문경), 죽령은 서쪽 사면(단양)에 주막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조령 문경사면에는 7개, 연풍사면에는 2개의 주막이 존재했다. 반면 죽령 단양사면에는 8개, 풍기 사면에는 3개의 주막이 위치했다.

조령 문경사면은 영로 중간지대부터 정상 부근까지 주막촌이 고루 발달한 반면 죽령 단양 사면은 영저와 중간쯤에 주막촌이 집중적으로 형성됐다. 조령 연풍 사면과 죽령 풍기 사면은 주막촌이 크게 형성되지 않았다.

주막 이름에는 행정명을 사용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삼거리주막, 요광원주막 같이 순우리말과 院명을 사용한 경우도 있으나 나머지는 대부분은 행정명을 사용했다.

문헌상 우리나라 제 1호 고개인 계립령은 쇠퇴를 거듭한 끝에 근대기 들어서는 영로 기능을 크게 상실했다.

그 결과 조령이나 이화령과 달리 주막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주막이 고개의 성쇠와 거의 같은 운명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 1:5만 지형도' 상의 조령은 죽령에 비해 별도의 역사지리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동안 지역학계에서는 '하늘재'와 '계립령'이 같은 옛고개 인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어왔다. '조선 1:5만 지형도'는 이에 대해 '별도의 고개'로 표시했다.

지금의 충청-경상도 도계에 위치한 고개는 '限院嶺'(하늘재 지칭)으로, 그 뒤 미륵리를 지나서 나타나는 고개는 '鷄立嶺'으로 적었다. 이들 3개 지명의 상관성을 보다 정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 조혁연 대기자

자료 도움: 충북대 사학과, 산림청,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취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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