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항동 무항생(無恒動 無恒生)

2023.01.01 15:12:17

장정환

에세이스트

존재론적으로 새롭게 전환하는 한 해다. 새해마다 다짐하던 마음이 예전하고는 확연히 다르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새해가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인생을 '한 바퀴' 돌고 원점으로 회귀했다고 표현했다. 내게도 회갑을 지나고 나니 모든 게 리셋되었다. 난 매달 고정적으로 받던 월급 대신 실업급여로 연말까지 생계를 보태게 될 것이다. 고정급여에 턱없이 부족한 실업급여로는 생존이 어렵기에 다른 소득 생활을 해야만 하는 은퇴생활자로 진입한 것이다.

그래도 몇 개월은 좋았다. 매일 지겹게 반복하는 출퇴근 없이 여유로운 삶의 의미를 음미했다. 이런 게 제대로 사는 거라며 빈둥거리며 자족했다.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고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만끽했다. 쉬는 몇 달간 인구 소멸지역에 소박한 농가주택도 한 채 지었다. 이제 유유자적한 여생을 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대한민국의 은퇴생활자에게 그런 호사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난 방만한 자유를 누리던 몇 개월 만에 알아차렸다. 그나마 평균 정도의 중산층이라고 여기던 나도 생존 자체에 위기의식을 느꼈으니 은퇴자 대다수는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일 것이다.

생존에 대한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공허감일지도 모른다. 되돌아보니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은데 난 이제 허약한 늙은이로 들어서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천재지변이나, 질병, 빈곤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정작 두려운 것은 하루하루가 그냥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날마다 아무 의미 없이 거저 흘러갈 수 있다는 각성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잊을 만하면 만날 수 있는 자식과 손자들의 얼굴이었다. 그 만남으로 허무로 방전된 내 마음이 그나마 충족되었다. 그때마다 내 나이 무렵에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스러운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그리웠다.

그렇게 내 은퇴 생활은 시작되었다. 난 지난 몇 개월 동안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몇 번이나 소환했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라는 2천 년도 지난 말을 이렇게나 곱씹을 줄 난 몰랐다. 내가 원했던 것은 노동의 영구 면제, 밥벌이로부터의 해방이 아니었다. 단지 틀에 박힌 일상을 위무할 수 있는 장기 휴가나 안식년 정도가 필요했었다.

은퇴는 기나긴 여가라는 정처 없는 시간을 내게 부여했다. 내가 굴린 지난 30여 년의 쳇바퀴를 되돌아보았다. 그것은 지겨운 구속의 반복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름다운 삶의 패턴이었다. 그 규칙에 따라 내 인생은 제대로 작동하였고, 가끔 환하게 빛나기도 했다.

타이어를 새로 바꾼다는 은퇴의 의미처럼, 몇 개월의 여가는 내 생활뿐 아니라 생각까지 분명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젊음의 성장이나 성취가 아니라 장년의 성숙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걸작 같은 삶은 아닐지라도 다가올 노년의 존엄이나 자존감을 지키는 최소한의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맹자의 말을 패러디하여 '무항동 무항생(無恒動 無恒生)'이란 말을 만들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움직여서 변하지 않으면 삶이 아니다.'

난 새롭게 움직이고 싶었다. 경건하게 새로이 시작하기 위해 몸을 풀고 마음을 비웠다. 열정의 욕망으로 새기는 패턴이 아니라 원숙함이 깃든 실천적이고 소박한 생의 패턴을 원점에서 다시 만들고자 했다. 그 출발이 또 다른 즐거움으로 나를 가끔은 빛나게 할 것이며, 나를 지켜낼 것이다.

올해 아침에 맞이하는 장엄한 해는 내 생애 가장 덤덤하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일출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여는 것은 언제나 두렵지만 설레는 법이다. 난 그 미지의 세상을 내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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