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一期一會)

2021.10.24 15:00:11

장정환

에세이스트

무감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먹고 사는데 온 기력을 소진한 내 몸이 잠시 주춤거렸다. 비로소 우주의 순환과 세상의 생로병사를 구현해 낸 자연이 더 또렷이 보였다. 잎을 떨군 나무들도 이제는 간결한 익명자로 홀로 섰다.

3년쯤 되었나 보다. 만사가 시틋해졌다.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안간힘 쓰던 내 욕망이 거세된 듯 했다. 아무것도 흥미가 없었다. 일간지의 작은 지면에 10년 가까이 내던 칼럼을 그만 쓰겠다고 통보했다. 책읽기도, 쓰기도 다 무의미해 보였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잠시 길을 잃은 것처럼 나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밀물처럼 다가온 몇몇의 죽음이 있었다. 내 20대부터 정신의 의지였던 손위 처남이 회갑을 치른 후 돌아가셨다. 그 충격의 여파인지 장모도 얼마 안지나 소천 하셨다. 사반세기 동안 동고동락한 회사 선배를 암으로 잃었고, 한 사무실에서 몇 년간 함께 껄껄거리며 부대끼던 동료는 심장마비로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한 때는 마주보며 웃고, 담소와 밥을 나누고, 사람살이의 버거움에 서로 어깨를 도닥거려주던 이들이었다. 아직 결혼도 시키지 못한 장성한 아들을 두고 세상과 작별한 처남, 여태 배필도 못 만난 예쁜 두 딸을 남겨둔 채 내 동료는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모든 생명 있는 것들, 특히 한 개인의 삶이 절대적 미완으로 남겨진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체득한 순간이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우리네 삶은 얼마나 통속적이던가. 아등바등 사는 삶이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유골함을 땅에 묻으며,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는 그들의 따뜻함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려 했다. 한줌 가루로 들려주는 그들의 아쉬운 목소리, 버둥거리던 오욕칠정의 흔적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해답들을 그리움으로 간직하려 했다.

그즈음 법정과 성철스님의 법문을 구해다가 참 열심히도 읽기 시작했다. 삶 그 자체가 되면 행복과 불행의 분별이 사라지고, 번뇌와 보리가 별개가 아니라는 말씀, 우리에게 닥친 고통은 내가 불러들인 삶의 매듭이라는 것, 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주인이 된다는 말, 그 중에서 나를 수액처럼 빨아들인 것은,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는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단어였다.

난 그 한마디로 그 이후의 시간들을 버텨내었다. 이 가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일기일회, 생애 단 한번뿐인 가을이며, 내가 마주치는 너 또한 단 한 번의 인연이었다.

몇 달간 이름도 잘 모르고 지내던 인턴직원이 작별선물이라며 코팅한 작은 책갈피를 내게 건넸다. 2년 전 신년 사보특집으로 낸 내 기고문에서 하나의 문장과 프로필 사진을 발췌해서 직접 만든 것이었다. "사람이 위대한 점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 문구하나가 나를 깨어나게 했다.

미완인 채로 남겨지는 삶이 인간의 숙명인 것을, 미움과 처연함과 아쉬움으로 잊히는 신기루의 생애일지라도 우리가 다리이기 때문에 살만한 것임을 그 글귀 하나가 나를 일깨운 것이다.

누구와의 만남도 사소하지 않았다. 비록 밥 한 끼 다정하게 사주지 못한 인턴직원도 내겐 각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구체적인 손짓 하나로 한순간에 뚜렷한 자국을 남긴 그 청년을 난 잊지 못할 것이다.

서로에게 관통하는 시간이 있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시간이 흐를 때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익명으로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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