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속으로

2017.09.26 13:17:53

장정환

에세이스트

우물물에 둥근 달이 떠올랐다. 두레박을 내려 달을 건져보려 하지만 슬쩍 닿기만 해도 노란 달은 파문만 일으키며 사라졌다.

어릴 적 우리 집 우물은 동네에서 가장 물이 많았다. 물이 귀하던 시절, 마을에 몇 개의 샘과 우물로 물을 대던 시절이었다.

저녁 무렵만 되면 동네 아낙들이 물동이 하나씩을 이고 우리 집에 들락거렸다. 늙은 아낙이든 젊은 아낙이든 모든 여자는 수다스럽고 발걸음은 재발랐다.

물을 긷는 내내 아낙들이 내뱉는 말소리와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우리 우물은 퍼내고 또 퍼내도 물이 마르지 않았고 젊었던 엄마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집 물로 더운 저녁밥을 짓고 땟국이 흐르는 애들을 씻기고 마루에 걸레질을 할 거였다. 무엇이든 남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엄마는 뿌듯한 듯 했다.

하지만 용납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간간이 마당가 뒷간에 볼일을 보는 아낙들을 눈에 거슬려 했다. 갓 시집온 아낙이나 젊은 여자들의 달거리 흔적을 뒷간에서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역정을 내셨다.

그건 내 탓이 컸다. 여자들의 달거리를 몰랐던 나는 아낙들이 물을 긷고 다녀가기만 하면 재래식 화장실 바닥이 발갛게 물드는 것이 기이했던 것이다.

난 얼굴이 뽀얗고 몸매도 가녀린 아낙들이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긷는 것이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를 어린나이에 터득한척하며 아낙들이 불쌍하다고 말한 거였다. 난 진실로 그들을 동정하며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얼마나 힘들면 물을 길을 때마다 피를 흘릴까. 여자들은 참으로 안됐다."고 말했을 때 엄마의 당혹해하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니 아마 무척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어린 남자애들이 넷이나 되는데 조신하지 못하고 경망한 것들이라니."라며 엄만 연신 쯧쯧 혀를 찼다. 그 후로 엄마는 수시로 뒷간을 들락거리며 흔적을 감추는 일을 손수 떠맡아야 했던 것이다.

반백년전의 일이 갑자기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번 달 들어 많은 결혼식을 치렀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아들이 혼사를 마쳤고 함께 근무하는 여직원의 결혼식이 있었고 어제는 조카가 시집을 갔다

어린 두 며느리를 데리고 어린 조카의 결혼식을 다녀오면서 난 그 오래전 아낙들의 옥구슬 같던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그녀들의 풋풋하고 생명력 넘치던 몸짓이 50년 후의 새색시들과 묘하게 겹쳐보였다.

생활이 끝없이 이어지듯 생명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것은 이 위대한 여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로 우주와 시간을 만들어가는 존재, 난 그녀들을 감탄과 찬탄과 감동의 심정으로 거룩하게 우러러봤다.

한 달에 한번 달거리를 하듯 매일 피 흘리듯 살아가는 여자만의 몫을 난 나이가 들어 생각하게 되었다. 발갛게 물드는 여자들의 아픔은 '소녀의 순정'이란 꽃말을 가진 코스모스처럼 아름답지도 순정하지도 않다. 여자만이 감내해야할 무변한 고달픔이 세세년년 도처마다 상존한다.

출산과 육아만으로도 어린 여자들이 얼마나 벅차고 아픈지를 난 이제야 안다. 그 버거운 일들이 성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기조차 조심스럽다.

생명을 잉태하여 낳고 키우는 일만으로도 모든 여자들은 존중받아야한다. 나를 닮은 손주가 태어나고 자라가는 경이로움을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난 퍼내도 마르지 않던 어릴 적 으늑한 우물을 잊지 않고 싶다. 가을이 웅숭깊어질수록 우물 속에서 뚜렷하던 둥근달과, 물 긷던 아낙들의 까르륵 웃음소리를 오래도록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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