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서머

2022.02.20 14:38:27

장정환

에세이스트

북아메리카에서 한가을부터 늦가을 사이에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라고 부른다. 보통 맑게 갠 날씨이지만 연무가 낀 듯하고 밤에는 기온이 꽤 내려간다.

이 '인디언 서머'라는 말이 내 눈에 쏙 들어온 이후 사전에서 찾아본 내용이 이러했다. 단지 다른 대륙의 이상 기후 현상을 일컫는 말이지만 내게는 야릇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말인 듯 하고, 우리 베이비붐 세대를 지칭하는 은유적 표현 같기도 하여 한참 동안 기분이 묘했다.

지금 현업에서 은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인생을 일궈온 개척자적 자부심이 있다. 우린 어릴 때의 가난과 성년기의 풍요를 겪었다. 혹독한 군사독재에 순응해온 청소년기와 그에 저항하여 열정을 불사른 청년 시절이 있었고, 주 6일씩 일하며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산업 일꾼으로서 장년기를 보냈다.

즉, 초등학교 때 까지는 하루 한 끼는 죽으로 때웠고,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유사 군복인 교련복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으며, 운동장에서 총검술과 포복 등 군사훈련을 받았다. 대학 시절에는 매일 캠퍼스에 최루탄 냄새가 배도록 독재자에게 대항했다. 양은 냄비 하나 수저 두 짝으로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지만 자녀들을 모두 고등교육까지 마치게 했고, 지금의 가정과 국가를 일으켜 세웠다. 한마디로 용맹스러운 세대였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베이비붐 세대들이 이제 은퇴라는 단계를 지나 각자도생의 길로 나서고 있다. 우리 세대가 젊음을 불모의 땅에서 재창조했듯이 노년도 용맹정진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또래는 처음으로 생물학적·정서적 나이가 사회적 나이와 불일치한 세대가 됐다. 두 세기 전만 해도 평균 수명이 30~35세였는데, 지금은 100세를 말한다. 현재는 1년에 세 달꼴로 수명이 연장된다고 하니 축복인지 재앙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내게도 올해는 육십갑자를 꽉 채운 나이이고, 30여 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는 시기이다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에코붐 세대이면서 밀레니얼 세대인 내 두 아들이 의미있는 생일선물을 내게 주었다. 나름대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큰아들은 영화와 음악을 즐기고, 좋은 글을 맘껏 쓰라고 최고급 사양의 노트북을 사다 주었다. 15년이 넘은 노트북을 사용하다가 아들이 준 새 노트북을 켜는 순간, 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동 속도에 놀라고,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 영화의 화질과 음악의 사운드에 연신 감탄했다. 작은아들이 사다 준 스마트 워치는 인바디 기능이 있어 수시로 내 몸의 건강 상태를 점검할 수 있으니, 내가 나이를 먹는 동안 세상의 과학 기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멀리 와버렸다.

하지만 과학 기술은 기나긴 노년의 시간만 늘려주었다. 우리는 만기 제대했는데 또다시 입대하는 느낌이다. 가장의 의무를 다했고 이제 결산할 시기인데, 다시 연장을 챙겨야 하며 대차대조표도 더 작성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의 20, 30년을 어떻게 살아야 노쇠와 빈곤의 이중고를 피할 수 있을지 우리 세대는 아직 고민한다. 그래서 '인디언 서머'가 남의 얘기가 아니다. 이 늦가을 날씨는 잠시 따뜻하나 안개 자욱하고, 밤에는 수시로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우리 세대는 지금 길잡이 없이 결산이 유예된 인생의 늦가을로 나서고, 곧이어 결말을 알 수 없는 긴 겨울로 접어들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햇볕이 좀 적다 뿐이지 겨울도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운가. 그 겨울의 황혼도 새로이 다가올 봄의 새벽을 닮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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