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친구들에게 바침

2015.12.01 18:00:35

장정환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철학과 문학행위는 아마도 이름에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물, 산과 들판, 모든 공간과 시간에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해독해야할 텍스트와 상징이 되었다.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명사는 그 자체로 전설이고 역사이며 사연 담은 생애가 된다. 우리는 이름만 들여다봐도 한 보따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가 있다.

제주도의 무인도 '차귀도'를 오르면서 천년도 넘게 차귀도로 불려온 기원과 사연을 되새긴다. 여린 제주의 주민들은 힘 있는 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들 나름의 전설을 만들었고 그 전설의 위력으로 척박한 삶을 버티며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마음껏 부르며 제주도를 3일간 껄껄대며 걸었다. 사반 세기만에 만나는 친구도 더러 있었고, 총각이었던 그들은 이제 나이든 아내와 장성한 애들을 거느린 반백의 중년이 되었다.

강산이 두 번 이상 바뀌는 사이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풋풋하고 싱그럽던 친구들은 세월의 더께가 머리털위에 허옇게 내려앉았고, 야트막한 차귀도 언덕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숨가빠했다.

탐라의 수호신이 돌아갈 길을 차단한 곳, 이곳 차귀도에서 25년 전 우리들의 젊음이 차단당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25년 전 함께 입사한 친구들은 연수원 교육을 받고 전국 각지의 부임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경상도 한적한 바닷가, 전라도 맨 끝 해안가 발전소에서, 강원도나 충청도 오지 산골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동기친구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모두 아련한 추억으로 젖어 들었다.

"네온사인 하나 반짝이지 않는 이곳에서 도저히 청춘을 보낼 수 없다"고 매일 밤 절규(?)했다던 친구, 서울에 두고 온 예쁜 여자 친구를 더 이상 자주 만날 수 없어 사직서를 쓰고 잠적한 친구 이야기를 나눌 때면 모두들 가슴이 짠해졌고, 애틋한 마음에 일부러 더 낄낄거렸다.

밤마다 어둠속에서 절규하던 친구는 이제 네온불빛으로 눈이 부신 불야성의 도시를 매일 밤 누비고 있으니 다행이고, 사직서를 남기고 사라졌던 친구는 그때 그 여자 친구와 내 앞에서 마주보며 아직까지 토닥거리고 있으니 그 역시 다행이었다.

다행스러운 일만 있기에는 25년은 긴 세월이었다. 외환위기 시절, IMF는 강제로 회사를 잘게 쪼개었고 몇몇 친구들과는 헤어져야 했으며, 누구는 다른 회사로, 또 누구는 경건하고 정직한 실천가가 되겠다고 스스로 농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사연을 간직한 친구들과 3일내내 바다를 끼고 올레길을 걷고 오름을 올랐고 몇 개의 섬들과 또 몇 개의 등대를 지나쳤다.

우리는 항해하는 선박의 탐조등처럼 반짝이며 걸었고 계속 웃어대었다. 우리를 빛나게 하는 건 '친구'라는 이름의 등대였다. '친구'라는 이름의 단순성이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했다. 지난 25년간 그래왔듯이 앞으로의 25년도 그러할 거였다.

하지만 난 장담할 수는 없다. "이제는 눈부신 네온불빛 아래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라고 어떤 친구가 부르짖을지도 모르고, "잔소리만 해대는 늙은 할망구 좀 어떻게 해줘"라고 발악하는 친구가 생겨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 지극히 단순해서 아름답고 올연한 이름, '친구'가 정말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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