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날의 기쁨

2017.08.01 13:00:40

장정환

에세이스트

거의 모든 추억은 여름에 잉태된다. 내 영혼 깊숙이 각인된 시적 순간들, 그 추억어린 기쁨의 시간은 여름에 만들어졌다.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는 자연은 여름의 모든 순간을 풍성하게 채운다.

내 여름을 풍요롭게 만든 두 개의 여행이 있었다. 20년 전, 50년 전의 여행 이야기이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산길을 난 어린 막내아들과 걷는다. 문경 도장산 중턱의 심원사로 가는 길이다. 보이는 것은 높은 산과 하늘뿐이다.

아침부터 비경의 쌍룡계곡에는 피서 인파로 넘친다. 오직 우리 둘만 호젓한 산길을 차지하고 있다. 뿌듯하다. 좁은 산길에 우거진 푸른 나무들이 신선한 날숨을 내뿜는다. 길이 깊어지자 우리 둘의 몸은 녹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길가에 피어있던 이름 모를 꽃들, 이름 모를 새들의 짹짹거리는 소리, 매미의 우렁찬 울음, 아! 지금 우리에게도 아무런 이름이 필요 없다. 다만 온몸을 감싸는 청신한 산바람만 들이키면 된다.

산 중턱의 심원폭포에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몸을 담글 때 폭포의 푸르른 물 만큼이나 내 맘도 푸르렀다. 우리 둘은 깔깔거리며 물장구치면서 말 그대로 '놀았다.' 우린 얼마 만에 함께 놀았던가. 잘 논다는 것의 이런 즐거움을 얼마동안 잊고 살았던가.

아주 작고 예쁜 심원사 일주문만큼이나 소박한 마음을 간직하고 돌아온 우린, 그날 밤도 밤새도록 웃고 이야기하고 또 웃고 또 이야기했다.

꼬박 일주일을 도장산 기슭에서 그런 식으로 보냈다. 조급한 일도, 해결해야할 것도 없이 그저 자연의 여백으로 지내는 시간들, 난 막내아들과 보내는 이 한가로운 시간이 마지막이 될 줄 그 땐 미처 몰랐다.

그 여름의 가슴 벅찬 추억을 남긴 채 막내는 바쁜 중학생이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버린 막내는 이전보다 더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 막내가 올 가을에 장가를 든다. 이제 앞으로 막내와 단둘이 가지는 오붓한 시간이 얼마나 될지 난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여행이 있었다.

50년도 더 된 여행,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어린 막내아들로 함께한 여행이었다.

키 큰 미루나무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난 그늘아래 자갈위에 앉았다. 하얗고 까만 자갈돌은 볕에 달구어져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 햇빛에 반짝이는 시냇물이 촐랑거린다. 물소리는 경쾌하다. 난 시냇물의 급물살에 휩쓸려가다가 아버지 손에 막 구조된 참이었다.

아버지의 젊고 단단한 몸과 듬직한 얼굴을 난 자랑스레 바라본다. 나무그늘 밖의 뜨거운 열기와 시냇물의 서늘한 바람이 내 맨살을 번갈아 간질인다. 물가의 어항 안으로 작은 물고기들이 스며든다.

매운탕 냄비에는 피라미, 메기, 빠가사리며 꺽지가 뚜껑을 들썩이며 끓고 있다. 아버지는 라면과 국물을 작은 그릇에 옮겨 담는다. 한참이나 호호 불고는 싱긋 웃으며 내게 그릇을 내민다.

그것은 내 생애 가장 맛있는 라면이었다. 그 이후로 그렇게 맛난 라면을, 아니 그렇게 맛난 음식을 난 결코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 때의 아버지의 말, 몸짓, 표정, 웃음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면, 그 매운탕 라면을 한 번 더 먹을 수 있다면 난 얼마나 기쁠 것인가.

어린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한 어느 여름이 있었다. 또 어린 아들과 함께 보낸 또 다른 여름이 있었다.

한 순간 아득해지다가 다시금 안타까워지는 시간이지만 내게는 온몸 가득 뜨거워지는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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