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처럼 검은 밤을 지나는 법

2015.06.02 17:36:29

장정환

에세이스트

안개비가 내리던 남쪽의 항구였다. 여객선은 먼 길을 떠나기 위해 큰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람 속에는 바다 냄새뿐이었다.

난 어서 이 고적한 부두를 벗어나고 싶었다. 안개비와 바다 냄새와 떠나가는 배가 갑자기 견딜 수 없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부두를 가로질러 길모퉁이 2층의 찻집을 들어설 때 유난히 삐걱거리던 소리, 손님하나 없이 흘러간 팝송만이 빈 의자를 채우는, 버려진 등대마냥 외로워 보이던 찻집이었다. 난 그 찻집의 외로움과 내 외로움을 더해 커피를 두 잔이나 연거푸 마셨다.

창밖으로 떠나고 도착하는 작고 큰 여객선의 젖은 몸과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듯 이내 깜깜한 어둠으로 떨어졌던 시간, 그리곤 경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밤을 꼬박 지나서 돌아왔다.

커피처럼 검은 밤, 대학 일학년 봄이었다.

수십 년의 오랜 시간이 겹쳐졌지만 허름한 찻집의 눈부시게 하얀 커피 잔, 손끝으로 전해오는 커피 잔의 따스한 온기, 진한 커피 향에 스며있던 바다의 소금 내음과 여객선의 묵직한 고동소리, 찻집을 흘러 다니던 음악의 선율은 내게 한 장의 스틸사진처럼 그대로 정지해 있다.

진실로 홀로였고 쓸쓸했으나 감미롭던 내 젊은 날의 한 때는 그렇게 커피와 함께였다.

안개비가 내리는 날엔 난 그 항구를 떠올리며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때마다 빗물 같은 그리움으로 가슴이 아려왔다. 그건 젊은 시절 성장통의 외로움을 함께한 추억일 수도,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아득하고 먼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직장 동료 몇몇이 바리스타 동호회를 모집하여 커피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점심시간마다 짬을 낸 동호회 공간이 은은한 커피 향으로 채워질 때마다 동료들은 행복해 했다.

생두를 볶고 갈아서 얇은 물줄기로 부어내린 커피 한잔이 부드러운 쓴맛과 신맛, 단맛으로 입안 가득히 스며들었다. 9기압 90도에서 빠르게 뽑아낸 에스프레소는 그 깊은 맛을 더했다.

역시 쓸쓸함에 기대어 혼자 마시는 커피보다 커피 한잔이 안겨주는 따스한 향을 함께 나눌 때 사람의 체취가 묻어났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라는 말, 참 따스한 말이다.

잠들지 않는 이성의 채찍으로 적도의 바람처럼 뜨겁게 달구는 커피는 홀로 마실 때였다. 커피 한 잔의 향기에 적셔지는 위안은 사람의 이야기가 그 잔 속에 함께 담길 때였다.

커피를 내리는 사람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가장 깊고 부드러운 맛을 내기 위해 수도 없이 커피를 내리고 마시기를 반복하는 것은 남에게 온기와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사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커피 알갱이를 뜨겁게 녹이는 손길은 마음으로 응축시킨 자신만의 향기를 온몸으로 발산하는 것이고, 빗방울처럼 대화가 끊어질 때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다.

비 내리던 바닷가 찻집의 커피 향이 내 젊음의 한 때를 견디게 했다. 때로 커피 한잔이 인생을 버티게도 하는 것이다.

가끔은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한 커피 한잔을 마실 때라야 세상 또한 살만한 곳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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