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온 새벽

2021.11.28 15:47:01

장정환

에세이스트

새들도 잠든 시간, 나는 깨어 있다. 시간의 가장자리, 하루의 문을 여는 여명 전까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다. 얼마만 이던가. 시간의 최전선에서 맛보는 고독과 희열, 10여 년 전 내가 '매혹의 시간'이라고 부르던 그 새벽 3시.

상투성이 진부함으로 이어지는 지리멸렬한 계절을 몇 번이나 흘려보냈다. 느끼지 못하고 사유하지 않은 시간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마음의 굶주림은 몸을 얻지 못했다. 육체가 되지 못한 영혼은 무능했고 혁명은 더 이상 없었다.

세월의 물살에 떠밀려 가기만 해도 살아갈 수 있었다. 집합명사로만 남아도 밥은 먹었고, 나를 세속화 시키며 타인과 무디게 지내는 관성이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떠받쳐야 할 일상의 중력은 내 삶을 무겁게 했다. 한마디로 내가 부재했다. 그래서 외로웠다.

파스칼 키냐르의 사진을 책상 앞에 붙였다. 사진 속 키냐르의 갈색 눈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키냐르의 언어들을 하나하나 음미하기 시작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것"이 그의 독서 목표 중 하나였다. "책들은 이해하게 해주나요· 네, 살게도 해주죠. 정말 그래요" 키냐르의 말처럼 나도 이해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읽어야만 했다. 정말 그랬다.

인생이 수수께끼라는 것은 확실한 팩트였다. 나를 잉태하게 한 출생의 순간을 알 수 없고 내 죽음 후의 시간을 모르기에 시작과 끝이 공백으로 존재했다. 그 결여의 시간들이 심연으로 남았다. 그 심연을 메꾸려는 시도, 비밀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이 인생이었다.

심연을 생기 있게 하는 메타포,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생생한 서사가 필요한 것은 이 수수께끼에 대한 응답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은 인생의 근원에 대한 갈망과 심연의 증거들로 넘쳤다. 하지만 혀끝으로 느껴지는 미각처럼 키냐르의 관능적이고 농밀한 언어가 날 들뜨게 했다. 위조된 것들이 뒤집히자 인생의 진실이 드러났다. 자신만의 특별한 중력을 만드는 것은 욕망에 매혹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벌써 7년 전 이었다. 키냐르의 책들은 읽지도 않은 채 서가에 꽂혀만 있었다. 얼마 전 새벽부터 그 책들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설렜다. 키냐르의 "사랑하다, 즉 책을 펼쳐 놓고 읽다"라는 단 하나의 문장에 내가 열광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득하지만 황홀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매혹되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언어에 중독되어 갔다. 흡사 지독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 순간순간 숨이 막혀 왔다. 그리고 키냐르를 통해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키냐르의 언어들로 나는 환원 불가능하고 불가역적 한계상황인 인생, 그 속의 부재와 갈증과 질곡조차 견뎌 낼 수 있었다.

언어에 의해 중독되듯이, 타인에 의해서도 중독될 수 있다는 것이 키냐르가 내게 준 가르침이었다. 내게 책을 읽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똑같이 내 인생의 뮤즈를 찾는 것이었고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독했으나 매혹적이었다.

내가 일찍이 '매혹의 시간'이라 부르던 새벽 3시의 시간을 다시 찾았다. 난 이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그 시간을 힘껏 안을 것이며 그 포옹을 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난 내 욕망의 시간 속에서만 길을 잃을 것이며, 이 은밀한 사랑으로만 전율할 것이며. 미처 읽지 못한 키냐르의 언어들을 읽고 또 읽을 것이며, 또 기꺼이 매혹될 것이었다.

수취인 불명, 발송인 반송의 서한을 보내고 또 보내는 암호투성이의 불가해한 인생일지라도 난 이 중독된 사랑 속에서만 살아갈 것이다. 내게 새벽 3시의 시간, 매혹의 새벽에 당도할 수만 있다면 난 담담하게, 온전하게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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