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보잘 것 없던 시절의 마리아

2016.08.30 14:22:52

장정환

에세이스트

친구는 그때 수동성당으로 달려갔다. 뛰어간다고 해도 30분은 족히 걸리리라. 하숙집 좁은 마당의 수돗가에서 한참이나 구토를 하다가 거친 숨소리를 남기며 뛰쳐나간 거였다.

분노의 고독이 밤새 우리를 깨어있게 했다. 나는 창백한 형광등 불빛만 비추는 방안에서 구역질을 참아내고만 있었다. 저녁부터 개나리 담배 한 갑씩을 줄곧 빨아대었으니 몸이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새벽 4시를 갓 지난 좁은 골목은 아직 캄캄한 허공만 가늠될 뿐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인 그 친구는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괴로워했다. 잔뜩 상심의 독이 오른 심장은 그 무엇으로라도 해독해야만 했을 것이다.

난 성당의 마리아가 부드러운 입술과 자애로운 혀로 그 친구 심장에 가득 고인 독들을 핥아 주기를, 저 햇살이 비치는 아침 속을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바랐다. 한참 만에 돌아온 친구는 슬프고 지쳐보였고 무엇보다 외로워보였다.

그 당시 우린 마구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이 청춘이 싫었다. 답답하게 끈적이는 감정의 분비가 지겨웠고 이 자본의 시대, 억압의 시대, 폭력의 시대에 갇혀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이 닫혀있는 세상은 우리를 비생명의 수동체로 몰아붙였다.

아침 산책길에 강가의 찬바람을 느끼며 한참이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때 왜 갑자기 수십 년 전의 새벽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어제 저녁 TV에서 본 조국을 떠난 젊은이들, 캐나다로 호주로 일본으로 떠나 한국을 등져버린 젊은이들의 모습 탓일 것이다.

내가 내 나라를 견뎌할 수 없었던 지난시절부터, 젊은이들이 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지금까지 무려 40여년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일까? 도대체 내 나라는, 내 조국은 아직껏 왜 이 모양이란 말일까?

내가 중학교 졸업반이 되자 고등학교 선택을 고심해야 했다. 이른바 일류명문고 진학률은 학교의 명예였고 전국의 일류 학교 진학을 위해 몇몇은 별도 관리를 받아왔다. 난 그 경쟁에서 탈락했고 후기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정원 60여 명 중에 재수, 삼수생이 10여명이 넘는 교실엔 군대까지 제대한 친구도 섞여있었다. 60명 모두가 경쟁에서 낙오한 셈이었다. 인생 최초의 좌절을 뼈저리게 경험한 친구들은 모두가 어른스러웠지만 분노의 눈빛만은 감출 수 없었다.

그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자의 울분 같은 거였고 조숙한 절망이었고, 용납 못할 아픔이었다. 우린 그때 겨우 10대였을 뿐이다.

우린 정서의 전극(電極)이 지극히 민감해진 부류와 애써 태연한척 담담해하는 부류로 나눠져서 그나마 그 시절을 버텼다. 나와 친구는 어두침침한 하숙방에서 강은교나 황지우의 시집들을 뒤적이며 견뎌내었다. 방학만 되면 친구는 경상도 내 고향으로 10여장이나 되는 두툼한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다.

오늘 아침 그 친구가 보고 싶었다. 아직도 무한경쟁만 요구하는 이 빈한한 영혼의 나라, 순위와 연고로만 평가하는 이 저속한 나라, 자본과 권력만 숭배하는 천박한 이 나라에서 용케 길을 잃지도, 그 강요된 '틀'에 갇히지도 않은 채 살아온 내 친구.

그 친구와 함께 여태 아픔으로 남아 있는 수동성당의 마리아상을 우러르며 껄껄 큰소리로 웃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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