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바다

2015.08.25 13:15:50

장정환

에세이스트

가끔 내 존재의 안부를 묻는다.

때때로 지상의 중력이 너무 버거울 때, 무거운 돌덩이가 심해로 가라앉듯 가슴속 깊이 생의 비밀이 내려앉을 때, 그래서 내력 없이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면 난 내 존재에 대한 안부를 물어야 할 것만 같다.

내가 발걸음을 내딛던 곳곳은 안녕한가, 난 누구와 가고 있는가, 난 제대로 가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오늘도 회사 앞 큰길가에 참외와 아직 덜 여문 사과를 파는 과일행상이 왔다. 트럭 한가득 실려 있는 노란 참외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한 보따리를 샀고, 달콤한 내음을 풍기는 노란 참외를 집어 들자 내 젊은 한 때가 떠올랐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친구 둘과 함께 참외를 팔았다. 한 친구는 대학등록금을 벌기 위해, 또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난 부끄럽게도 제주도 배낭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여름 청주대교 아래로 무수한 참외를 던져야만 했다. 새벽 일찍 농산물 경매시장에서 받아온 참외는 뜨거운 오후가 되면 물러터지기 시작했고, 심하게 농익은 참외는 눈에 띄는 족족 즉결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얼마나 자애로운지 난 그때 알았다. 무르기 시작하여 팔기도 애매한 참외를 어머니들은 기꺼이 사주었고, 오히려 따뜻하게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날 팔지 못한 참외는 참외 짱아치를 담갔고, 급기야 짱아치가 집에 넘쳐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떨이'의 미학까지 깨우쳤다.

그렇게 해서 나는 겨우 제주도로 떠날 수 있었다.

내륙에서 제주도로 가는 길은 멀었다.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고 반나절, 목포에서 완행여객선으로 갈아타고 종일토록 가는 거리였다. 뱃전에서 바라다본 바다는 아름답고 장엄했으나, 검푸른 파도는 위태로워 보였다. 맹렬한 물결소리에 난 괜히 서러웠고, 바다가 내뱉던 비린 냄새에 하릴없이 가슴이 아려왔다.

제주도로 가는 이 길이 꼭 생의 길을 따라가는 긴 여정과 닮았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점점이 놓여 있던 섬들을 지나칠 때마다 섬의 아름다움 뒤에 섬이 보채는 외로움과 아픔이 느껴졌다.

전날 이 갑판에서 뛰어내린 한 중년남자 때문에 내 맘은 착잡했고, 차가운 바닷물로 잠겨버린 그의 모진 삶이 야속했다.

목포에서 '가야호' 여객선이 출발한지 8시간이 지나서야 멀리서 제주도의 등대 불빛이 빨갛게 깜빡거렸다.

파도 넘실대던 심연의 바다, 뱃길에서 마주쳤던 갈매기들,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있던 외딴 섬들, 흔들리던 갑판에서 달뜬 숨결로 부대꼈던 여행객들, 그 모두가 이제는 30여년의 먼 시간 너머에서 가물거렸다.

그 30여년의 시간동안 난 지상의 즐거움을 한껏 누렸으리라. 아이들이 첫 걸음마를 떼며 까르르대던 웃음소리, 처음 마련한 자그마한 집안에 들여 놓았던 벤쟈민 화분, 그 잎마다 반짝이던 아침 햇살, 방금 씻고나온 사랑하는 사람의 비누냄새. 하지만 이 기쁨들을 위해 지불해야했던 지상에서의 아픔과 외로움 또한 그 얼마이런가.

살아내며 만들어가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모두가 눈물겹다. 그것이 생의 비의이니 어쩔 것인가.

아직도 뜨거운 여름, 달콤한 참외 한 알을 깨물며 난 지금 내 존재의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함께 참외를 팔던, 한 때는 젊은 청춘이었던 두 친구의 안부도 묻는다. 안녕하신가?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