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출은 추억이다

2016.01.05 22:03:58

장정환

에세이스트

지나간 시간이 아름다우면 추억이 되고 슬프면 기억으로 남는다고 했던가.

새해 달력을 벽에 걸고 사람들은 바다로, 산 정상으로 일출을 보러 떠났다. 그건 시간의 틈새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봉인되기를, 새로 맞이하는 시간이 일출을 고대하는 만큼 더 빛나는 순간이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새해의 일출을 보러 가족과 연인들이 길 떠나는 자체가 사실 축제의 시간이다. 떠나는 순간에 어제까지의 상투적인 시간들은 저 멀리 사라지고, 지리멸렬한 시간들은 태양의 에너지로 시간의 부피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를 것만 같다. 그래서 모두들 일출을 향해 떠난다.

나도 그렇게 떠난 적이 있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해이니 꽤 오래되었고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에 구제 금융을 받을 때이니 그리 행복한 시기는 아니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소 500마리를 싣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떠나는 장관을 TV 생중계로 흥미롭게 지켜보던 해였다.

소떼의 행렬을 본지 불과 일주일 만에 속초에서 북한 잠수정이 침몰했고, 또 얼마 후에 동해시에서 무장간첩이 발견되었다. 거의 전시상황처럼 군대의 작전이 시작되었고 비상경계령, 통금 등의 조치로 살벌한 시기였다.

그때 떠났다. 추석명절 3일간을 속초에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밤에는 한가위 보름달을, 아침에는 동해의 일출을 본다는 계획이었지만 동해의 준전시상황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 강렬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 어느 역대정권보다 북한과 평화적인 교류를 주창하는 대통령이 있었고 임신한 소떼 수백 마리가 북한으로 건너가는 시기에, 로켓포와 수류탄 등 중무기 가득한 잠수정이 잠입하는 이 아이러니한 장소를 직접 봐야겠다는 내 객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도 잘 몰랐다.

큰애가 중학생, 작은애가 초등학생이었으니 애들은 불안해했다. "괜찮아, 우리나라 군인은 세계에서 최고로 용감하고 우리 군인이 더 많잖아"라며 안심시켰다. 동해의 길목마다 총을 든 군인들이 검문했다. 그때마다 차 트렁크를 열었고 모든 가방을 까뒤집었다.

드디어 도착한 민박집, 적막만이 감도는 휑한 속초,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가족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창을 열면 바로 경포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창밖으로 동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다. 물론 눈앞을 가리는 장애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만 있었으니까.

그날 밤 우린 바다위에 둥실 뜬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고 아무런 걱정 없이 정말 편안한 밤을 보냈다. 창 바로 앞에서 소총을 든 초병들이 밤새 우리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다음날의 한적한 바다 일출은 우리만이 독차지한 듯 풍성했다. 붉게 충만했던 텅 빈 여백의 바닷가를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 여명의 시간이 내게 선명한 장면으로 봉인되었다.

그 때의 큰 아들이 이제 장가를 들었다. 내 아들은 새로 태어날 그의 아들과 함께 장차 또 다른 일출을 볼 것이며, 일출의 추억이 하나씩 쌓여 내 아들의 생애 또한 완성될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과 장소가 미래의 그 사람을 말해준다. 그러니 내일도 지구 저편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바라볼 일이다. 빛나는 일출의 시간이 인생의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는 지점임을 18년 전의 추억이 내게 일깨우고 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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