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의 대화법

2018.08.21 15:30:29

장정환

에세이스트

누구나 자기만의 언어가 있다. 자기만이 좋아하는 단어가 있고, 자기만의 독특한 말버릇이나 말투가 있다. 난 사람들마다 달리 발화되는 말에 따라 누구에게는 매력을 느끼고 누구는 별로라고 여긴다.

말을 멋들어지게 하는 사람이 실은 속이 텅 빈 사람이기도 하고, 말은 어눌하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깊이가 있어 빠져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말하는 언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몇 마디만 나눠보면 그 사람이 진실한지, 거짓투성이인지도 알게 된다.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앵무새처럼 전하는 사람인지도 구별된다.

내 삶이라는 것도 나만의 말을 익히는 과정이며, 남에게 어떻게, 어떤 말을 해 오며 살았는지 보여주는 언어의 여정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엄혹한 70년 대의 군사독재 시절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전교 어린이회장을 직선으로 뽑던 해였다. 반장이랍시고 담임 선생님이 회장에 출마하기를 권유했다. 장문의 출마 연설문을 몇 날 몇 밤에 거쳐 달달 외웠다. 무슨 구국의 결단을 하는 것처럼 결연하게 마음을 다잡고 당선의 포부를 가졌던 것 같다. 담임뿐 아니라 가족들 앞에서 예행연습을 수 없이 반복했다.

그 때 큰 형이 표정관리나 제스처 코치를 맡았다. 연설 마지막 즈음에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팔을 힘껏 치켜 올려야 한다는 친절한 지도까지 받은 상태였다.

드디어 결전의 날, 오랫동안 연습한대로 연설은 술술 나오고 난 마지막 힘을 다해 팔을 높이 휘둘렀다. "여러분!" 하며 팔을 쳐드는 순간, 갑자기 다음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연단 앞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3천여 명의 눈이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난 '괜히 팔을 올렸다'는 후회가 엄습했다.

어린 나이에도 마무리는 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몇 마디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린 후 연단을 내려왔던 것 같다.

그 때도 지금보다 더 뻔뻔했는지 별로 창피하지는 않았다. 다만 말을 할 때 과장된 몸짓이나 어설픈 허세는 좋지 않다는 교훈 하나는 건졌다고 위안을 삼았다.

그 이후로도 남들 앞에서 얼마나 많이 과장된 몸짓과 허세의 말을 하며 지냈는지를 돌이켜 보니 오히려 지금 더 얼굴이 화끈거린다.

난 오랫동안 충만한 말을 찾으며 살아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을 발견하고, 언어를 수집하고, 새로운 말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생각했기에 작가의 길로 발을 들여 놓았다.

사람들을 대할 때 자꾸만 침묵하게 되는 것은 내가 할 말을 갖지 못한 것이라고 여겼기에 난 끝없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내려했다. 내 언어가 텅 비게 된다면 텅 빈 존재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었기에 충만해진 언어로 내 실존을 꽉 차게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욕심을 버렸다. 얼마 전 레이첼 리먼 필드의 '어떤 사람'이라는 시 한편을 읽었다.

"이상한 일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몹시 피곤해 진다는 것,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속 생각이 움츠러 들어 마른 잎처럼 바삭거린다는 것. 그러나 더 이상한 일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 생각이 갑자기 환해져서 반딧불처럼 빛나게 된다는 것."

그러니까, 언어 이전의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런 대화법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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