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과 배추전

2018.05.08 14:40:37

장정환

에세이스트

누군가 자신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말하지만, 나의 팔 할은 추억의 음식이라 난 말하겠다.

추억의 음식이 날 먹여주고, 나를 기쁘게 했고, 눈물 나게 했고, 나를 선하게 하고 성장시켰다. 그 추억의 맛들은 나를 끈질기게 붙들며 내 삶의 팔 할을 장악했다. 내 영혼과 내 기질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추억의 음식은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밥상을 차릴 줄 몰랐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코흘리개 다섯 자식들의 입에 밥을 떠 넣어주고 난 뒤에야 물에 찬밥을 말아서 허겁지겁 몇 술 뜨던 내 어머니의 잔상으로도 남는다.

내가 아는 누군가는 외로워지면 밥을 많이 먹는다고 했다. 먹고 또 먹어도 돌아서면 허기가 진다고 했다. 그 견딜 수 없는 허기가 서러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운다고도 했다.

채울 수 없는 허기, 어쩌면 그건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거나, 간절한 기다림이거나, 메꿀 수 없는 결핍이었을 것이다. 밥을 꼭꼭 씹어 먹듯이 그 외로움을 꼭꼭 씹어 삼켜버리고 싶은 본능의 욕구였을 것이다.

나 또한 나이가 들면서 생일을 거듭 맞을 때마다 항상 의아했다. 자식들이 비싼 음식을 사주고 풍성한 요리를 차려줘도 가슴 한편이 휑한 바람이 지나가듯 허전했다.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평양냉면이 갈증이 일듯이 당겼다. 평소에 냉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내겐 생경한 경험이었다. 내 몸이 그토록 평양냉면을 요구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이제 누군가와 화해하고 싶을 땐 냉면 한 그릇 먹자고 할 것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맑은 육수까지 후루룩 마시고 나면 서로는 뒤끝 없이 담백한 사이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서로의 관계가 권태롭고 밋밋해질 때면 면발이 탱글탱글하고 새콤달콤한 비빔냉면을 먹자고도 할 것이다. 입안에 살짝 매콤한 맛을 간직한 채 다시금 예전의 달콤한 시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냉면 한 그릇이 평화의 상징이 되고 모든 사람들의 소울 푸드가 된다는 것이 내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때 '배추전'이 떠올랐던 것이다.

배추전은 농토가 적은 경상도 내륙이나 강원도 산악지방의 음식이었다. 충청도 출신인 아내는 경상도 남자에게 시집오기 전까지 한 번도 먹어보지도 못하고 구경조차 못한 음식이었다.

어릴 적 연탄불 위의 무쇠 프라이팬에서 노릿하게 익어가던 배추전은 내게는 친근한 음식이었다. 가난한 시절에 손쉽게 구해서 모든 가족을 배불려주던 올갱이국이나 고들빼기 무침과 더불어 배추전은 내 기억에 각인된 대표 추억의 맛이었다.

배추전의 묘미는 물을 많이 섞어서 멀겋게 된 밀가루 반죽으로 구워내는 데에 있다. 비싼 밀가루를 아끼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참맛의 비법은 묽은 반죽에 있는 것이다.

배추전은 광주리에서 충분히 식혀야 한다. 게다가 손으로 죽죽 찢어서 입 안 가득 움켜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어야 제 맛이다. 하지만 배추전을 굽는 것이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 내가 그것을 부쳐보고야 알았다. 낮은 온도에서 오랫동안 익혀야 하는 슬로푸드이기 때문이다.

음식 하나가 영혼을 편안하게 위로해 준다는 것을 난 요즘 절감하며 지낸다. 어린 시절의 소박한 밥상이 최고의 맛으로 여겨지는 건 그것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기에 그렇고,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가족을 기다리던 밥 한 그릇의 애절함이기에 그렇다.

그러니 내 예쁘고 착한 며느리들아. 요리 배워서 나를 대접하려고 애쓰지 말거라. 난 배추전 한 접시와 막걸리 한 병이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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