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하빠'가 뛴다

2016.05.24 15:48:22

장정환

에세이스트

웬만하면 손주놈 얘기는 안 쓰려고 했다. 팔불출이 따로 없고, 점점 푼수가 되는 것 같아 좀 참으려고 했다. 아내는 날 볼 때마다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놀리니 정말로 그런가 하고 거울을 쳐다보게 된다.

퇴근시간이 되기도 전에 손주 볼 생각으로 내 맘은 늘 바빴다. "꼭 연애하는 기분이야. 그놈이 보고 싶어서 도저히 못 참겠어." 함께 근무하는 어린 여직원은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손녀도 아니고 손자하고 연애하세요? 호호호, 막둥이 얻었다고 생각 하세요."

내게 막둥이가 생겼다면 내 마음이 지금과 똑 같을까 생각해보니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손주이기에 얻을 수 있는 감동은 아들하고는 또 달랐다.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를 대신해서 아내와 함께 손주를 돌본지 한 달이 지났다, 그 1개월이 1년은 된 듯 까마득하다.

처음 2주일은 아내도 나도 녹초가 되었다. 2시간 간격으로 우유를 타서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을 시키고 나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 몰랐다. 그 와중에 손주놈 코감기로 이틀에 한 번씩 병원에 데리고 다녔다. 나도 금세 지치는데 아내는 24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애를 키워낼지 가끔씩 막막해지곤 했다.

오십견과 퇴행성관절염에 자기 몸 하나도 추스르기 어려운 아내는 가히 초인적이라 할만 했다. 난 아내의 모성애와 책임감에 감탄했고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얼마나 위대한지 존경스러워졌다.

며느리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신문에 낸 내 칼럼 '별에서 온 그대'를 읽고 보내온 거였다.

'주말에 아가랑 하루 종일 있다가 집에 돌아가는 차안에서 아기가 보고 싶고 아기한테 미안해서 울기도 했는데, 저희 대신 아버님 어머님이 너무 사랑해주셔서 제가 눈물을 보였다는 것이 사치였다고 생각됩니다. 아기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겠습니다. 아빠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난 그 글을 읽고 가슴이 아팠다. 주말에 함께 지내다가 집에 돌아갈 때면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물을 삼키는 나이어린 며느리의 뒷모습에 항상 내 마음이 짠했었다.

방긋거리며 재롱을 피우는 손주놈을 볼 때마다, 이 예쁜 모습을 나 혼자만 바라보기가 괜히 미안했고 아들 부부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했다.

언젠가 함께 근무하는 젊은 직원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맞벌이하면서 애들 둘 키우는 일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 생활과 다를 바 없어요" 난 그 말에 100퍼센트 공감한다. 이 땅에서 맞벌이하면서 애를 키우는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정말로 독립투사와 같다.

손주육아를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출산과 육아정책이 얼마나 허술하고 형식적인지를 절감했다. 공공기관이나 대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체 종사자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야한다. 아니면 위정자나 정책입안자들이 의무적으로 한 번씩 육아를 해보길 권한다.

지금의 정책으로는 젊은이들에게 결혼과 출산, 육아를 강요할 수 없다. 경제논리보다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함을 알아야 한다.

오늘도 이 나라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기꺼이 뛰어야 한다. 팔다리가 쑤시고 결려도 뛴다. 이 세상에 생명을 키우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행복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엄중하고 구체적인 진리를 자그마한 손주놈이 매일 방실거리며 내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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