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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문방사우 - '단산오옥'명 고려 먹으로 본 우리 먹의 역사

  • 웹출고시간2015.12.03 18:35:13
  • 최종수정2015.12.03 18:35:13

편집자

지난 10월23일 보물 제1880호로 지정된 청주 명암동 출토 '단산오옥'명 고려 먹의 앞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먹이다.

ⓒ 사진제공=국립청주박물관
지난 1998년 당시 청주 명암동에서 진행중이던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 현장에서 먹(墨)이 하나 발견됐다.
두 조각으로 부서진 먹을 조립해놓고 보니 명확한 '丹山烏(단산오)' 글자와 '玉(옥)'자로 추정되는 획이 하나 보였다.
지난 10월23일 보물 제1880호로 지정된 '단산오옥명 고려 먹(丹山烏玉銘 高麗 墨·단산오옥 글자가 새겨진 고려시대의 먹)'의 발견이었다.
건설공사 현장에서 단산오옥명 고려 먹을 발견한 성재현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사를 만나 발굴 과정과 먹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리나라 먹의 역사

일반적으로 먹은 후한의 서예가이며 제먹자였던 위탄(韋誕·179∼253)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후한서'에 "등황후(鄧皇后)가 즉위하자 만국에서 공물을 헌납하였는데, 세공지(歲供紙)와 먹(墨) 등이었다"라는 기사 등을 통해 볼 때, 위탄 이전에 이미 먹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먹의 시초는 중국의 한대초기라는 학설도 있다.

먹이 발명되기 전인 갑골시대와 금석시대에는 골편이나 금석에 문자를 새겼다.

사람의 지혜와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고 갑골문이나 금석문만으로는 기록하기가 어려워지자 죽편이나 목편 또는 겸백 등에 문자를 쓰게 됐다.

이를 죽간시대(竹簡時代)라 하며 당시 먹 대신에 죽정(竹挺)에 칠(漆)을 묻혀 썼으므로 죽간칠서(竹簡漆書)라 했다.

이때 먹의 원료는 오늘날의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과 같은 자연산 '석인'이라는 광물에 칠을 섞어서 썼다.

그 후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그을음(煙煤)을 칠 대신 쓰고 이어 아교풀과 섞어 쓰게 되면서 제먹(製墨)의 단계로 발전됐고 후한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과 같은 먹을 만들게 됐다.

처음에는 송연먹을 생산하였고 유연먹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오대십국시대에 이르러서이다. 당시 남당의 후주가 먹의 사용을 장려해 유명한 먹공들이 나왔고, 그 후 송·원·명·청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많은 먹공이 배출되고 일품이 생산됐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부터 먹을 사용했으나 위만·낙랑시대에 중국의 것을 본받은 것이며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됐다.

일찍이 삼국시대에 먹이 사용되고 있었음은 고구려가 송연먹을 당에 세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신라의 양가(楊家)·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먹으로서 그 품격이나 질이 매우 좋았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조선먹의 황금시대를 이뤘다.

육우(陸友)의 '묵사(墨史)'에 의하면 "고려가 진공한 먹은 맹주(猛州·현 평안남도 맹산)의 것이 가장 좋고 순주(順州·현 평안남도 순천)의 것이 그 다음이며 그 먹의 어떤 것은 평노성(平虜城·현 평안남도 영유)에서 진공된 먹이라 했으며 어떤 것은 순주 혹은 맹주에서 진공된 먹이라 하였다"고 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지방이 위치가 중국과 가까워 이곳에서 생산된 먹이 주로 수출됐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의 먹의 사용은 601년에 고구려의 담징이 제지법과 제먹법을 전해준 데서 비롯됐다.

송연먹은 평안도의 양덕(陽德)에서 생산된 것이 유명하고 유연먹은 해주(海州)에서 생산된 것이 유명했으며 한림풍월(翰林風月), 초룡주장(草龍珠張), 부용당(芙蓉堂), 수양매월(首陽梅月) 등이 상품이었다.

단양에서도 먹이 생산됐으며 그 중에서 상품을 단산오옥(丹山烏玉)이라 했다.

◇단산오옥 고려 먹

지난 10월23일 보물 제1880호로 지정된 청주 명암동 출토 '단산오옥'명 고려 먹의 앞(왼쪽) 뒷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먹이다.

ⓒ 사진제공=국립청주박물관
'단산오옥'이라고 명칭된 고려 먹은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 먹으로 지난 1998년 청주시 상당구 1순환로 인근에 위치한 명암타워 뒤쪽에서 발견됐다.

1998년 도로공사 당시 삼국시대 토기편이 출토된 후 국립청주박물관은 청주시에 조사를 의뢰했고, 그 후 조사과정에서 먹이 발견된 것이다.

삼국시대 토기편과 함께 구릉 정상부에서는 목관묘 10기가 확인됐다. 목관묘는 도로공사를 위한 분묘 이장 과정에서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여러 목관묘 가운데 1호 묘에서는 가로 4.0㎝ 세로 11.2㎝ 두께 0.9㎝의 먹과 함께 중국 송나라 화폐인 원평통보(元豊通寶, 1078~1085) 등 동전 4점, 철제가위, 청동젓가락이 출토됐다.

출토된 먹은 크게 두 토막이 난 채 글씨가 쓰여진 면이 위로하고 무덤 주인 머리 부근 철제가위 위에 놓여 있었다.

먹이 두 조각 난 이유에 대해서는 목관묘가 무너지면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성 학예사는 "먹의 상태가 매우 약화돼 있었기 때문에 노출, 발굴하는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발굴 과정에서 먹 하단부에 작은 상처가 생겨 아쉽다. 그래도 그 상처가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고 당시 현장의 상황을 설명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 부분은 복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먹은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먹과 비슷한 크기이며 모양도 같았다.

먹 앞면에는 가장자리를 약간 돌출시켜 윤곽을 돌려 그 안에 돋을 무늬를 넣었고 가운데 부분에는 위아래가 뾰족한 장방형의 테두리가 있다.

그 장방형 테두리 안에는 '丹山烏'라는 글씨가 있고 烏자 밑에는 '玉'자로 추정된 먹을 사용하면서 닳아 없어진 '一'자 획이 남아 있다.

'一'자를 '玉'자로 추정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충주목 단양군 조는 단양의 토산을 설명하면서 '墨 最良 號爲丹山烏玉(묵 최량 호위단산오옥)'이라고 기술했다. 의역하면 '단양의 먹, 최고 품질로 단산오옥으로 불려진다'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도 세종실록 지리지와 똑같은 문장으로 기술돼 있다.

'단산오(옥)'의 단산(丹山)은 단양의 옛 이름으로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단양군(丹陽郡)으로 승격된 1318년(고려 충숙왕 5)까지 사용됐다.

오옥(烏玉)은 먹의 별칭인 '오옥결(烏玉□)'의 약칭으로 단산오옥(丹山烏玉)은 '단양 먹(丹陽 墨)'을 뜻한다.

뒷면에는 긴 꼬리를 휘감으며 나는 용(龍)이 양각돼 있으나, 함께 부장된 철제가위의 녹이 심하게 붙어 문양이 뚜렷하지는 않다.

이 먹은 먹집게로 집어 쓴 흔적이 있고, 아랫면은 사용으로 인해 약간 비스듬히 닳아 있어 무덤의 주인공이 생전에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재현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박물관 내에 소장된 단산오옥명 고려 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단산오옥명 고려 먹을 처음 발견한 성재현 학예사는 "단산오옥명 고려 먹은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먹 가운데 제작 장소와 출토지가 유일하게 명확하다"며 "먹이 발견된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무덤 주인의 유해는 흔적만 남은 상태에서 썩을 가능성이 컸던 먹이 양호한 상태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성 학예사는 "청주는 지역 곳곳에서 경주 못지 않은 문화유물들이 발굴된 전통적인 문화도시"라며 "청주에서 발굴된 단산오옥명 고려 먹은 고려시대 먹 기술과 발전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전했다.

단산오옥명 고려 먹의 정식 명칭은 '청주 명암동 출토 단산오옥명 고려 먹(淸州 明岩洞 出土 丹山烏玉銘 高麗 墨)'으로 국립청주박물관 본관 전시실 고려문화실에 전시 돼 있다.<끝>

/ 손근방·성홍규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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