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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소풍길 - 단양방곡도예촌

찬란한 가을 숲에서 장인의 속살을 만나다

  • 웹출고시간2011.11.10 17:45:4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달항아리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 나들이 좀 했습니다. 단양 방곡도예촌 서영기선생의 작품으로 당신께서 빚은 달항아리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마음에 닿는 것이라 했습니다. 흙으로 빚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장작가마에서 여러 밤낮을 불꽃과 사투하더니 두둥실 휘영청 보름달처럼 세상의 빛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순백의 여인이 프러포즈 하듯이, 보드라운 속살을 드리우며 당신 곁으로 다가오는데 가슴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옛 조선의 도공들이 달항아리에 넋을 잃고, 달항아리에 심취하고, 달항아리에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녀를 시집보내지 않고 작업실에 두고 내내 보고 싶다 했습니다.

서영기씨의 달항아리는 간결하고 따뜻하며 정감 넘친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공예관에서 열린 선생의 초대전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불혹을 갓 넘긴 단정한 청년이었는데 달항아리 앞에서 자리를 뜨지 않고 몇 시간을 서성거렸습니다. 나는 청년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지척에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청년은 갑자기 달항아리를 향해 넙죽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달항아리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순백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청년은 서울 덕수궁 돌담길 끝자락의 빌딩 10층에 사무실을 두고 보험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대강 대강 누더기 옷을 걸친 채 제 소매 끝자락을 꼭 붙잡고 엉거주춤 따라 왔습니다. 아마도 낯선 세상, 낯선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적잖게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출입문 쪽의 젊은이가 소리쳤습니다. "항아리 왔다. 항아리 왔어" 너도 나도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야·" "족보도 없는 게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누더기 옷을 벗기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꽤나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한 겹, 한 겹 겉옷을 풀어 헤치고 하얀 속살을 보여주었습니다. "우와! 대단한 놈이네!" "아냐, 엉덩이 큰 아줌마 같아!" 그들은 섹시하다, 아름답다, 복덩어리다, 무르익은 여인네다, 품고 싶다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갖다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서울 촌놈을 보는 기분입니다.

조태영씨의 공방에서 숨쉬고 있는 다기들이다.

청년은 한국공예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예뻐진 것 같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게 사무실 한 가운데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신혼방 꾸미기를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겠지요. 박물관의 수장고나 전시장의 케이스 안에 있는 것 보다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마음 놓고 숨쉬며 노래할 수 있는 곳이 좋겠지요. 따뜻한 눈빛, 예의바른 미소, 진지한 사색…. 순백의 여인은 낯선 곳에서의 첫 경험인데도 전혀 긴장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사무실 구석구석을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도공의 작품을 한 점씩 갖고 있는데 가지런한 모습이 참 예뻤습니다. 게다가 작품마다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청년이 매일같이 씻겨주고 안아주며 사랑과 관심의 고삐를 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업의 특성상 술과 놀이를 더 즐겨할 법도 한데 이처럼 작품 컬렉션에 심취해 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청년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모든 작품들이 생기발랄하거나 수줍어하거나, 흠이 있거나 힘이 넘치거나, 청초하거나 투박하거나 저마다 꿈을 안고 삽니다. 우리네와 똑같이 생명의 숨소리로 가득합니다. 저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하면서 세상을 배웁니다. 저들을 바라보면 삶의 에너지를 느낍니다. 문화는 행복입니다."

순백의 여인을 시집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청년의 문화사랑을 가슴에 품고 옵니다. 이래서 문화는 가진 자의 것이 아니라 향유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는구나, 문화는 누더기 같은 우리네에게 맑고 고운 바람이 되어 가슴속으로 밀려오는구나, 그리하여 사람은 반드시 어떤 만남에 의해 성장하고 또 다른 기쁨을 찾게 마련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하루 저는 섬뜩하고 으스스한 삶의 그림자로 가득한 이 세상에, 구역질나는 세월 속에서 문화를 통해 가슴 뛰는 열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가벼운 에너지로 충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백색이/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싸늘한 사기지만/그 살결에는 따사로운 온도가 있다'고 노래한 어느 화가의 백자 예찬론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서영기씨의 백자는 단아한 맛으로 라이프스타일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첩첩산중 방곡도예촌은 17세기 무렵 백자, 분청사기 등을 생산하던 민수용 도자기 마을이었다. 도자기 제작 원료인 사토와 유약의 원료인 물토가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데 물토는 전국 최상급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스테인리스에 밀려 도자기가 단종되다시피 하였지만 1990년 후반 흙의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다시 활로를 찾게 되었다. 방곡도예촌의 특징은 전통기법 그대로 장작가마를 사용하고 민수용 도자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가스가마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수수하며 투박한 질감을 자랑한다. 다완, 찻잔, 다기세트, 식기세트…. 곁에 두고 보면 볼수록, 쓰면 쓸수록 정감이 넘친다.

명장 서동규씨의 장작가마가 불꽃을 피우고 있다.

단양방곡도예촌에는 서영기 작가를 비롯해 일곱 명의 도공이 불꽃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녹자 다완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명장 서동규씨, 재유를 활용한 다기를 제작하는 현운요 조태영씨, 한빛도요 서한기씨, 양천요 윤일중씨, 단곡도예원 모승일씨 등이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벗 삼고 있다. 소슬한 가을바람에 마음 시리고 아픈 사람은 방곡도예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면 어떨까. 자연의 숨결을 발견하고 도공의 땀과 열정의 만나며 우리 고유의 삶과 멋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걸어야 할 길이기에 고단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외길인생을 걷는 장인들의 숨결이 궁금하지 않는가.

햇살 눈부신 늦가을,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와 함께 공방 문을 두드려라. 구릿빛 도공이 해맑은 웃음으로 반길 것이다. 갓 구어 낸 다기에 차 한 잔 음미해보자. 내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불꽃 튀는 장작가마를 들여다보면서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죽기를 각오하며 구워지고 다듬어진 질그릇의 위풍당당함을 느껴보자. 때로는 도공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면 뒤꼍의 사금파리 신세가 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는 작가의 내밀함을 엿보자. 그렇다. 삶이란 이따금씩 부족하거나 아쉬운 구석이 있어야 긴장감이 돌고 우리의 삶에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것이다. 물욕의 시대에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도공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보면 어떨까.

/ 글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공예비엔날레 부장)·그림 강호생(화가, 충북미술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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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