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봄을 탑니다

2016.03.29 13:50:45

박선예

수필가

봄입니다. 산수유가 노란 봄을 몰고 오나 싶더니 곧 개나리가 그 뒤를 잇기 시작했고 목련과 벚꽃도 봄소식을 안고 줄을 서 있습니다. 항상 이 맘 때가 되면 나는 아픕니다.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꽃소식이 들려오면 여지없이 도지는 불치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병이 오면 난 무기력해집니다. 종일 피곤하고 밥맛이 없어 빵이나 과자, 아이스크림으로 끼니를 대신합니다. 그래서 병치레가 끝나면 몸무게가 장난이 아닙니다.

올 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괜스레 나른하고 싱숭생숭합니다. 텔레비전을 봐도 건성이고 책을 읽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집안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손자 손녀들의 사진도 내 맘을 가져가지 못합니다. 자꾸 답답합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봅니다. 바람이 부드럽습니다. 국숫발 같은 봄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아, 간지럽습니다. 몸도 마음도 덩달아 간지럽다고 야단입니다.

"선배님, 완연한 봄입니다. 봄처럼 따스한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후배한테서 문자가 왔습니다. 유난히 여리고 감성적인 후배입니다. 그녀도 나처럼 봄을 타나 봅니다. 동지를 만난 것 같아 반갑고 기뻤습니다. 바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지금 그대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같이 점심이나 먹읍시다."

금세 답이 왔습니다.

"선배님, 커피는 제가 쏠게요."

먼저 가서 기다렸습니다. 남자들만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한참동안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봄의 무기력에서 구원해줄 그녀이기에 혼자라는 어색함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나타났습니다. 단정한 재킷에 화사한 머플러로 한껏 멋을 부린 그녀가 환하게 웃었습니다. 참 예뻤습니다.

"못 보는 사이에 더 예뻐졌네.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그녀의 입이 방긋 귀에 걸렸습니다.

"근데 선배님은 몇 년 전만 해도 날씬하고 예뻤었는데 왜 이렇게 살이 쪘어요? 하기는 선배님도 이젠 손자를 넷이나 둔 할머니이지요."

아, 이럴 수가. 그렇지 않아도 살 때문에 걱정인 사람한테 이 무슨 말이랍니까.

"나잇살이지 뭐. 통계를 보면 좀 통통한 사람이 오래 산대. 내 나이되면 외모보단 건강이 우선이야."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러나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득부득 커피를 사겠다는 후배를 뒤로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14층까지 걸어서 말입니다. 다리가 아프고 숨이 턱까지 찼지만 한 계단 한 계단 기를 쓰고 올라왔습니다. 기필코 살을 빼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얼굴이 화끈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간질거리던 맘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계절병의 해답을 찾았습니다. 기를 쓰고 계단을 오르는 일이 힘에 부쳤나 봅니다. 그 일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생각을 못한 것 입니다. 그녀의 말이 명약이 되었나 봅니다. 청을 뿌리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커피, 아직도 유효한 거죠?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납시다."

후배에게 문자를 보내고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살랑 봄바람이 들어와 이마의 땀방울을 건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간지럽습니다. 나는 여전히 봄을 타나 봅니다. 어쩌면 평생 안고 갈 병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말했지요. 여자는 봄을 탄다고. 아무래도 나는 아직 여자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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