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문자

2016.02.02 18:14:46

박선예

수필가

정말 싫다. 끝없는 집안일에 이제 신물이 난다. 연속극의 돈 많은 여인네처럼은 아니라도 가끔 누군가의 손을 빌리고 싶다. 왼 종일 뒹굴 거리며 쉬고 싶을 때도 있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다. 하지만 어림없다.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 잔뜩 쌓인 빨래, 햇볕을 받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먼지들이 자꾸 나를 재촉한다. 어서 치워 달라고. 어서 움직이라고. 훅 짜증이 밀려온다. 이런 날엔 몸과 마음이 무겁다.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조금 더 버텨볼 요량이다. 그런데 이번엔 휴대폰이 야단이다. "뵐 때마다 밝고 예쁘셔서 참 보기 좋아요. 환한 모습 오래 간직하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메시지 말미에 보낸 이의 이름이 있다. 정말 뜻밖이다. 그녀가 이런 메시지를 보내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는데….

그녀는 답사모임의 회원이다. 그녀가 우리모임에 가입하던 날, 난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익히 소문은 들었던 터라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다. 역시 행동거지가 날라리 같았기 때문이다. 나와는 맞지 않는 타입이라 여겼기에 가까이 하지도 않았지만 버스의 앞자리를 선호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뒷자리를 즐겨 앉아 자연히 서로 무심하게 지내온 터였고, 내가 싫어하니 상대방도 당연히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더 의외였다.

살다보면 싫은 사람이 있다. 겉모습보고 지레 짐작하거나, 들은 풍문으로, 첫 만남의 느낌만으로 거부감이 느껴지는 사람 말이다. 이유와 상관없이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많지만 난 처음의 선입견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뜨악하게 지내는 못된 성격을 가졌다. 어디 그뿐이랴. 좋게 바라보았던 사람도 누가 허물을 끄집어내면 금방 그 사람을 경계하고 미덥지 않게 여기는 좀생이이기도 하다.

불혹이면 세상사에 흔들림이 없고 지천명이면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는데 어찌된 영문일까. 불혹을 넘긴지 이미 까마득하고 지천명이 지난 지 십년이 지났건만 하루에도 수십 번 갈팡질팡하고 하늘의 뜻은커녕,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헛나이를 먹은 성 싶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덕분에 기분이 좋다고. 막 짜증이 나서 힘들었는데 구해줘서 고맙다고. 그녀는 깔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짜증이 났다고요? 선생님은 항상 밝고 환하셔서 짜증 따위는 가까이 오지도 못할 텐데요?"

아무래도 난 변덕쟁이인가 보다. 그녀의 말에 마법이라도 걸린 듯 진짜 짜증 따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끝이 없던 집안일을 콧노래를 부르며 해 치우고 있었다.

커튼을 열었더니 밝은 햇볕이 거실 깊숙이 들이닥쳤다. 올겨울 두 번째로 추운 날씨라는데. 그 혹한을 뚫고 왔으면서도 햇볕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그 햇볕 덕분에 춥고 어둡던 거실이 금세 따뜻해지기 시작하였다. 밝고 온화한 기운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녀의 문자 한통으로 행복한 나처럼 환하기 짝이 없다.

가끔 나 자신에게 화 날 때가 있다. 낯선 사람에게 선뜻 말도 걸지 못하고, 상대의 장점을 칭찬하기 계면쩍어 마음에 담아두기 일쑤이며, 큰마음 먹고 내 마음을 얘기하려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 의례적인 인사말로 그칠 때가 허다하니 말이다.

조금은 부끄럽고 선뜻 내키진 않지만 용기를 내려한다. 그동안 소원했던 이들과 이유 없이 뜨악하게 지낸 이들에게 정성껏 문자메시지를 보내려 한다. 어쩌면 그들도 나와 같은 좀생이에 못된 성격의 소유자들일지도 모르니까. 아마 그들도 내가 다가가면 변덕쟁이가 되어 기쁜 마음으로 맞아 주겠지.

잘 빨아진 빨래를 힘차게 털어 해가 잘 드는 베란다에 널었다. 아, 기분이 개운하다. 혹한을 헤치고 온 햇볕과 한통의 문자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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