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기적을

2013.07.23 17:14:29

박선예

수필가

"제발 우리 소를 살려 주세요, 차라리 내가 죽지 저 꼴은 못 보겠소."

흙탕물 위로 간신히 코끝만 내민 채 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소를 바라보며 초로의 남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행히 인명구조를 끝낸 구조대의 도움으로 소들은 이틀간의 사투에서 벗어났다. 간신히 물을 빠져 나와 주인 앞에서 털썩 쓰러지는 젖소를 쓸어안으며 초로의 남자는 또 눈물을 흘린다. 벌써 몇 일째인가. 어찌 이리도 많은 비가 쏟아지는지.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 정말 하늘이 뚫렸단 말인가· 예년 같으면 이미 장마가 끝나고 폭염에 시달릴 7월 하순인데…….

문득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남매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간 김에 아이들 집에 들러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게릴라성 폭우가 서울을 휩쓸고 있다는 마지막 뉴스를 시청하고 막 잠자리에 들참이었다. 목욕탕에 있던 딸아이가 다급하게 나를 찾았다. 하수구에서 조금씩 역류하는 물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당황했지만 원인을 찾기 위해 하수도 앞에 앉았다. 그 순간 갑자기 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하수도 물을 뒤집어썼지만 미처 닦아낼 겨를이 없었다. 비명소리를 듣고 방에서 뛰쳐나온 아들과 함께 역류하는 물을 퍼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목욕탕뿐 아니라 현관으로도 쉴 새 없이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니, 이러다 감전사고 나겠어요. 중요한 물건만 챙기고 빨리 나가세요. 2분 후에 퓨즈 내립니다."

아들의 다급한 재촉에 정신없이 밖으로 나와 보니 사방이 물 천지였다. 정강이까지 차 오른 물을 헤치고 나와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휴대폰과 가방을 들고 나온 아들이나 갈아입을 옷을 들고 나온 딸은 나보다는 나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의 옷차림에 고작 아들의 구두 한 켤레를 품에 들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내 꼴이라니......,

소식을 듣고 시누이 내외가 달려왔다. 시누이 내외는 거리낌 없이 집안에 들어서더니 바닥에 있는 짐을 높은 곳으로 올리고 옷장의 아래 서랍도 빼내어 침대 위로 올려놓았다. 2층과 3층의 아저씨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대문에 모래주머니를 쌓고 양수기로 집안의 물을 퍼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골목을 휘감고 무섭게 흐르던 물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마치 모세가 바닷길 열 때의 영화 장면처럼 신기하게도 싹 하수도로 빨려 들어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집집마다 물을 퍼내느라 아우성이었다. 골목은 젖은 이불과 옷가지, 가구들로 가득 찼고 어린이놀이터는 금방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기온이 높은 탓인지 물에 젖은 가재도구에서는 곰팡이가 피어나고 더러운 물에 접촉한 신체부위는 오돌오돌 돌기가 생기더니 참기 힘들 정도로 가려웠다. 특히 소독용 럭스에 무방비로 노출된 손과 발은 짓물러 참기 힘들 정도로 쓰라리고 따가웠다. 꼬박 일주일을 버리고 씻고 말리고 소독하는 일로 정신없이 보냈다. 죽을 지경이었다.

그 뒤로 큰비가 내리는 날이면 날씨속보를 들으며 밤을 새우는 버릇이 생겨났다. 우리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이 아무 탈이 없으면 정말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해마다 누군가는 치러야 될 일인데 우리대신 운수 나쁜 다른 사람이 선택 당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정녕 인간은 자연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해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것인지. 참담하다 못해 자괴감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국민들은 위기에 강하다고 한다. IMF의 불안에서도 빨리 벗어나서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2002월드컵도 성공적으로 치러내었으며 남북한의 극한 긴장도 지금 잘 풀어나가고 있다. 그런 저력이라면 아무리 장마가 길어도, 폭우가 쏟아져도 우리국민들은 하나가 되어 또 한 번의 기적을 꼭 이루어 내리라 믿어마지않는다.

쓸려나간 집 더미 위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던 젊은 농부의 퀭한 눈동자가 계속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슬픈 중복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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