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꽃 그늘아래

2013.05.28 15:17:13

박선예

수필가

봄은 희망이다. 생명이다.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햇볕, 포근한 기운이 넘치는 아늑한 계절이다. 그런데 올 봄은 전혀 봄 같지 않다. 여름을 방불케 하는 낮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미처 적응하지 못한 꽃과 나무들이 몸살을 앓고 있고 잔디들은 누렇게 타들어가고 있다. 어디 꽃과 나무들뿐이랴. 사람들도 예기치 못한 더위에 속수무책이다. 낮과 밤의 일교차까지 크게 벌어져 신체 리듬도 영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유 없이 피곤하고 식욕도 의욕도 없다. 그래서인지 습관처럼 켜놓은 텔레비전이 온갖 세상사를 들추며 유혹하지만 모두 관심 밖이다. 그저 멍하다. 이 모두가 봄의 실종 탓이리라. 어릴 적 친구들이 충주에 왔다. 바람도 쐴 겸 큰맘 먹고 내려왔단다. 어린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뒤이어 남편과 자식들의 안부를 물었다. 가족들 이야기로 넘어가자, 들뜬 분위기가 갑자기 한숨 섞인 걱정으로 바뀌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아이들 학업까지 중단할 지경이 된 친구, 대학을 졸업한 아들과 딸이 취업을 못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예민한데 남편은 그런 아이들을 못 마땅하게 여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다는 친구, 남편이 권고사직을 당하더니 두문불출하고 집에서 화만 낸다는 친구, 모두들 걱정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단다. 계절만 봄이 실종된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의 가정도 봄을 잃고 방황 중이었다. 동병상련이다. 잊고 있었던 울증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올봄 남북관계가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렸다. 개성공단 출입차단 조치가 취해진 지 벌써 두 달이 가까워지고 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우리 기업인들의 피해가 엄청나고 협력업체들도 부도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하루 빨리 남북대화가 이루어져야 할 터인데. 문제해결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북한이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정신병자"라고 비난하면서 중국 측에 특사를 보내 6자회담을 비롯한 대화를 원한다고 언급하자, 우리 외교부장관은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안 된다."고 못 박았고 북한이 6.15 기념행사를 남북 공동으로 진행하자고 제의하자, 정부는 진정성 없는 구태의연한 행위라며 사실상 불허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긴밀히 공조해나가겠다고 밝혔지만 남북 간 불신의 벽이 높아 당분간 대화의 장이 마련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남북한 교류의 봄이 언제 온단 말인지. 그저 답답한 현실이다.

며칠 전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였다. 가까운 친지가 이혼을 하였단다. 부부 모두 명문대를 나와 사회에서 각자 제몫을 다하고 있었고 남매도 잘 길러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대학재학중에 만나서 사랑을 하였고 양가의 반대를 극복하고 혼인을 하였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잘 이겨내어 집안 아이들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본보기였다. 그들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꼭 이혼을 했어야 했는지 되묻고 싶다. 스스로 봄을 버린 그들이 한없이 가엾어 눈물이 흐른다. 가슴이 아프다.

텔레비전 속 기상캐스터가 열심히 일기 예보를 하고 있다. 일요일에는 더위가 누그러질 것이라고 한다. 또 월요일부터는 날씨가 제자리를 잡아 예년의 봄 날씨가 계속될 것이란다. 휴 다행이다. 왠지 날씨만 제자리를 찾아준다면, 한반도의 정세도 친구들 가정도 이혼의 아픔을 겪는 친지까지도 다시 봄날이 올 것 같다. 희망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어디선가 봄 냄새가 난다. 향기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등나무 꽃이다. 오월의 끝인데 아직 연보라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등나무 꽃 줄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람이 분다. 바람 따라 등나무 꽃 줄이 한들한들 춤을 춘다. 꽃 줄 따라 내 눈이 춤을 추고 꽃 줄 따라 내 몸도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나고 콧노래가 절로 났다. 어느새 실종된 봄이 내 곁에 와 있었다. 역시 봄은 생명이며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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