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선물

2013.09.03 15:36:58

박선예

수필가

올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다. "100년 이래 가장 무덥다"라는 주요 신문과 방송사의 예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낮에는 가마솥이요 밤에는 찜통이었다. 원전가동 중단으로 인한 전력 대란 때문에 에어컨도 마음 놓고 사용할 수가 없었고 하루 종일 돌고 돌아서 달아오른,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기에는 너무 벅찬 나날이었다. 더위를 떨쳐내려고 기발한 방법을 동원해 봐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올 여름의 무더위는 바로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무더위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은 가까운 사람한테 당하는 배신이었다. 올 여름에 그만 그것을 알고 말았다. 그래서 여름 내내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9월이다. 얼마 전만 하여도 더위가 극성이었는데. 후텁지근하던 바람이 한결 상쾌하고 내리쏘던 폭염도 점점 독기를 잃어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한기마저 느껴져 가을이 왔구나싶다. 며칠 전의 날씨와는 천양지차이다. 그러고 보니 더위를 물리친다는 처서가 지난 지 벌써 여러 날이다.

이제는 가을인가보다. 유난히 하늘이 깊고 파랗다. 파란하늘은 왠지 서럽다. 서러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콧날이 시큰해진다. 아침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저어, 선배님, 바쁘신지.....,"

조심스런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왔다.

"네, 누구신지.....,"

내목소리도 조심스러워졌다.

"네, 저예요. 저."

아, 그녀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순간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온몸이 굳어졌다. 사그라졌던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

"하늘이, 하늘이 너무 파래요. 가슴이 시려 와서.....,"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내 귀에 전해오자, 이상하게도 치솟던 분노가 사라졌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의 목소리도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누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왜 가슴이 시린지. 왜 눈물이 나는지. 서로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토록 단단히 걸어 두었던 내 마음의 문이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활짝 열렸다.

그녀와 나이 차이가 있지만 서로의 속내를 털어 놓고 지낸 사이이다. 한 두 해도 아니고 십 수 년을 그러하였다. 그런데 한참 무더위가 극성이던 날, 더위 때문이었을까. 아님 너무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당돌하고 도발적인 그녀의 말투에 그만 온갖 정이 떨어지고 말았다. 나이 어린 후배와 왈가왈부를 따지기도 그렇고. 참 서운하고 기가 막혔다. 몇 날이 지나도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녀를 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아 그녀를 만날 것 같은 장소는 일부러 피해서 다녔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녀도 나만큼이나 힘이 들었나보다. 냉정하고 싸늘해진 나 때문에 고통스러운 여름을 보냈나 보다.

지독한 더위와 아픔을 겪으며 아끼는 사람일수록 서로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넘지 말아야할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아래 사람에게는 더 조심스러워야하고 모범도 되어야하며 나름의 예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정말 가을이다. 역시 가을은 고독하지만 따뜻하다. 허탈한 가운데서도 여유롭고 편안하다. 소멸되어가는 중이지만 마냥 평화롭고 풍요롭다. 그래서 가을에는 모두들 선량해지고 맑아지나 보다. 넉넉해지고 사람다워지나 보다.

이제 그녀를 만나야겠다. 가슴시리도록 푸른 날을 잡아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파란 가을 하늘은 그녀와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묘약이 될 것이다.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이 오늘따라 더 친근하고 포근하게 보인다. 마음이 맑아진 탓이리라. 넉넉하고 깊어진 마음 때문이리라. 그것은 가을이 내게 준 소중한선물이다. 고통스럽게 보낸 여름의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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