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 마술

2016.08.30 14:26:43

박선예

수필가

"언니, 얼른 텔레비전 켜봐. 지금 채널A에서 큰언니와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오고 있거든."

부산 사는 여동생이 전화를 해서 다짜고짜 TV를 보라고 야단이다.

"선예야, 네 언니랑 엄마가 지금 TV에 나오고 있어. 넌 줄 알았는데 이름보고 언니란 걸 알았어. 얼른 봐."

이번엔 서울 사는 친구가 소식을 알려왔다. 어디 그뿐이랴. 쉴 새 없이 전화와 카톡이 울어대었다. 그 프로를 시청한 친구들과 지인들의 전화였다.

"우리 오빠도 대장암이야. 네 언니가 완치된 방법 좀 자세히 알려줘."

"언니가 밥에 넣어 먹는다는 그 잡곡은 어디서 구입할 수 있어?"

우리 집에서는 채널 A를 시청할 수 없어 그 내용을 모르는데 자꾸 전화가 오니 참 난감하였다.

언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잦은 병치레 때문에 일 년에 한 두 번은 꼭 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밥보다는 약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자, 가족들은 절망하였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구나 생각하였다. 서둘러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다. 언니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걸하였다. 항암 치료의 후유증은 언니를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죽은 듯이 조용하다가 어느 순간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가 하면 몸부림을 치기도 하였다. 언니는 먹지도 못했고 자지도 못하면서 그저 숨만 쉬는 산송장이었다. 마치 삶을 포기한 듯싶었다. 언니뿐 만이 아니었다. 항암치료를 거듭할수록 형부도 지쳐갔다. 이러다 형부가 먼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팔십을 눈앞에 둔 친정 엄마가 언니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날부터 엄마의 시계는 언니에 맞추어졌다. 음식을 거부하는 언니에게 먹어야 산다며 자꾸 먹이고, 토하면 또 먹이고. 움직여야 산다며 누워만 있는 언니를 일으켜 걷게 하고. 그러나 언니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며 울부짖었다. 너 죽으면 나도 죽겠다는 어머니의 간절함에 언니가 조금씩 달라졌다. 살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언니의 건강은 나날이 좋아 졌고 엄마를 따라 실버댄스를 배우면서 우울증에서도 벗어났다.

지금 팔십 다섯 살 친정 엄마와 육십 세살의 언니는 이웃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다. 엄마와 언니는 항상 한 몸처럼 붙어 지낸다. 같이 산책하고 운동하고 봉사도 하면서 말이다. 이런 모습이 보기 좋았나보다. 엄마와 언니는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하다. 참 사이좋은 모녀사이라고.

어느 날,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단다. 대장암 말기를 극복한 사연을 담아 방송을 하고 싶다고. 몇 번을 망설였단다. 그러나 언니는 자기처럼 절망하였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이 되고자 촬영에 임했단다. 가감 없이 생활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졸지에 어떤 곡물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한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단다.

"난 분명히 말했거든. 우리 엄마 정성 때문에 살아났다고. 음식 골고루 먹으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더니 완쾌가 되었다고 말이야."

"왜 그렇게 편집이 되었는지 모르겠어. 다 그 곡물 얘기뿐이야. 어디서 구매 하냐고. 방송만 보면 마치 그 곡물 때문에 내가 살아난 것처럼 보여."

언니는 방송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하긴 평범한 전업주부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편집이란 마술을 거치면 옳고 그름의 분간이 애매모호해지고 허구가 사실이 되며 소도둑도 바늘도둑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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