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이 좋다

2016.04.12 16:11:51

박선예

수필가

이 아파트로 이사 온지 벌써 스물하고도 다섯 해이다. 생전 늙지 않을 것 같던 남편도 어느새 반백이 되었고, 건강이라면 자신만만하던 나도 요즘 어깨가 아프고 시력도 시원치 않은 걸 보니, 이십 오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가 보다. 하기는 중학생이던 아들이 일가를 이루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초등생이던 딸도 아이 둘을 가진 학부모로 바뀌었으니, 생각보다 긴 시간임에 틀림이 없다.

어디 우리 가족뿐이랴. 맨 날 징징거리던 사층 꼬맹이가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서 한의사가 되었고, 사내아이 같던 칠층 딸내미는 애교 넘치는 예쁜 아줌마로 바뀌었으며 십층 아저씨의 코흘리개 어린애들도 제 몫을 다 하는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삼십대 후반이었던 우리부부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버렸고 아파트도 우리처럼 나이를 먹고 늙어버렸다.

낡고 허름한 아파트가 싫어서일까. 아니면 지겨워져서 일까. 이웃들이 하나 둘 떠나갔다. 그럴 때마다 뭔지 모를 섭섭함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남편과 나는 이사를 꿈꾸어 본 적이 없다. 자식들이 집을 옮기라고 성화를 부려도 왜 이 집에 미련이 남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스물다섯 해 전,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날이었다. 밤에 시내 야경을 보고 딸아이가 탄성을 질러 대었다.

"엄마 아빠, 저기 좀 보세요. 크리스마스트리 같아요. 우리 집이 우리한테 주는 선물인가 봐요. 와, 정말 너무 너무 예뻐요."

이삿짐 정리도 뒤로 미루고 우리 네 식구는 한참동안 야경에 취해 있었다. 어찌나 환상적이고 아름답던지. 좋아라하는 자식들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덩달아 우리 부부도 참 많이 행복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인 것 같다. 이 아파트가 그냥 좋아지기 시작한 순간이.

이 아파트는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었다. 금봉 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어 봄, 여름, 가을과 겨울 산의 변화를 맘껏 볼 수 있었다. 거실에 누우면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와서 별이 총총한 밤이면 아이들과 쏟아지는 별빛을 보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었다. 불면증이 오면 거실까지 찾아오는 달빛을 친구삼아 잠을 청할 수 있었고 가끔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감빛노을도 감상할 수 있었다. 설거지를 하다 작은 창을 통해 본 계명 산의 설경도 예상 못한 보물 중 하나였고 봄이면 노란 개나리, 여름에는 빨간 장미꽃, 가을이면 노란색 은행잎과 붉게 물든 느티나무도 다 뜻밖의 보물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가장 큰 보물은 사랑스러운 손자들의 흔적들이다. 아직도 벽에 붙어 있는 한글 공부와 숫자 공부, 알파벳과 낙서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으레 키를 재고 표시하느라 막 그어 놓은 금들과 숫자들…. 지저분하고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냥 놔두려 한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손자들을 그리워하듯 손자들도 그 흔적들 속에서 함께 산 순간들을 기억할 테니깐 말이다.

우리 집은 참 볼품없다. 사십년이 된 장롱과 화장대, 낡아버린 식탁과 책장, 생명이 다 되어가는 가전제품들, 그리고 유행이 지난 커튼과 나이 먹은 우리 부부…. 그래도 난 우리 집이 좋다. 금봉산과 계명산의 경치가 좋고 내 자식들이 12년 동안 다녔던 학교들이 다 보여서 좋다. 익숙한 이웃들이 있어 좋고 더더욱 손자들의 향기가 있어 참 좋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 다 아름답다는데, 스물다섯 해의 아름다움을 추억하기에 이만한 집이 또 어디 있으랴 싶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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