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이었다

2014.12.01 16:06:40

박선예

충북도 문화관광해설사·수필가

정말 뜻밖이었다. 어머니가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이.

오랜만에 친정에 갔다.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 드리려고 대청소를 시작하였다. 어머니의 침대 머리맡에는 여러 가지가 놓여있었다. 무릎 수술을 한 후 아직 회복중인 어머니는 자주 쓰는 물건은 침대 한편에 두고 사용하였는데 침대 위를 정리하다 매트리스 밑에서 두툼한 공책 한 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비뚤거리고 널찍한 글씨체는 분명 어머니의 글씨였다. 드문드문 섞어 쓴 한자는 그림 그리듯 쓰여 있고 틀린 글자도 수없이 많았다. 못 배운 게 한이라던 어머니는 독학으로 한글을 깨우쳤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문을 배우러 학원을 다녔는데 아마 그때부터 일기를 쓴 듯하다.

어머니의 일기를 훔쳐보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씩씩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참 많이 외로운가보다. 일기장은 자식들과 손자, 증손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하였다. 좋은 일에 기뻐하고 나쁜 일에 가슴앓이하면서 자손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할머니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어렵고 무서워하였는데 뜻밖에도 고된 시집살이를 시킨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할머니한테 못 다한 효도를 가슴아파하며 다음세상에서 다시 만나고 싶단다.

결혼 40주년이 되는 날, 아버지한테 처음으로 선물을 받았나보다. 선물도 기뻤지만 '사랑하오' 라고 쓴 아버지의 카드에 무척 감동을 받았단다. '사랑하오. 수고하였소' 라는 단 두 줄의 글에 그동안 섭섭하고 힘들었던 모든 일이 눈 녹듯 사라 졌단다. 혼자가 되고 십여 년이 지난건만 아직도 그 글을 읽으며 아버지를 생각한단다. 그 글귀는 어머니 침대 위 벽에 걸려있는 작은 액자 속의 글이다. 처음 그 액자를 벽에서 발견하고 우리는 어머니를 실컷 놀렸었다. 에이, 사랑 고백한 글을 공개하다니. 엄마는 부끄럽지도 않은가봐 라고.

어머니의 일기를 읽고서야 그 두 줄의 글이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인줄 알았다. 지금까지의 고생과 눈물뿐만 아니라 늙음과 허망함도 용서하며 삶의 끝자락을 이겨내는 버팀목이었고 아버지와의 소통 길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일기를 몰래 봤다는 비밀이 생겼지만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어 참 기쁘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도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니. 행여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봐 몸이 아파도 참으며 혼자 병원에 다녔다니.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며 외로움과 서운함을 일기를 쓰면서 푸는 우리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마음에 감사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현관문소리가 들린다. 얼른 매트리스 밑에 어머니의 일기장을 집어넣고 눈물을 닦았다.

"다리도 성치 않으면서 무슨 운동을 그렇게 오래 해!"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큰소리로 타박하자, "네 아버지 몫까지 오래 오래 살려고 그런다." 어머니는 내 마음도 모르고 그저 웃으면서 농담으로 대꾸하였다. 그래요. 엄마. 제발 오래오래 사세요. 어머니가 있어 이 세상이 얼마나 든든한데요.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51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