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2013.03.05 14:48:40

박선예

수필가

언니가 그랬다. 사랑은 그리움이라고. 딸은 이랬다. 사랑은 기쁨과 환희라고. 그러나 이웃의 후배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사랑, 참 예쁜 말이다. 듣기 좋고 말하기 좋고 기분 좋은 말이다. 사랑~사랑~ 가만가만 되뇌어 보라. 마음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진다. 미소가 피어나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삼사십 년 전에는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말하지 못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사랑이라면 으레 이성간의 사랑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요즈음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친구, 이웃사촌, 고부간끼리도 쉽게 나누는 말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생명이 없는 돌이나 그림, 형체가 없는 일이나 취미마저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일까. 사랑이라는 말의 느낌이 예전과 사뭇 다르다. 꼭 필요하면서도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공기처럼 너무 흔해져 버려 가끔 사랑의 의미마저 과소평가하게 된다.

매일 일간지나 뉴스 등 언론매체를 장식하는 사건들을 보면 어처구니없을 때가 많다. 부모를 버린 자식, 딸을 유흥가에 팔아넘긴 부모, 친구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아이들, 이웃집 아이를 유괴하고, 쳐다본다고 살인을 하는 사람. 이런 이들이 넘쳐 날수록 사랑이란 단어도 점점 넘쳐나고 있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문득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시청하였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누렁이'라는 개가 있었다. 주인은 이사를 가면서 개를 버리고 떠났다. 그것을 안 몇 명의 사람들이 누렁이를 잡아먹기 위해 철사 줄로 목을 조였다. 다행히 누렁이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쇠줄이 누렁이의 목에 깊이 파고 들어가 썩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찮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는 주민들과 제작진의 노고는 감동 그 자체였다. 사랑이었다. 결국 누렁이는 제작진의 도움으로 회생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공포에 떨었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음식마저 거부하였다. 그러나 곰돌이라는 개를 데려오자 신기하게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사람에게도 조금씩 마음을 열더니 삶에 관심을 보였다. 미물이지만 자신을 향한 사랑을 느낀 듯하였다.

사랑이 고통이라는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왜 보기가 힘드냐고. 어디가 아팠느냐고. 혹시 도움 줄 일이 있을까 싶어 자꾸 캐물었다. 후배는 지금 가슴앓이를 하고 있단다. 분신 같은 아들 둘을 대학이라는 문으로 연달아 보내고 마음이 쓸쓸하단다. 처음 후배 곁을 떠날 때만 하여도 슬퍼보이던 아이들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잘 살고 있어 배신감마저 느꼈단다. 주말마다 집에 내려오던 아이들이 주말은커녕 방학이 되어도 후배 곁에 오지 않아 허탈하단다. 후배는 지나간 내 모습이었다. 내 아이들도 그랬었다. 아르바이트니 학원이니 집에 오지 않는 핑계는 정당하였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맹목적인 엄마의 사랑이 부담스러웠고 사랑으로 포장된 지나친 간섭이 싫었던 것이다.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 저희들이 먼저 떠나버리다니.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우울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하였던 날들이 너무 그리워 한참동안 앓았었다. 고통의 시간이었다. 후배는 사랑의 부작용 때문이라는 내 말에 껄껄 웃더니 언제 밥이나 같이 먹자고 한다. 혼자 겪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나.

여든을 훌쩍 넘긴 우리 엄마가 요즘 사랑을 시작하셨다. 춤에 빠져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구민회관으로 출근하신다. 춤바람 났다고 놀리면, 바람이 아니라 춤을 사랑하신다는 우리 엄마. 마지막 사랑의 대상으로 건강을 택한 현명한 우리 엄마. 그런 엄마가 너무 자랑스럽다. 사랑스럽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저절로 사랑의 영역은 점차 넓어져 갔다.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얼굴 붉히던 외골수의 사랑은 기억의 저편에 있다. 이제는 자식과 손자들에게 하루에도 수없이 사랑 한다 소리쳐 말하고 자연과 역사를 사랑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춤을 사랑한다는 엄마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친구와의 우정을 사랑이라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행복의 묘약인 사랑이 더욱 필요하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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