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고운 날에

2013.03.19 15:53:26

박선예

수필가

봄! 봄이다. 올 듯 말 듯 애를 태우더니 드디어 봄이 왔다. 집에 있기 아까운 날이다. 갑자기 냉이 생각이 났다. 아직 한 번도 캐 본 적이 없지만 냉이 캘 준비를 갖추고 달천강가로 나왔다. 햇살이 곱다. 정말 완연한 봄이다.

코끝에 와 닿는 바람이 한결 부드럽다. 봄볕도 사뭇 따뜻하다. 버드나무들은 겨우내 담아두었던 연두 빛을 금방 터트릴 기세이고 들판의 풀들도 앞 다투어 봄맞이를 하고 있다. 목련, 영산홍, 개나리들도 분주하다.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봄의 색깔을 모으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일까. 꽃눈이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혹시 꽃봉오리 끝이 열렸나싶어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목련은 목련대로 영산홍은 영산홍대로 제각각 다른 빛깔을 머금고 있다. 꽉 다문 꽃봉오리이지만 어떤 색깔의 꽃을 피워낼지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밭두렁에서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봄바람을 타고 내게 날아온 웃음소리에 봄 냄새가 가득하다. 여인들은 봄을 캐고 있었다. 망설일 필요조차 없었다. 냉이를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들판에 나오니 냉이와 비슷한 풀들이 너무 많아 헤매는 중이였으니 말이다. 재빨리 면장갑을 낀 다음 비닐 봉투와 칼을 들고 그녀들이 있는 밭두렁으로 향했다. 여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재잘거리다 웃고 웃다가 재잘거리며 냉이를 따라 자리를 옮겨가고 있었다.

"냉이 많이 캐셨네요. 같이 캐도 되지요?"

얼렁뚱땅 그녀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들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였다. 하지만 내가 냉이 캐기 초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아이고~ 아즘니, 나생이를 쑥 캐 듯 하믄 어쩐댜~. 나생이는 이렇게 뿌리꺼정 캐야 혀."

그중 가장 나이 많은 분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직접 시범을 보여주신다.

"너무 큰 것이나 검은 빛을 띤 것 그리고 마른 것은 캐지 마세요. 질겨서 맛이 덜하거든요. 그리고 캐면서 얼추 다듬으면 나중에 손질할 때 편해요."

곱상하게 생긴 새댁이 내 곁으로 바싹 다가앉더니 이것저것 신경을 써준다. 요령을 배우고 본격적으로 냉이를 캐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냉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나도 여인들과 하나 되어 봄을 캐는 아낙이 되어버렸다. 냉이의 향긋한 냄새가 손끝부터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간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친정할머니는 해마다 봄이 오면 꼭 냉이 국을 끓이셨다. 할머니는 우리 오남매에게 뜨끈뜨끈한 냉이 국을 국그릇 가득 담아주시며 이른 봄에 냉이 국을 먹으면 한 해 동안 눈병도 걸리지 않고 공부도 잘하고 또 추위도 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우리 오남매는 서로 질세라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였다.

"할머니, 노래도 잘해요?" "할머니, 싸움도 잘해요?" "냉이 국 먹으면 진짜 공부도 잘하고 달리기도 잘해요? 난 웅변도 잘하고 싶은데…", "나 이제 감기 안 걸리겠네요."

할머니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그려. 그려. 내 강아지들. 맛있게 잘 먹으면 뭐든지 잘하고말고."

우리 오남매에 있어 할머니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친정집의 냉이 국 맛이 바뀌었다. 오남매가 자라 식성이 변한 이유도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할머니의 손맛과 정성을 따를 수 없었다. 더구나 할머니의 밥상머리 격려와 추임도 사라졌으니, 과연 그 맛을 어느 누가 대신할 수 있으랴.

"뭔 생각을 그리 혀~. 고것 가지고 어디에 붙인댜. 난 홀몸이라 먹을 사람도 없어. 그냥 재미로 캤지. 자, 이 것 가지고 가."

누군가 불쑥 냉이 봉투를 손에 쥐어주었다. 나이가 가장 많으신 분이 빙그레 웃으며 내 눈을 바라보고 계셨다. 덥석 그분의 손을 잡았다. 그분에게서 친정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그리움이 출렁거렸다. 먹먹해오는 가슴을 어쩌지 못해 구불구불 밭두렁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봄 햇살이 사그라지자 바람이 제법 매섭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가슴에 한가득 안은 냉이 봉투에서 우리 할머니 냄새가 솔솔 새어 나오고 있다. 이 봄날, 냉이는 할머니이고 할머니는 영원한 나의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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