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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 망명중에도 고향땅 팔아 독립운동"

충대 사학과 김호진씨 규명
사업벌여 이익금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환 구상
그 일환 북경흥화은행설립·시베리아 차용 시도
죽향초 부근땅 이때 팔려…한때 옥천 최대거부

  • 웹출고시간2014.02.24 18:31:10
  • 최종수정2014.02.24 18:31:10

김규흥

옥천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규흥(金奎興·1872~1936)은 중국 망명생활 중에도 고향땅을 팔아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규흥(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3일의 KBS 스페셜에 '3.1운동의 숨겨진 대부 김규흥'으로 방영되는 등 근래들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독립 운동가의 한 명이다.

특히 배경한(신라대) 교수 등 학계에 의해 "공화제를 주창한 중국 신해혁명에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담했고, 이것이 중국 혁명파의 조선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립운동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김규흥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약한 편으로, 그가 지론으로 주장한 '둔전제적 독립운동'이 어떤 실천과정을 통해 전개됐는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왔다.

충북대 사학과 김호진 씨의 석사논문 '범재 김규흥의 민족운동과 독립군 양성계획'(지도교수 박걸순)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원납전을 1만냥이나 내는 등 구한말 옥천지역 최대 거부였다.

실제 고종실록 3년(1866) 10월 1일자 기사의 원납인 명단에는 그의 조부 '동교'(東敎)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의 충남 강경에 20칸 규모의 집을 소유했었고, 현 옥천 죽향초등학교 부지는 그의 목화밭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중국 망명 전에 진명학교에 보조금을 내고 또 현 옥천 죽향초등의 전신인 창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이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가운데 고종을 알현한 것이 적발돼 일경의 감시와 함께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자, 이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단신 망명했다.

그는 중국 신해혁명 동참 후 박용만과 함께 각종 사업을 벌여 그 이익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전환하는 '둔전제적 독립운동'을 구상, 이를 실천으로 옮기고자 했다.

1922년 북경흥화은행의 개점식 모습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김구, 8번째가 김규흥이다.

ⓒ 사진=옥천신문
그는 이 구상에 따라 1922년 '북경흥화실업은행'을 설립했고, 당시 이날 개점식에는 김구 선생도 참석했다. <사진>의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김구, 8번째가 김규흥이다.

그는 또 조선, 중국, 러시아와의 3국 합작을 통해 시베리아 지역을 차용하자고 주장했고 나중에는 내몽골도 이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러나 북경흥화실업은행은 목표액 10만엔의 1/10밖에 모금하지 못하는 등 가시밭길 시작이었다. 김규흥은 이때 고향 옥천에 손을 내밀어, 남은 전답을 팔아 중국으로 송금할 것을 부탁했다.

다음은 김규흥의 손자 한영(漢永·82·현 서울거주)옹이 논문저자 김호진씨와의 인터뷰중 답변한 내용이다.

"창명학교 전신인 죽향초등학교 앞에 아주 옥답이 있었어요. 그것을 계약하려고 전부 주선하였는데 삼촌되시는 분이 와가지고 중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무척 어려우니까 그 돈을 보내야겠다. 그래 가지고 그 돈을 요원을 통해 가지고,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요원을 통해 가지고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아버지께서는 보내주셨어요'-<논문 62쪽>

김옹은 당시 김규흥이 △국내 가족이 중국으로 건너올 수 없는가 △중국에서 그의 편지가 옥천으로 오면 일본경찰이 반드시 사전 검열했다는 내용도 이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김규흥은 결국 둔전제적 독립운동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1936년 중국 천진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된 후 국내로 운구돼 현재 대전 현충원에 영면해 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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