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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을 뒤흔든 현대사 사건·사고 - (2)흥덕사지 발굴

세계 最古금속활자본 ‘직지’ 인쇄사찰 빛보다

  • 웹출고시간2007.10.04 10:14:2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충북을 뒤흔든 사건.사고>(2)흥덕사지 발굴
선조들의 자취가 서린 문화유산의 중요성은 무엇일까. 바로 그 자리에, 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때 그 가치는 높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사라진다면 우리의 과거 또한 묻혀버릴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직지)을 간행한 청주 흥덕사지 발굴 과정을 알아본다. / 편집자 주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 인쇄 사찰
-우리나라 발굴사상 처음 금속탐지기 사용

청주엔 전날 밤부터 태풍의 영향으로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폭우가 몰아쳤다.
1985년 10월 8일 오전 10시께.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청주대학교 박물관의 흥덕사지(발굴당시는 연당리사지라 일컬음) 발굴조사 현장.
폭우로 적막했던 이곳에 구름이 걷히면서 한줄기 햇살이 내리쬤다.
발굴조사(계약기간)가 거의 끝나고 주변정리를 하던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당시 발굴조사원이었던 박상일 청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에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발굴현장에 홀로 남아 있던 박 실장은 폭우가 그치자 라면 한 그릇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현장에서 동남쪽으로 150m 가량 떨어진, 택지개발공사로 반출된 흙이 쌓여 있던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박 실장의 시선은 중장비에 찍혀 형편없이 찌그러진 세붙이에 멈췄다.
청동금구(靑銅禁口) 파편이다.
청동금구는 금고(金鼓) 또는 반자(飯子)라고도 하는, 절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 데 두드리는 청동으로 된 쇠북이다.
흙이 덕지덕지 붙은 이 금구 파편을 주워 근처 트럭 바퀴자국에 고인 흙탕물에 씻었다.
순간 그의 손은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손에 들고 있던 금구 파편 측면에 ‘甲寅五月 日 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란 암각 글자가 선명했다.
바로 이곳이 ‘직지’ 하권의 맨 끝장에 적힌 ‘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 鑄字印施’란 간기의 ‘흥덕사’였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세계기록유산인,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는 박 실장의 손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택지개발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 했던 우리 선조의 소중한 문화유적은 이렇게 후세에게 전해졌다.
청주대박물관 발굴조사단은 흥덕사를 발견한 지 나흘 후인 1985년 10월 12일 발굴현장에서 철수했고, 그날 문화공보부는 흥덕사지 전역을 보존할 것을 지시했다.
이 같은 흥덕사지 발견 사실이 10월 14일과 15일 전국 신문.방송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본으로 인쇄된 ‘직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직지’는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유네스코가 정한 ‘책의 해’를 기념하는 도서전시회에 출품됐다. 이때 재불 한국학자인 박병선(여) 박사에 의해 고려 우왕 3년(1377)에 인쇄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확인되면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13년만에 ‘직지’의 모태인 흥덕사가 발견된 것이다.
그 뒤 ‘흥덕사’명 금구편의 나머지 몸통 부분은 1986년 6월 2일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에 사는 조자성씨가 산책하다 절터 동남쪽 200m 지점에서 발견했고, 여기에서 파편 명문 나머지 글자인 ‘(改)造入重參拾貳斤印’이 판독됐다.
그러나 일부 지도위원이 원래 흥덕사에서 만든 금구를 이 사찰에서 가져다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기했고, 이에 충북도는 흥덕사지 주변지역 정밀조사를 다시 청주대박물관에 의뢰했다.
청주대박물관은 1986년 5월 우리나라 발굴사상 처음으로 금속탐지기를 이용한 2차 정밀조사를 벌여 철동불발(靑銅佛鉢)과 청동보당용두(靑銅寶幢龍頭) 등의 청동유물을 수습했다.
이 가운데 5월 17일 유물이 집중 발견된 84블록지역을 다시 조사해 청동불발 1점을 수습했는데, 이 불발 측면에서 ‘皇統十年庚午四月 日 興德寺…’란 40자의 암각 글자가 확인됐다.
마침내 이곳이 금속활자로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 터라는 사실이 확증됐다.
박상일 청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금속탐지기로 수습된 청동불발은 녹이 잔뜩 끼인 채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었는데, 도면작업을 위해 자로 길이를 재는 도중에 어렴풋이 글자가 보였다”며 “백열전구로 비추며 살펴보니 ‘흥덕사’란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당시 새벽 2~3시까지 청동불발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하느라 눈이 밤톨처럼 부어 오른 것도 늦게서야 알았다.
흥덕사지 발굴 동기는 극적였다.
청주대박물관은 흥덕사지 발굴 전인 1984년 11~12월 흥덕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운천동사지 발굴에 나섰다.
그러던 중 박 실장은 주민 김정구(청주시 흥덕구 사직동)씨로부터 운천동 택지조성지구인 옛 연당리에 절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11월 29일 그 일대를 조사했다. 박 실장은 거기서 주춧돌과 치미편, 기와편 등을 확인했고, 청주대박물관은 발굴 필요성을 충북도에 건의했다.
이듬해 3월 주민 조희영(사직동)씨가 택지지구에서 청동금구 1점을 주워 당국에 신고하면서 충북도 문화재위원회는 문화재관리국의 발굴허가를 받아 청주대박물관에 발굴을 의뢰했다. / 기획취재팀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인터뷰>박상일 청주대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지난 1일 청주대박물관에서 만난 박 실장은 “흥덕사지를 발굴한 지도 벌써 22년이 지났다”며 감회에 젖었다.
박 실장은 “그동안 많은 유적을 발굴했지만 나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유적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흥덕사지 발굴”이라고 말했다.
박 실장은 “흥덕사지는 ‘직지’를 탄생시킨 모태이고 귀중한 문화유적”이라며 “요즘엔 ‘직지’에만 관심을 갖고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있을 흥덕사지에 대해선 무관심해 보인다”고 의미있는 한마디를 건넸다.
이어 박 실장은 “흥덕사지 주변지역을 ‘직지특구’로 개발한다고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흥덕사특구’라 해야 옳지 않을까 한다”며 독일에서 구텐베르크를 금속활자 인쇄물보다 부각시키는 것을 예로 들었다.
흥덕사지 발굴 전 운천동사지 발굴 당시 기자와 박물관에서 숙식을 함께 했던 박 실장은 곧잘 전날 밤에 꾼 꿈이 다음날 발굴에서 그대로 들어맞는 예지력을 가졌다. 일에 대한 집념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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