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1748년(영조 24)은 무신란(1728)이 일어난지 꼭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3월 임인(18일) 한양도성에서 의문의 투서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보초를 서고 있는 졸(卒)을 부른 후 괘서 하나를 던져 넣고 몇마디 지껄인 후 달아났다. "초혼(初昏)에 어떤 사람이 궐문 밖에서 흥원문(興元門)의 수졸(守卒)을 부르면서 문틈으로 하나의 봉서를 던져 넣고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이선전(李宣傳)에게 전하라." 했는데, 선전관 이택(李澤)이 과연 바야흐로 입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뜯어 보니 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여…." 인용문에 등장하는 '이선전'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씨 성을 가진 선전'이라는 뜻이다. 선전관의 준말인 선전은 왕을 호위하고 전령을 전달하며 나아가 병졸의 진퇴를 명령하는 무직(武職) 관료로, 정3품의 당상관이었다. 괘서를 엉겁결에 건네받은 수졸이 이 과정에서 긴급체포되었고, 그 이유는 인용문 내용이 매우 요망하고 황당하기 때문이었다. 실록은 이같은 괘서의 경우 그 확산을 우려해 관련 내용을 일체 기술하지 않는 관례를 지니고 있다. 영조는 수졸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범인을 뒤쫓게 하고 당시 좌의정 조현명(趙顯命·1
[충북일보] 보은 이제동(李濟東) 역모사건에는 느닷없이 신필대(申必大)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제동 역모에 가담한 보은 사람 이흥득이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이귀흥이라는 자에게서 들은 얘기라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귀흥이 말하기를, '우리의 무리들이 황간(黃澗)·영동(永同)·청주(淸州)·문의(文義) 등지에 있는데, 청주(淸州)의 신필대(申必大) 같은 이도 여기에 들었다. 네가 우리의 수효가 적은 것을 보고 업신여기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인용문에서 보듯 신필대는 보은이 아닌 청주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1728년 무신란 끝난지 5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영조 정권을 타도하려 한 것은 역시 가슴에 맺힌 한 때문이었다. 그는 무신란 청주지역 2인자였던 신천영(申天永)의 가까운 혈족이었다. 당색이 남인이었던 신천영은 신숙주의 후손으로 무신란 당시 이인좌로부터 병사(兵使)에 임명되었다. 이는 오늘로 치면 광역단체의 군사업무르르 총괄하는 직책으로, 지역사령관에 해당한다. 신필대는 1728년 무신란 당시 신천영을 따라 난에 가담하였다. 신천영을 그를 직접 영입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체포된 후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뒤에 신필대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1728년 무신난은 보은현감 조문보를 처형하고 공신을 선정하면서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난을 진압하고 죄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반란 가담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금의 충북, 경북, 전북 등의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충북의 경우도 편차가 있어 청주, 충주, 괴산, 진천, 보은, 영동, 황간 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그러나 이때 발생한 희생자들의 가족 한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응어리가 되어 고스란히 침전되어 있었다. 무신란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 17333년(영조 9) 보은에서 장곡서원(獐谷書院) 사건이 발생했다. 장곡이 어디인지 불분명하나 현재 내북면에는 노루실이 있다. 보은사람 이공형, 이인관, 이귀흥, 이제동, 김두병, 구준좌, 구이후 등 10명은 흉년이 들자 장곡서원에 모여 강도질을 모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공형이 정보가 새 나갈을 것을 우려하여 아우 귀흥을 살해하였다. 이때 마침 김두병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었고,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역모가 있었음을 드러났다. 다음은 김두병의 원사(爰辭), 즉 심문 과정의 진술 내용이다. "이귀흥과 이인관의 무리가 장곡서원에 모여 모의했는데, 도목 가운데에다 성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은 참가 지역과 참여 인원이 방대하였던 만큼 그 희생도 엄청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해프닝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인좌가 안성·죽산 전투에서 오명항(吳命恒·1673-1728)이 이끄는 정부군에 대패하였지만 경상도 지역의 반군세력은 계속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군보다 먼저 이인좌의 패배 사실을 경상도 지역에 알린 알린 인물이 당시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이었다. 전투가 일어났을 때 이같은 정보는 피아간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오명항이 영조에게 그를 특별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은 안성의 역적들이 무너진 뒤 즉시 영남에 이문(移文)했는데, 영남의 역적이 패몰한 뒤 그 이문이 안음(安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규획이 진실로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한달 후 졸지에 옥천군수에서 청주목사로 벼락 출세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인좌 반란군이 몰려오자 자기집으로 도망갔다고 체포된 인물도 있었다. 바로 당시 율봉찰방 이제겸(李濟謙)이었다. 그의 이같은 행동으로 인해 율봉역에 있었던 말과 역노들이 고스란히 이인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율봉찰방 이제겸(李
1728년(영조 4) 무신란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조문보(趙文普)가 있다. 그는 노비, 상인 등 하층민이 아닌 보은현감이라는 고위 관료이면서도 무신란에 참여했다. 게다가 그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적인 사표였던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직손이었다. 그는 무신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이른바 홍성룡 옥사에 연루되어 옥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조는 칼을 풀어주도록 하는 등 특별히 배려했다. '임금이 묻기를, "조문보는 누구의 집 자손인가"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선정신 문정공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특별히 칼[枷]을 풀어 주도록 하여, 내가 현자(賢者)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칼은 전통시대 죄인에게 씌우던 형틀의 일종으로. 두껍고 긴 널빤지의 한끝에 구멍을 뚫어 죄인의 목을 끼우고 비녀장을 질렀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 옥중에서 쓰고 있던 형틀도 칼이었다. 이처럼 영조가 죄인을 각별하게 대우한 것은 그가 조광조의 직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통을 지닌 조문보가 무신년 역모에 가담한 것은 민원보와 관련이 있다. 민원보(閔元普)는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조총, 환도, 철편 등
1728년 무신란에 가담한 인물로는 김덕삼(金德三)이 있다. 무신란은 정치적으로는 소론+남인이 주도하고, 사회적으로는 노비+상인 등 당시 소외 계층이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괴산에 살던 김덕삼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부호(富戶)였다. 체포된 그는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다 수사관이 낙형(烙刑)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두 차례 형신하고 낙형(烙刑)으로 위협을 베푸니, 김덕삼이 공초하기를,(…) '여기에서 마흔 냥이나 쉰 냥쯤의 돈을 장만하여 주면 일이 이루어진 뒤에 보답을 잘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후 내용을 보면 인용문은 반란에 가담한 어떤 인물이 김덕삼에게 "40~50냥을 꿔주면 사건이 끝난 후 갚겠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50냥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백50만원 정도가 된다. TV 역사 프로그램이 자주 나오는 신병주(건국대) 교수의 이론에 의하면 조선시대 양(兩)-전(錢)-푼(分)의 현재 환율은 각각 7만-7천-7백원 정도가 된다. 따라서 이 공식대로 하면 50냥x7만원=35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김덕삼이 실제 돈을 꿔줬는지는 《영조실록》 등 문헌으로는 최종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장지(
무신란이 발생한지 25일 가량이 지난 1728년 4월 10일. 지금의 괴산송면 집에서 청주로 끌려온 이인좌의 젊은 아내 윤자정(尹紫貞)이 교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4명의 어린 아들을 둔 채 반군 지도자의 아내라는 죄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인자와 이웅좌가 모두 적괴이니 그 아우 이기좌를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이인좌의 아내는 박필현의 아내의 예에 의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그 아이는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았으니,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종이 되게 하라."- 같은 날 당시 진짜 진천현감이었던 임상극(林象極·?-?)은 효시되었다. 처형 장소는 명확하지 않으나 정황상 한양으로 끌려간 후 군기시 앞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어떤 죄 때문에 효시됐는지 사료에는 죄명이 기록돼 있지 않으나 영조실록에 그 죄목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군데 보이고 있다. "임상극(林象極)의 경우 연호(감號)에 쓴 대원수(大元帥) 관문이라고 한 것은 역률을 쓰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으나…."- "역적의 관문(關文)을 봉행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달려간 죄는 청안·진천·회인 세 고을이 처음에 다름이 없습니다."- 두 인용문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단어는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과 관련된 것으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이라는 문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문헌은 이진동(李鎭東)이라는 경상도 안동 유생이 무신란이 일어난지 60년이 지난 시점에 작성했고, 그 목적은 무신년에 창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에서 누락된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60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실제 그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정조는 그의 의견을 수용했다. 다음은 이진동이 상언하는 내용이다. 상언과 상소는 형식이 비슷하나 전자는 평민, 후자는 관료가 한다는 점이 다르다. "지난 무신년에 역적 정희량이 영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남 인사들은 죽고 싶도록 부끄러워하고 분해하면서 편지로 서로 깨우치고 격문으로 고하여 집집마다 창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 그런 사람들을 찾던 때에 전부가 누락되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책자로 안동 등 13고을의 창의한 사적을 하나하나 서술해서 아룁니다."- 이 날짜 정조실록에는 무신란이 일어났을 당시에 김중헌(金重憲)이라는 영남인이 우연히 우리고장 청주 객점(주막)에 묵었다가 반란군 지도자를 살해하려다 되레 죽음을 당하였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적이 중헌에게 오형(五刑)을 다 시행하였
[충북일보] 1728년 3월 24일. 청안지역 의병들은 이날 먼동이 터올 무렵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이끌던 무신년 반란군 무리를 완전히 토벌하였다. 그리고 청안현청에서 정중익의 목을 지체없이 베었다. '내가 두 조카와 서종(庶從) 인심에게 말하기를 "종익을 비록 베었더라도 남은 역적이 아직도 많다. 너희들과 더불어 찾아내어 형이 원수를 갚으려 한다"라고 했다.'- 잔당에 대한 의병진의 소탕작전도 그 즉시 진행되어 일부는 즉결처분하고 더러는 옥에 가두었다. 여기에는 힘이 좋고 활을 잘 쏘았던 임필현(林必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께 수색하니 즉 필현이 간청의 장을 보관하는 창고 가운데 숨어 있는데 먼저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범하지 못하자, 내가 몸소 앞으로 나가 필현을 끌어내어 머리를 검으로 쳤다.'- 임필현은 "그대들이 시국이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계책이 망령되어 내놓은 것은 오래지 않아 그 머리와 목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의병들의 설득을 거부하고 말머리를 돌려 정중익에게 돌아갔던 인물이다. 충청도의 작은 고을 청안현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사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짜 청안현감
[충북일보] 정황상 의병들의 반격은 1차 전투에서 패한 그날 야간에 준비를 해 다음날 새벽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1728년 3월 23일과 24일 사이다. 장담의 조카 경수(景洙)는 순직한 삼촌을 대신해 청안읍치 인근 마을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장담의 조카 경수로 하여금 연명겸의 집으로 가게하여 사청리(射廳里)와 상용문리(上龍門里), 용문리(龍門里)와 내외룡동(內回龍洞), 외회룡동(外回龍洞)에서 고르게 선발하게 하고 출신(出身)인 閔道昌과 더불어 거느리고 오게 했다.'- 전통용어 '출신'은 과거에 합격을 했으나 아직 임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이후 경수는 매박리(梅朴里)로 가서 종질인 장태화(張太和), 조강동(釣江洞)으로 가서 권대열(權大悅)을 규합하는 등 60여명의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 인용문에 등장한 마을이름(里)은 '1872년 청안현지도'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 청안현에는 읍내면, 북면, 남면, 동면, 서면, 근서면 등 6개 면이 존재했다. 이중 사청리는 근서면, 매박리, 회용동, 조강동 등은 읍내면에 위치했다. 근서면은 지금의 증평일대, 읍내면은 청안면 읍내리에 해당하고 있다. 의병들은 청안현청 가까이 접근해 북…
1728년 3월 23일. 장담((張潭·?-1728)이 이끄는 청안현 의병들은 무신란 반군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반란군은 청안현청에 주둔하고 있었고, 무리는 가짜현감 정중익(鄭重益)이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 서기를 자처했던 장담은 제일 먼저 청안현의 옥(獄)을 공격했다. '우리형이 먼저 달려가 옥에 이르러 옥문을 부수고 重益에게 잡혀간 한시익을 급히 구출했으나, 이로 인하여 적과 더불어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었으며, 강약이 매우 달랐다.'-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라는 표현에서 보듯 의병과 반군들은 육박전을 하듯 직접 격돌했다. 그러나 전세는 숫자가 적은 의병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의병은 중과부적의 상태에 놓였다. 중과부적은 '적은 사람으로는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위지〉(魏志) 에 나오는 표현이다. 전국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을 역설하던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결국 이날 전투에서 의병장 장담은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반
[충북일보] "그대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짜 청안현감 鄭重益의 반군에 가담한 임필현(林必玄)이 한 이 말은 당시 기층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말이었다. 토역일기 상으로 확인되는 반군 인물은 명현(命賢), 석창(碩昌), 몽엽(夢燁), 금립(今立), 시세(時世), 시만(時萬), 세강(世强), 반리(伴里), 임필현, 신평(信平), 차동(次同), 흥석(興石), 귀현(貴玄), 비억(非億), 명이(命伊), 성좌(性佐), 명이(明伊), 막남(莫男) 등 모두 18명이다. 이중 시세, 시강은 형제간이나 가까운 혈족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차동, 흥석, 귀현 등은 당시 청안현의 관노였다. 나머지는 신분을 알 수 없으나 느낌상 막동, 몽엽 등도 관노로 보여지고 있다. 각사등록, 영조무신별등록 등 1728년 무신란을 기록한 다른 기록에는 雄伊, 京元 등의 관노 이름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무신년 반군에 가담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층민으로 '부역을 제외시켜주고 부역을 삭감시켜준다'는 꾀임에 빠져 참여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난역의 일로 말하면 군사를 모으는 적장이 반드시 신역을 면제하거나 신역을 줄여 준다고 말하므로
이인좌가 파견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청안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현감의 인부(印符)를 빼앗는 것이었다. 인부는 관인(官印)과 병부(兵符)의 준 말로, 임금의 신임장과 동일시 됐다. 관인은 말 그대로 관에서 찍는 도장을 의미하나, 병부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관이 군대를 움직일 때면 임금의 교서와 함께 반드시 부절(符節)의 일종인 병부를 맞춰봤다. 부절은 대나무나 옥 따위로 만든 신표로 하나는 조정에 두고 나머지 하나는 지방관에게 주어, 군대의 움직임이 있을 경우 두 조각을 맞춰봤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병부제를 운영한 것은 군대가 반란군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5.16 등 근현대의 모든 쿠데타는 군대가 국가권력의 통제권을 벗어나면서 성공했다. 1728년 3월 19일.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인부를 빼앗기 위해 부하 금립(今立), 시세(時世) 등을 진짜 청안현감 이정열(李廷說·?-1728)이 숨어있는 곳으로 보냈다. '19일 사렴이 今立, 時世 등이 고을 원이 印符를 탈취하기 위해, 시각을 정해서 보냈다. 두 역적이 고을 원이 피해서 숨을있는 곳에 가까이 도착하여 검을 빼들고 곧다로 들어가서
[충북일보] 무신란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은 실록에 칼을 잘 다뤘던 인물로 표현돼 있다. 다음은 이인좌가 경기도 죽산전투에서 관군에 사로잡힌 후 진술한 내용의 일부이다. '모의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자객이 될 만한 자는 목함경과 정중복·정중익 등 형제이며….'- 청주읍성이 이인좌의 반란군에 점령당할 당시 진짜 청안현감으로 있던 인물은 이정열(李廷說·?-1728)이었다. 그는 반란군이 진격해 오자 관청을 버리고 도주하여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때가 청주읍성이 반란군 수중에 들어간지 이틀 후인 3월 17일로, 원문은 이렇게 적혀 있다. 聚會軍卒 太半不至: 군졸을 불러 모았으나 태반이 오지 않았다. 勢難守成 姑避其禍: (이정열은) 성(관청)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잠시 동안 그 화를 피하고자 했다. 仍卽棄官而走 鼠伏山谷: 인하여 관청을 버리고 달아나 산곡에 깃들어 납작 숨었다. 官屬無一人從之者: 관 벼슬아치 중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 마디로 청안현 읍치는 무주공산으로 변했고, 이런 가운데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이 3월 18일 부임했다. '18일 오시에
[충북일보] 이인좌는 1728년 청주읍성을 점령한 직후 곧바로 휘하의 부하들 중 일부를 주변 고을의 수령으로 파견했다. 훗날 영조 정부에 의해 '위칭', 즉 '가짜 현감'으로 표현된 이들은 이인좌의 격문을 휴대하고 충주, 진천, 목천, 회인, 황간, 보은, 음성 등으로 향했다. 이중 충주만 당시 목사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저항으로 인해 온전함을 보존할 수 있었고, 대부분 지역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이인좌는 청안현감으로 정중익(鄭重益)이라는 인물을 파견했다. 그러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현지에 머문 기간도 열흘이 채 안 되었다. 목사 김재로가 충주에서 저항했다면, 청안에서는 자체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서 지켜야 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유교적 忠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때 의병 참가자의 한 사람이 반란군 토벌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討逆日記》(토역일기)를 남겼고, 그 일기 내용이 지난 1997년 이상주(현 중원대 교수) 박사에 의해 일반에 공개됐다. 일기는 당시 청안에 거주하던 장담(張譚·?-1728)이라는 선비가 정중익 반란군에 맞서 아우 헌과 함
[충북일보] 민원보(閔元普), 민덕효(閔德孝), 민백효(閔百孝), 민복효(閔復孝), 민득효(閔得孝), 민관효(閔觀孝), 민성효(閔性孝), 민경효(閔景孝). 1728년 무신란에는 충주목의 남인계열 사족들이 다수 참여했고 이들 중에는 여흥민씨와 그 인척들이 유독 많았다. '김덕유는 충추 사람으로 민암의 사위이고 한세홍의 내구(內舅) 이다. 처음에 민백효에 의해 인좌(引坐)되었으므로 체포해 추문하다가 곧 작처(酌處)했던 것인데, '김덕유가 법망에서 빠져나갔다.'고 충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으므로….'- 이런 여흥민씨 중에는 '효'자 돌림이 다수를 차지했다. 다음 인용문은 그중 민원보의 항렬이 높고, '효'자 돌림은 그 아래임을 보여준다. "충주목에서 보고하여 온 바에 의하면, 역적 민원보의 아들 민복효·민득효는 연좌시켜 교형에 처하였고 어미 이녀(李女)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율문에 '부인의 나이 60세이거나 폐질(廢疾)을 앓는 사람은 논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민원보는 무신란 충주지역 주모자로, 연좌제에 의해 두 아들이 교형에 처해졌고 다만 어미만 고령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했다. 《영조실록》에 민원보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충주지역 인물은…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충북지역 현감들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국록을 먹고 있는 관료의 입장에서 반군을 적극적으로 진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함은 물론 일부는 반군에 협조했다. 당시 회인현감 김도응, 황간현감 이정휘, 진천현감 임상극, 청안현감 이정열, 보은현감 조문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당연히 영조는 이들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따라서 '失臣節也'(신하의 절조를 잃었다)라며 처형을 명령했다. '군문에서 회인의 전 현감 김도응(金道應)과 황간의 전 현감 이정휘(李挺徽)를 효시케 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적의 관문(關文)을 도부(到付)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용문 중 '도부'는 관찰사가 수령의 보고에 대하여 답하는 공문을 말한다. 따라서 '도적의 관문을 도부하였다'라는 인용문의 표현은 반란군의 수괴 이인좌가 내려보낸 공문을 김도응, 이정휘 등 당시 두 고을 현감들이 접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이인좌 반란군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영조는 '失臣節也'라는 말로 이 부분을 문제삼았다. 《영조실록》에는 충주지역 반란 인물로 전회에 소개한 민원보…
[충북일보] 환국(換局)은 정권이 급작스럽게 교체되는 국면을 의미한다. 조선 숙종대에 이같은 환국이 경신, 기사, 갑신년에 3차례 일어났고, 그때마다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주고 받았다. 숙종은 경신환국으로 남인, 기사환국으로는 서인, 그리고 갑술환국으로는 다시 남인을 몰아냈다. 결국 서인이 최종 승자가 됐고, 서인은 그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됐다. 환국의 소용돌이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기사환국(1689)으로 전라도 정읍에서 먼저 사약을 받았지만 남인의 영수 민암(閔墨+音·1636-1693) 역시 갑술환국(1694)으로 유배지 제주도에서 사사됐다. 민암의 동생이 민희(閔熙·1614-1687)이고, 그 또한 형과 같은 남인의 당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환국의 소용돌이 과정에서 남해안의 궁벽한 곳으로 유배돼 끝내 그곳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멀리 귀양간 죄인 민희가 순천의 배소에서 죽었다. 민희는 탐오하고 방탕하며 용렬하고 고루하므로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나이가 74세이었다.'- 1728년 일어난 무신란과 관련해 청주지역만 많이 부각돼 있으나 우리고장 충주지역의 호응도 무척 강했고, 이를 이끈 인물이 민희의 손자인 민원
[충북일보] 경종의 급서하고 그의 배다른 동생인 영조가 즉위하자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이들 대부분은 영조에 호감을 갖지 않은 세력인 소론과 남인계열의 당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중에는 권서봉(權瑞鳳·?-1728)이라는 인물로 있었고, 그는 이 상소로 인해 유배를 가야 했다. '임금이 오두석과 이삼령 등의 상소를 읽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흉악하고 참혹하다. 저 무리들의 흉악한 상소가 어찌 모두 자기 마음에서 나왔겠는가. 국문할 필요가 없다. 이덕배·오두석·이삼령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이덕표·권서봉(權瑞鳳)·최선·정전·이가운은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권서봉의 유배생활을 그리 길지 않아, 무신란 1년 전인 영조 3년(1727)에 해배됐다. '을사년 이후 이명의는 북변으로 귀양가 있었고 권서봉도 또한 근읍(近邑)으로 귀양가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에 이르러 이명의는 호남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권서봉도 잇따라 방한(放還)되었다.'- 인용문 중 '근읍'은 말 그대로 가까운 읍, 그리고 '방한'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권서봉은 마음의 칼을 갈고 있었고, 이인좌가 이를 놓칠리가 없었다. 이인좌는 사람을
[충북일보] 병마절도사는 조선시대 각도의 최고 무관, 즉 오늘날로 치면 방위사령관으로 종2품의 품관을 지녔다. 우후(虞侯)는 병마절도사를 보필하는 직으로 달리 아장(亞將), 부장(副將)으로 불렸고, 종3품의 품관을 지녔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직손인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었고, 바로 밑의 우후는 박종원(朴宗元?-1728)으로 상당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급습하던 그날(3월 15일), 병마절도사(혹은 兵使) 이봉상은 질펀한 술자리를 가졌다. 후대의 표현이지만 다산 정약용은 '서원에서 슬픔에 잠겨'[悲西原]라는 한시에서 이렇게 감회를 읊었다. '도적떼는 못가에서 칼날 갈고 있을 때(群盜池邊礪鋒刃) / 원수의 감영에는 풍류 소리 요란하다(元師營中鬧絲竹) / 곤드레 술에 취해 고운 기생 옆에 끼고(紅酒··挾素妓) / 아문에 칼날 미쳐도 나른하여 못 일어나(劍及牙門·不起)'- 그러나 어찌됐건 병사 이봉상은 '국가'라는 제단에 피를 흘림으로서, 지금은 청주시 모충동의 표충사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반면 당시 우후였던 박종원은 처음부터 무장답지 않은 길로 나갔다. 그는 이인좌 반란군이…
[충북일보] 영조태실 터(청주시 낭성면 무성리)의 소유권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로 지난 1930년대 민간인에게 이전됐다는 설을 제기한 사람은 현재 고인쇄박물관이 근무하고 있는 이규상 씨다. 그는 지난 2005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한국의 태실≫(청원군·청원문화원 간)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책 민담편에 의하면 영조 태실터는 청원 부강의 한 부호에 의해 매입됐고, 그는 일대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김학현이었다. 그는 연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친의 묘자리를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대대손손 후광을 얻는다는 속신을 믿고 영조 태실터를 매입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상여가 들어오던 날 힘을 합쳐 저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김학현은 건장한 남자 50명을 상여꾼으로 사서 무성리 마을로 돌아왔고, 결국 영조 태실터가 있는 태봉산 정상에 일반인 묘가 들어서게 됐다. 이후 김학현은 마을 주민들이 조부모 묘를 파묘할 것을 걱정, 성모재(誠慕齋)라는 건물을 건립했다. 재실은 평지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재실 용도를 겸한 성모재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의도
[충북일보] 조선 조정은 왕실이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도감과 의궤청 등 2개의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도감은 행사를 총괄 집행하고 의궤청은 말 그대로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는 후세를 위해 행사의 전말과 경과, 소요된 재용과 인원, 의식절차와 행사 후의 논상(論賞)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을 일컫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궤는 어람용, 의정부, 예조, 사고(史庫) 보관용 등 5~9부가 제작됐다. 영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 만든 의궤도 존재하고 있고, 현재의 명칭은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이다. 이 의궤는 우연찮게 발견됐다. 충북도 문화재계와 청원군청은 지난 1981년 영조 태봉과 관련된 석부재가 일제 감정기에 파괴된 채 산 아래 계곡에서 나뒹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때 당시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태봉마을 이장인 이상린씨가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라며 다락에 있던 고전적을 보여줬다. 영조태실 의궤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봤다. 의궤에 의하면 △가봉에 사용된 석부재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현암에서 채석됐고 △공사는 1729년(영조 5) 9월 12일에 시작해 그해 10월 15일에 종료됐다. 그리고 이때 충청도관찰사는 도내 각 군현에 인력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그 태를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하였다. 그리고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후 항아리를 다시 큰 항아리에 담았다. 이어 태실 장소가 정해지면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게 했다. 이렇듯 조선왕실은 왕자의 태를 무척 소중하게 여겼고, 그것은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가 모두 태에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자 않을 수가 없다. (…)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九經에 정통하며, 단상(團爽)하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징되는 것이다." 인용문 중 '구경'은 주역, 시전, 서전, 예기, 춘추, 효경, 논어, 맹자, 주례 등 9가지 경전, '단상'은 얼굴이 시원스럽게 생긴 것을 말한다. 왕실이 왕자의 태를 반드시 명당 자리에 묻으려 한 것은 무병장수 기원 외에 명당을 선점,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 태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르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충북에는 경종 태실(충주시 엄정면), 영조 태실(청주시 낭성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 영장(營將)이었던 남연년(南延年·1653~1728)은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천복동(天卜洞)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인근에는 초록바위, 맹골, 곰 이야기 등 구전이 많이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노래기 중말 동쪽에 있는 초록바위는 남연년이 어릴적에 무예를 닦던 곳이다. 또 남연년이 부친을 여의고 맹골 묘에서 아우 남극년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매일 범이 찾아와 벗이 돼 주었다. 이밖에 남연년이 황해도 병마우후로 있을 때 곰(熊)이 고향 마을에 들어와 사람을 해쳤다. 그러자 그가 단기(單騎)로 고향으로 돌아와 곰을 화살로 잡아 그 가죽으로 상자를 만들었다는 구전이 존재하고 있다. 남년연에 대한 이같은 구전은 영조대의 현양사업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일부는 사료에 바탕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원행(金元行·1702-1772)이 있고, 그의 문집으로 《미호집》(渼湖集)이 존재한다. 그는 《미호집》 제 20권에서 남연년에 대해 △'부모를 섬길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났다' △'곰을 퇴치한 일로 군영의 장졸들이 공의 용맹함에 감복하였다' △'공이 적들에게 사로잡혀 '관덕당'(觀德堂)으로…
[충북일보]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가들이 "만약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자주 한다. 그가 재위 24년 동안 보여준 개혁과 대통합 그리고 민본(民本) 정치는 분명히 봉건왕조 조선을 구원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정조의 민본정신은 그가 생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백성을 '만천'(萬川)에 비유하고, 자신은 그 위에서 만천을 비추는 명월(明月)로 생각했다. 이처럼 정조는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지고지순한 왕정을 추구했다. 정조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회만 생기면 궁궐 밖으로 행차를 했다. 1백회 이상을 기록한 그의 행차는 백성들의 민원을 집적 현장에서 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했던 호문(好文) 군주답게 《홍재전서》( 弘齋全書)라는 시문집을 184권 100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남겼고, 제 19~25권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제문이 실려 있다. 이중 제 21권에는 1728년 무신란 때 청주읍성에서 희생된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 등을 추모하는 글인 '삼충사 치제문'이 들어 있다. 먼저 이봉상에…
[충북일보]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문화제조창을 비롯해 청주 곳곳에서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시간 보내기 좋은 '꿀잼' 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대표이사 변광섭)에 따르면 어린이날 연휴인 4~5일에는 문화제조창 본관과 동부창고에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할 예정이다. 주말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동부창고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신나는 어린이날 행사'가 펼쳐진다. 동부창고 6동에서는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 △여유 만만 창고 피크닉 △흥미로운 예술시간 △피아노 공연 등이 열린다.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는 병뚜껑 알까기, 자투리 목재 미니운동회 등 온몸으로 뛰놀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체험 활동이다. '흥미로운 예술시간'을 통해서는 17종의 예술체험 프로그램(유료)을 즐길 수 있다. 이날 동부창고 카페C는 유료 예술체험 프로그램을 즐기고 음료를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굿즈 뽑기 이벤트'를 연다. 문화제조창 본관 청주시한국공예관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공예관은 5일 오전 10시,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 오송에 바이오의약품 소부장 특화단지와 첨단재생바이오 글로벌 혁신특구 유치에 성공한 충북도가 바이오 특화단지와 K-바이오 스퀘어 조성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오송을 바이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바이오 특화단지는 올해 상반기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예타 면제는 이때까지 실현시킨다는 목표를 잡았다. 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던졌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신규 산단 조성 시 국가산업단지로 신속 지정 검토, 생산시설 신·증설 때 산업단지의 용적률 최대 1.4배 상향 등을 지원 받는다. 정부 연구개발(R&D) 우선 반영, 입주 기관에 대한 국·공유 재산 사용료와 대부료 감면, 예타조사 특례 적용 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바이오산업 육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유치전은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을 비롯한 11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인천과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며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신청했다. 도는 지난달 30일 서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