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동에 위치한 청주향교는 이른바 5성, 송조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를,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하고 이같이 밝혔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우서(虞書·요순시대 지칭)의 12목(牧) 제도를 본받아 지방관들을 설치하였노니, 주나라의 국운이 8백년간 계속 된 것처럼 우리나라의 국운이 장구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때 청주, 충주 등 전국 12목에 향교도 함께 설치되면서 중앙에서 경학박사가 파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전회에 세종대왕이 1444년 청주 초수리로 거둥했을 때 통감훈의·성리군서·근사록·통감강목·유문(柳文)·한문(韓文)·통감절요·집성소학·사륜집 등 9권의 책을 하사했다고 밝혔다. 이들 책은 역사물이 가장 많고 나머지는 유교적인 내용이다. 통감훈의는…
누군가가 직지를 만든 고려 금속활자가 중세 정보화 혁명을 불러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객관적으로 검증된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독일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 인쇄술은 기술력뿐만 아니라, 활자를 이루는 문자 자체가 자모음의 분리가 가능한 소리문자이기 때문에 대량 인쇄가 가능했다. 구텐베르크는 이를 바탕으로 라틴어로 쓰여진 성경을 출판,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려, 조선 등 우리나라의 전통시대 식자층이 사용하던 문자는 자모음의 분리가 불가능한 한자였기 때문에 조합되지 못하면서, 원천적으로 대량 인쇄는 불가능했다. 가령 어떤 책에서 1만개의 한자 활자가 필요하다면 그에 버금가는 활자를 일일히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같은 동북아시아 문자환경 때문에 역사의 발전이 이뤄졌다는 조선 중기에도 책은 여전히 매우 귀한 존재였다. 중종은 책이 워낙 귀하자 책을 관가로 가져온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이를 베껴(필사) 보관하도록 명령한다. "우리 나라가 작기는 하지만 옛사람이 전해준 서책이 없지 않을 것이다. 관청에 소장된 서책 이외에 서책을 납입하는 자에게는 상을 후히 주게 하고, 만약 하나뿐인 책은 관에서 필사한 다음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게 하라. 이렇게…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3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째 추천석 설화다. 충청도 진천에는 양순한 추천석이, 반면 경기도 용인에는 심술많은 동명이인의 추천석이 살았다. 이에 염라대왕이 심술많은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오라고 명령했으나 사자는 엉뚱하게 진천의 추천석을 잡아왔다. 따라서 생환시키려 했으나 진천의 추천석은 이미 장례를 치른 뒤였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용인의 추천석을 잡아와 진천 추천석의 혼을 넣어 환생시킨 후 용인에서 살게 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설화다. 두번째는 개가한 여인에 대한 설화다. 이 여인은 개가 전에는 진천에 살았으나 남편과 사별하자 용인에 살면서 역시 아들을 낳았다. 이후 양쪽이 서로 모실려고 하자 관가에서 "어머니 생전에는 진천에서 모시고, 죽은 후에는 용인에서 제사로 모셔라"라고 판결했다. 세번쩨 설은 진천과 용인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됐다. 진천은 예로부터 미질(米質)이 좋기로 유명하다. 반면 용인은 산세가 순후에 풍수적으로 명당이 많다고 소문나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묘소도 용인에 위치한다. 그래서 생겨난 표현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것
'자유한인보' 제 7호에는 충북을 주소로 두고 있는 포로 수용자들이 정확히 63명 등장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당시 청주군이 31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영동 11명, 옥천 6명, 제천·보은 각 4명, 괴산군 3명 등의 순이다. 이중 오창면 주소자가 무려 12명이나 되는 점은 향후 학계가 연구해볼 대목이다. 도내 출신을 포함한 당시 3천명의 조선인 징병자들은 주로 남양군도(南洋群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남양군도는 마샬, 마리아나, 캐롤라인, 길버트, 뉴기니아 등 태평양 적도 부근에 있는 여러 개의 섬을 일컫는다. 1940년대 미국과 일본간에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필리핀, 하와이 그리고 남양군도 등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작전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나 이후 전열을 다시 갖추면서 1943년에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고, 이후 제해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1943년 11월에는 남양군도의 하나인 길버트 섬, 1944년 2월에는 먀살군도, 6월에는 사이판 섬에 상륙해 일본군을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최전선에 배치됐던 우리나라 징병자들도 대거 미군의 포로로 잡히게 됐다.
얼마전 지역 한 일간지가 '자유한인보 제 3호' 발견을 보도했다. 자유한인보는 태평양 전쟁 때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나라 사람들 3천명 가량이 하와이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제작한 주간 소식지를 말한다. 한국인 포로들은 1년 6개월의 포로생활을 하면서 제 7호까지 소식지를 만들었다. 이번에 발견된 것은 제 3호 복사본이고 마지막 호인 제 7호는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종전과 함께 종간된 '자유한인보'에는 미국 하와이 포로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 등이 기록돼 있다. 가령 제 3호에는 당시 함께 포로생활을 하던 이탈리아 포로들과 축구시합을 했고, 그 결과 3대 5로 졌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밖에 귀국하면 어떤 나라를 건설한 것인가, 또 미군에 대한 고마움 등의 내용이 실려있으나 이중 후자는 다소 의외다. 자신을 포로로 잡고 있는 적국에 대해 고마움을 갖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정서상 맞지 않는다. 당시 미군은 한국 포로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한국인 포로 3천여명은 8명이 한 조가 돼 천막에 수용돼 있었다. 즉 당시 하와이 지역에는 한인 포로를 수용한 천막이 3백70여동 가량 들어서 있던 셈이다. 난민
조선시대 수령들이 임지에 나가서 힘써야 할것으로 7가지가 있었다. 이른바 '수령칠사(守令七事)'로, 여기에는 '호구증(戶口增)'도 포함돼 있다. 인구를 많이 늘리라는 뜻이다. 나머지 칠사는 농상(農桑)을 성하게 할 것, 학교를 일으킬 것, 군정을 닦을 것, 부역을 균등하게 할 것, 소송을 간명하게 할 것, 서리의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고칠 것 등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구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대표적인 사례가 태아를 언제부터 사람으로 봤느냐는 점이다. 경국대전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무릇 구타로 태아가 사망한 것과 수태후 90일 초과한 것으로 형체가 이뤄진 것이면 타태죄(구타에 의한 낙태죄)로 처벌한다. (그러나) 수태후 90일 이내로 태아의 형체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는 구타상해로 논죄하지 타태죄로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이상에서 보듯 90일 전의 태아는 사람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이 아닌 '잠재적인 인간'으로 인식했다. 전통시대 역대 권력자 중 임산부를 가장 이해한 임금은 세종이었다. 정말 그랬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종은 노비가 임신을 했을 경우 노비부부 모두에게 출산휴가를 주도록 했다. 세종실록 26년
조선시대 인구만을 전문적으로 다룬 문헌으로 '호구총수'(戶口總數)가 있다. 편찬 시기는 다소 불명확하나 대체로 1789년(정조 13) 규장각에서 한성부의 기록을 기초로 9책 분량으로 간행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 1책은 1395년(태조 4)부터 1789년까지 전국의 호구 총수와 1789년 한성부의 인구 상황을 기록했다. 그리고 제2∼9책은 1789년 각 도의 인구 상황을 경기도·원춘도(原春道)·충청도·황해도·전라도·평안도·경상도·함경도 순으로 기재했다. 충청도의 인구 변화에 대한 흐름은 제 4책에서 만날 수 있다. '호구총수'를 보면 1789년 충청도의 인구수는 86만8천2백19명으로 전국 11.7%를 차지했다. 반면 전라도는 122만2천8백4명으로 전국 16.5%의 인구 분포도를 보였다. 이밖에 경상도는 159만9백73명으로 21.5%의 분포도를 보였다. 하삼도의 이같은 인구 추이는 얼마전까지 계속 됐다. 그러다가 세종특별시의 도시 기능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충청권이 호남권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충청권의 인구가 호남권을 근소하나마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금년 5월쯤이었고,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벌이지고 있다. 안행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월 말 현재
우리 눈이 가로로 넓듯이, 읽는 것 역시 가로 문장이 편한 구조로 돼 있다. 한글은 초·중·종성이 한데 모아져 하나의 글자를 형성하기 때문에 가로로 써야 훨씬 능률적이다. 한글의 이런 특장은 IT와 최고의 궁합으로 결합하고 있다. 한글이 갖는 무궁무진한 자모음의 조합성과 인체 구성에 맞는 가로쓰기는 한글을 IT시대의 최강 문자, 그리고 한국을 IT 최강국으로 만들고 있다. 근현대 한글의 역사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주시경과 최현배(崔鉉培·1894~1970) 선생이다. 주시경이 한글문법의 뼈대를 세웠다면, 최현배는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이론을 완성하고 실천했다. 국내 유력 일간지들은 90년대 중반까지도 세로쓰기를 고수했다. 그러나 최현배 선생은 그보다 50여년 앞선 지난 1946년 '한글가로글씨연구회'를 만들었고, 70년대는 '한글전용'을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2년 8월 최현배 선생이 청원의 궁벽한 마을인 초정약수를 이례적으로 찾았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 청주지국장인 김동환의 초청으로 '청남학교'에서 한글강습회를 가진 후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가 이날 쉽지 않은 발길을 한 것은 '초정약수=한글의 성지'라는 의식을 굳건히 갖고 있었기 때문
초정약수는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전국적인 명소였다. 당시 오오꾸마쇼지(大熊春峰)라는 일본인이 '청주 연혁지'(1923년)를 저술했고, 이 책은 지금도 일제 강점기 기간의 청주지역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초정약수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매년 여름철에는 이 영천을 개방하는 관습으로 가까운 고을이나 가까운 곳에서 찾아 들렸으며 50리, 1백리, 멀리는 수 백리를 가리지 않고 이 지역으로 모여들어 몇 만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처럼 수만명의 인파가 일시에 초정약수로 몰려들 수 있었던 것은 충북선이 개통된 직후였기에 가능했고, 그 관문 역할을 한 공간은 내수역이었다. '淸州 椒井 露泉開湯' 제목의 동아일보 7월 29일자는 '기차삯 할인도 있다'고 밝혔다. '충북의 특산이고 전조선에서 유명한 청주 초정 물탕은 오는 8월 3일부터(20일간) 개방하게 되었다 하는데 음수객의 편의를 위하야 충북선 각역에서 내수역까지 기차 할인과 자동차 할인이 있다는데 위장병에 더욱 효과가 있다 한다.' 초정약수의 명성이 워낙 높다보니 일부 신문사는 '탐음단'을 모객하기도 했다. 중외일보 1927년 8월 7일자에는 '초정영천 탐음단…
세종대왕은 초정약수를 발견한 '어떤 사람'에게 목면(무명) 10필을 하사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라 하는데(…)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 어떻게 초정약수를 발견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초정약수의 발견과 관련된 전설이 이육(李陸·1438-1498)이 지은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실려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떤 늙은 농사꾼이 언덕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귓가에 은은히 군마의 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 보니 평지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달려가 사또에게 고했으며 이리하여 소문이 널리 퍼진 것이었다.' 그는 앞 문장을 '서원에 초수라는 물이 있다. 내가 안찰사가 되어 이를 살펴보니, 물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나오는데 아주 차고 맛이 쓰다. 뱀이나 개구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곧 죽는다'라고 적었다. 1444년 봄. 내섬시윤 김흔지에 의해 초정약수 행궁이 세워졌으나 당시 모습을 확인해 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온양 행궁과 관련 그림이 현존하고 있어 조선시대 온천행궁의 규모·배치를…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반차도'(斑次圖)에는 적어도 수천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중 상당수는 호위 군사들이지만, 남녀노소의 일반 백성 모습도 많이 그려져 있다. '국왕의 행차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 궁금증 때문에 나온 백성들이다. 1444년 봄. 세종대왕이 한양도성을 나서 우리고장 초정약수로 향할 때도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격쟁하는 노인도 있었다. 격쟁은 임금이 행차할 때 징을 치며 그 앞으로 나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동을 말한다. '연세가 85세쯤 되는 늙은이가 임금이 탄 수레 앞에서 원통함을 아뢰니, 병조에 내려 이유를 가리게 하고, 인하여 술과 음식을 먹이고 면포 1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그해 봄 1차 초수리 거둥을 마치고 한양도성으로 되돌아갈 때는 그런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충청감사 이선(李宣)이 "종량(種糧)이 부족한 인민들이 거가 앞에서 하소연할까 염려되니 현재에 있는 잡곡으로 고루 주게 하고 그 떠들썩하게 하소연하는 자를 금하게 하라"(5월 5일자)고 명령했다. 그 때문이었다. 이에 세종은 이선의 행동을 핵실(조사)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했다. 세종은 초정약수에 머물 때도 위민(爲民)의 모습을 자주 보였다.
전국 여론조사에서 과반이 넘는 찬성 의견을 획득, 명분을 확보한 세종대왕은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는 등 토지세법 개정에 박차를 가했다. 세종은 진양대군을 도제조, 하연, 박종우, 정인지 등을 제조로 임명했다. 이중 정인지가 공법 실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공법을 시행하려면 새로운 양전(토지조사)과 등급을 매겨야 했으므로 많은 실험이 필요했다. 그 실험지가 된 것이 바로 초정약수 고개 너머의 청안현이었다. "지난번에 초수에서 김종서와 이숙치 및 정인지로 하여금 함께 청안의 밭을 심사하여, 깊이 밭의 등수를 나누는 예를 안 연후에, 다섯 고을에 나누어 보내어 등수를 정하니, 밭의 품등이 거의 바르게 되었다."- 1444년. 세종대왕이 그해 가을에 초정을 다시 찾기 위해 한양도성을 나선 것은 윤7월 15일이었으나 언제 초수리에 도착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1차 거둥의 예로 봤을 때 한양서 초수리까지는 매번 닷새가 소요됐다. 따라서 세종은 윤7월 20일에 초수리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의 작성 시점은 '1444년 7월 13일'이다. 그렇다면 인용문의 '지난번에 초수'는 1444년 봄으로, 이때 이미 청안현이 공법의 실험지로
세종대왕은 공법(貢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지 10년만에 결단을 내렸다. 세종은 관료는 물론 '여염의 세민(細民)', 즉 평민에까지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사를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명하여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국민을 상대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는 이런 배경하에 실시됐다. 조선 전기는 당연히 모든 권력이 국왕 1인에게 집중돼 있고 또 신분의 차별이 뚜렷한 봉건시대였다. 그럼에도 세종이 '세민'의 여론까지 들어보려 한 것은 이미 그때 민주적 마인드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인 만큼 여론수렴 결과는 다섯 달 후인 그해 8월 초순에 나왔다. 결과는 공법시행 찬성 의견이 대략 57%, 반대가 42%로 찬성자가 많았다. '호조에서 중외의 공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논을 갖추어 아뢰기를, (…) 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49명입니다" 하니,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 참여한 백성들의 수는 총 1
전통시대 동양의 조세개념은 조용조(租庸調)였다. 중국의 수나라 때부터 등장한 제도로 조(租)는 토지에 부과하여 곡물, 용(庸)은 사람에게 부과하여 노동력, 조(調)는 호(戶)에 부과하여 특산품을 각각 징수·징발했다. 조선도 이같은 원칙을 준용, 농지를 가진 농민들에게는 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듯이 조선의 토지제도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공법(貢法)-영정법(永定法)-비총법(比總法) 순으로 변했다. 답험손실법은 글자 그대로 '담헙'과 '손실'이 합쳐진 표현이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조정은 농사의 작황을 현지에 나가 집적 조사하는 것을 '답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손실법은 작황에 따라 등급을 메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불합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령 어느 지역의 농토는 가뭄 때문에 작황에 안 좋아 C정도의 수확을 했다. 그러나 현지에 조사를 나간 관리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A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부지기였다. 세종은 즉위한지 얼마 안 된 때부터 토지세에 대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토질의 전분6등법, 풍흉의 연분9등법으로 잘 알려진 '공법'(貢法)이다. 세종 즉위 3년(142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세종대왕이 청주목 초수리(초정약 지칭)에까지 와서 훈민정음 창제 문제에 대한 고민을 했을까라고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미리 말하면 그런 의구심은 시간 낭비가 된다. 세종대왕은 1444년 초정약수에까지 와서도 훈민정음 문제를 매우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 증거는 아이러리컬하게도 훈민정음 창제의 열렬한 반대자였던, 당시 집현전 부제학(정3품) 최만리(崔萬理·?-1445)의 상소문 안에 들어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양이 매우 많아 단독이 아닌, 집현전 학자들의 집단상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최만리는 자신이름의 상소문에서 △훈민정음 창제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 어떻게 하겠느냐 △상말(훈민정음 지칭)만 알면 한자로 써있는 공문서는 어떻게 읽을 것이냐 등 세세한 내용까지 상소했다. 그리고 그런 최만리는 이 상소문에는 "어찌 이것만은 행재에서 급급(汲汲)하게 하시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언문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인용문 중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작업, '행재'는 초정약수 행궁, '성
세종대왕 대의 과학발전에 기여한 인물로는 장영실과 이천이 주로 거론된다. 그러나 사료를 보면 김조(金金+兆·?∼1455)라는 인물도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물시계인 자격루 발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김조와 관련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 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 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수리(초장약수)에 거둥할 때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바로 김조이다. 그의 보고를 통해 당시 충청도 가뭄과 그에 따른 기근현상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혹은 기근으로 나물만 먹는 자도 있고, 혹은 먹지 못해서 부황이 난 자도 있으며, 쌓아 둔 곡식도 많아야 1, 2두(斗)에 불과하고, 적은 자는 1, 2되 밖에 없는데, 혹 떨어진 자 중에는 경작하던 토지에 파종도 하지 못한 자가 3분의 1분은 된다 하니….'- 식량이 남아 있다는 사람도 기껏해야 1~2말, 적은 사람은 1~2되라고 세종께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초수리에 거둥하던 때의 가뭄은 전년도부터 계속 된 것이라는데 더 심각성이 있었다. 이에 세종
가뭄과 기근은 혼용되는 면이 있으나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가뭄은 기상적인 현상이고, 기근은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굶주리는 현상을 말한다.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은 1444년 가뭄으로 인해 충청도 일대에 대규모 기근(飢饉) 현상이 나타났다. 세종실록은 그 실상을 '사람들이 나물만 먹은 빛을 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병조 판서 정연이 아뢰기를, "신이 청안(淸安) 지방에 가니, 남녀 30여 인이 모두 나물을 캐고 있으므로, 신이 종자(從者)를 시켜서 살펴보니 모두 나물만 먹은 빛이 있었습니다."'- 기근현상이 좀더 심한 지역에서는 아사자도 속출, 장례를 치르지 못해 시신을 길가에 방치하기도 했다. 당시 예조는 세종에게 이런 보고를 한다. "이제 파종한 것이 싹이 섰고 밀·보리가 팰 때를 당하였는데, 여러 날 비가 오지 않으니 (…) 원통한 옥사를 살펴보고 빈곤한 자를 진휼하며, 시체와 해골들을 묻어 주게 하소서" 하니…'- 세종은 자신이 초수리에 머물고 있는 기간에 심한 기근이 찾아온 것에 대해 이른바 "내탓이오" 의식을 보였다. 또 배곪는 충청도 백성을 신속히 구제하기 위해 이른바 '보고 라인'을 先시행- 後보고 형태로 바꾸기도 했다
1444년, 세종대왕의 거둥에 발맞춰 초수리 뒷산에서 옥(玉)이 발견되자 나라 전체가 경사스런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영의정 황희는 이를 "태평성대의 징표"라는 식으로 말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정은 옥 발견지 일대를 특별 경비하도록 했다. "초수리(椒水里)에서 산출되는 옥(玉)은 실로 세상에 드물게 보는 보배이니 사사로 채굴하지 못하게 하고 그 낭비와 금지를 엄하게 해야 하겠다"- 이어지는 문장은 "금지와 방비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간사한 무리들이 반드시 틈을 타서 몰래 채굴할 것이니, 마땅히 그 주위를 가시나무들로 둘러서 울타리를 만들고, 문에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친히 글짜를 써서 봉해 놓고는…"(〃)라고 쓰여 있다. 지금 사람들은 옥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일부 애호가들이 악세서리용으로 사용하나 그 값은 금·은에 훨씬 못미친다. 그럼에도 당시 세종대왕과 대신들이 이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의외로 음악과 관련이 있다. 세종대왕은 중국 것이 아닌, 조선 고유의 악기로 종묘의례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준음을 지닌 악기를 가질 수 없었다. 이때 경기도 남양에서 옥의 일종인 경석(磬石)이 발견됐다. 경석은 가공이 쉽기 때
완벽(完璧)은 보통명사처럼 보이나 실은 중국 고사성어에서 유래했다. 중국 조나라 혜문왕은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희귀한 구슬을 갖고 있었다. 원래 한 신하의 애장품이었으나 강제로 빼앗았다. 강대국 진나라의 소양왕이 이 소문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15성(城)과 구슬을 맞바꾸자고 청했다. 혜문왕은 소양왕의 속내가 뻔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했다. 이때 명신이자 책략가인 인상여(藺相如)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진나라로 가 화씨지벽을 일단 소양왕에게 바쳤다. 이에 구슬을 받아 쥔 소양왕은 "과연 훌륭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으나 성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인상여가 "그 구슬에 한 군데 조그만 흠집이 있어 가르쳐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소양왕이 이를 무심코 내주었다. 그러자 인상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신의를 지키느라 구슬을 지참했으나 왕은 15성의 약속을 지킬 듯 싶지 않으니 이 구슬은 일단 소생이 지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생의 머리와 더불어 이 구슬을 부숴 버리겠습니다."- 인상여의 심리전은 먹혀들었고 구슬은 무사히 조나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까지 데리고 온 막내아들 이염(李琰·영흥대군) 왕자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영흥대군(후에 영응대군)은 초수리 약수에 왔던 그해에 여산송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했지만 5년 뒤 그녀와 이혼했다. 그러나 실록의 행간을 살펴보면 그 이혼은 합의가 아닌, 송씨가 궁궐에서 일방적으로 쫓겨난 모습을 하고 있다. 실록은 이 부분을 간단하지만 뭔가를 알 수 있게 적었다. '이때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병으로 인하여 내쫓기고, 다시 배우자를 고르기 때문에 말한 것이었다.'- 원문은 '時永膺大君夫人宋氏以疾見黜, 更爲擇配故云'이라고 돼 있다. 한문에서 '見'은 피동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見黜'(견출)은 쫓겨남을 당한 것이 된다. 사가들은 이 부분에 대해 시아버지 세종이 며느리의 행동거지에 불만이 많았고, 그래서 병을 핑계로 막내아들과 강제로 이혼시키고 궁궐 밖으로 쫓아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송씨가 쫓겨날 당시에 병을 앓았다는 핑계는 얼마안가 사실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세종대왕은 곧바로 해주정씨 규수를 간택, 영흥대군과 그녀를 재혼시켰다. 여기부터 이른바 '조선시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송
1444년, 세종대왕은 청원 초정약수를 찾을 때 혈육으로 세자(후에 문종)와 영흥대군(永膺大君·후에 영응대군) 이염을 대동했다. 문종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영흥대군은 지명도가 낮은 편이다. 때문에 세종대왕이 여러 명의 왕자 중 영흥대군을 왜 대동했는지는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당시 영흥대군은 10살밖에 되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는 세종과 사이에 40살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가 바로 영흥대군으로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과거 다산이 대중화됐던 시절에는 막내 아들이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때문에 막내아들은 늘 '버릇없음'의 대명사가 되고는 했다. 영흥대군도 바로 그런 경우로, 세종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 세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흥대군을 아홉살때부터 사냥터에 데려가기도 했다. '여러 대군들도 모두 이리저리 달리면서 활을 쏘았다. 이때 영흥 대군 이염이 나이 바야흐로 아홉 살인데, 임금이 그를 대단히 사랑하여 만약 쫓기다 지친 짐승이 엎드려 있으면, 가던 연(輦)을 멈추게 하고서 사람을 시켜 염의 말을 그리로 몰게 하여 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막내아들 영흥대군을 위해 날다람쥐를 가져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당하자 복주(지금의 경북 안동)로 몽진을 갔다가 귀로에 청주에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 이때가 공민왕 재위 11년인 1361년이다. 임금이 궁궐 안에 있으면 먼지를 뒤집어 쓸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피난을 위해 궁궐을 나서면 먼지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바로 '몽진'(蒙塵)은 먼지를 뒤집어 썼다는 뜻으로, 그 자체로 난세를 의미하고 있다. 공민왕은 임시수도인 청주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시험을 실시, 그 합격자 명단을 취경루(지금의 망선루)에 붙이도록 했다. 그리고 지금의 청주 무심천 변에 있는 '공북루'(拱北樓)라는 큰 누각에 올라 호종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했다. 이날 시짓기에 참여한 대신은 모두 26명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종 때 사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당시 공북루에는 총 28편의 시편액이 걸려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날 공북루에서 지은 26편의 시 외에 1편은 그전부터 걸려 있었고, 또 다른 1편은 개성에서 보내온 백문보(白文寶?·∼1374)시였다. 즉 '26+1+1'인 셈이다. 1444년 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방문중, 신숙주, 박팽년, 류
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방문하기 위애 한양 도성을 떠날 때 조정 대신중 누구를 대동했는지 당일 기록에는 분명히 나와있지 않다. 세종실록은 그날 기사를 '임금과 왕비가 청주 초수리에 거둥하니, 세자가 임금을 모시고 따라갔다'(上及王妃幸淸州椒水里 世子隨駕)라고만 적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초정약수에 1차(봄철)로 머물 때인 1444년의 3~5월 동안의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우의정 신개(申槪),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 판중추원사 성달생(成達生), 병조판서 정연(鄭淵), 영흥대군 이염(李琰), 도승지 이승손(李承孫) 등 6명의 대신과 1명의 대군 이름이 등장한다. 이중 영흥대군 이염은 세종의 8번째 아들로, 문종의 동생이 된다.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인물 외에 세종을 호종(扈從), 즉 호위하며 뒤따라간 대신들은 더 있었다. 개인문집에 △초수리 △호종 △당시 풍경묘사 등의 내용이 등장하면 세종대왕을 호종한 신하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그런 예에 해당하고 있다. 그가 남긴 문집으로 성종의 특명에 의해 편찬된 '보한재집'(保閑齋集)이 있다. 문집에는 '扈從淸州 次醴泉懸板 三首'(호종청주 차예천현판…
조선시대 초수리 약수(초정약수)는 독특한 물맛 때문인지 뭇 문인들이 많이 찾았고, 그 느낌을 시로 남겼다. 사료에 등장하는 인물을 언뜻 적어도 신숙주, 서거정, 이승소, 방문중, 하연, 박팽년, 안평대군 등이 있다. 이들 모두가 초정약수를 직접 방문했는지, 아니면 소문만 듣고 시를 썼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위에 열거한 인물 모두는 세종연간에 생존했다. 따라서 세종과 함께 초정약수를 찾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안평대군 등은 사료를 통해 직접 확인되고 있다. 열거한 인물 중 방문중(房文中)은 좀 특이한 인생 궤적을 지니고 있다. 그는 태종 때 과거에 급제했고 본관이 '남양'(지금의 수원)이라는 점이 알려져 있을뿐 나머지 관직은 거의 기록돼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곧은 성격에 패기가 만만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실록에 나타났다. 고대 중국에는 이른바 '일취구녀제'(一娶九女制)가 존재했다. 황제는 정비인 왕비를 포함해 9명을 후궁을 거느닐 수 있다는 뜻이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도 이 제도를 내심 크게 반겼다는 증거가 사료에 속속 존재하고 있다. 태종은 공식적으로 9명의 후궁을 둔 것으로 전해지나, 일부 사료는 17명까지 기록
장자 추수편에는 상상속의 새인 봉황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워낙 고결한 새이다 보니 함부로 먹지 않고 아무 곳이나 앉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릇 원추라는 봉황새는 남해를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갈 적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약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夫원추 發於南海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인용문중 '예천'(醴泉)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예천은 감천(甘泉), 즉 단맛이 솟는 샘이라는 뜻으로 태평성대에만 상서로운 기운이 솟구친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인용한 중국고전 예기는 '하늘에서는 단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예천이 솟아나는구나'(天降甘露 地出醴泉)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려의 대문장가인 이규보도 비슷한 분위기를 시를 남겼다.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해도 하늘이 모른다면 / 어찌하여 예천이나 지초가 땅에서 나겠는가 / 백가와 천사를 모두 궁구해야 하지만 / 효경을 먼저 읽어 깊은 뜻 터득하여라.'- 효도로 가득한 세상이 되면 현세가 곧 '예천의 땅', 즉 낙원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호학군주로 다방면의 학자적인 경지에 올랐던 세종대왕이 '예천'의 의미를 모를리 없다. 그는 우의
[충북일보]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문화제조창을 비롯해 청주 곳곳에서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시간 보내기 좋은 '꿀잼' 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대표이사 변광섭)에 따르면 어린이날 연휴인 4~5일에는 문화제조창 본관과 동부창고에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할 예정이다. 주말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동부창고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신나는 어린이날 행사'가 펼쳐진다. 동부창고 6동에서는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 △여유 만만 창고 피크닉 △흥미로운 예술시간 △피아노 공연 등이 열린다.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는 병뚜껑 알까기, 자투리 목재 미니운동회 등 온몸으로 뛰놀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체험 활동이다. '흥미로운 예술시간'을 통해서는 17종의 예술체험 프로그램(유료)을 즐길 수 있다. 이날 동부창고 카페C는 유료 예술체험 프로그램을 즐기고 음료를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굿즈 뽑기 이벤트'를 연다. 문화제조창 본관 청주시한국공예관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공예관은 5일 오전 10시,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 오송에 바이오의약품 소부장 특화단지와 첨단재생바이오 글로벌 혁신특구 유치에 성공한 충북도가 바이오 특화단지와 K-바이오 스퀘어 조성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오송을 바이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바이오 특화단지는 올해 상반기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예타 면제는 이때까지 실현시킨다는 목표를 잡았다. 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던졌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신규 산단 조성 시 국가산업단지로 신속 지정 검토, 생산시설 신·증설 때 산업단지의 용적률 최대 1.4배 상향 등을 지원 받는다. 정부 연구개발(R&D) 우선 반영, 입주 기관에 대한 국·공유 재산 사용료와 대부료 감면, 예타조사 특례 적용 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바이오산업 육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유치전은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을 비롯한 11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인천과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며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신청했다. 도는 지난달 30일 서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