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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봄을 이끄는 바람이 분다. 바람하늘지기, 파란 빛깔로 일렁이는 시집을 연다. '저자 드림'이라고 쓴 시인의 글씨가 또렷하게 살아 움직인다. 고 김규화 시인의 '바람 연작시'를 담은 시집이다. 나에게 특별하고 귀한 선물이다. 하늘로 가신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운명이란 게 있을까. 이미 정해진 어떤 길 말이다. 길이 없는 무한 공간을 흐르는 바람은 자기 운명을 알까. 시인은 예감했으리라. 흔들리지 않는 꼿꼿함으로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 순간까지 바람이 시간 속을 돌고 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나 우리 주변을 에워싸며 영원을 빚고 있다는 사실을.

사하라사막에 바람 한 번 일면

낱낱의 모래알들은 제 몸을 뒤집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고쳐 눕는다

「소용돌이·바람·9」부분

나를 여기 두고 나는 바람 되어

먼 곳으로 떠납니다

나는 바람 되어 먼 곳의 허수아비를

여기 있는 나에게 불러옵니다

「결·바람·26」부분

시집 속 각각의 시에서 색다른 바람이 불어 나온다. 정(靜)적인 세계와 동(動)적인 세계가 섞이며 다른 세계를 빚는다. 고요한 사막에 바람이 불면 '낱낱의 모래알들은 제 몸을 뒤집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고쳐 눕는다.' 모래알은 삶을 움직이는 주체로 개별자인 인간을 상징한다. 작은 모래알이 아름다운 건 스스로 '제 몸'을 움직여 변화를 이루는 데에 있다. 그건 삶에 대한 태도가 능동적임을 말한다. 움직인 모래는 다른 곳에 쌓이고 쌓여 언덕과 산을 짓고 기하학적이고 고혹적인 무늬를 그려낸다.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그러한 주체적 인식과 함께 화자(시인)는 시간의 광막 안에서 스스로 '바람이 되어' 떠난다. '먼 곳'은 세상과 절연된 곳, 미지로 둘러싸인 '초월적 극점'일 것이다. 삶에 대한 초월적 인식은 죽음까지 초월한다. 그리하여 '먼 곳의 허수아비' 즉, 영혼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현재로 불러 세상과 다시 만난다. 따라서 시 속의 시간은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시를 읽는 동안 독자는 화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보게 되며 삶과 죽음이 함께 '얽혀있음'을 읽는다. 소멸한 시간은 시 속 화자의 발화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 누구도 과거와 미래의 시간에 직접 맞닿을 수 없지만, 우리의 기억과 몽상은 선명하고 찬란한 시간을 찾아낼 수 있다.

시인은 사막을 좋아했다. 희거나 붉은 혹은 검거나 갈색인 여러 양태의 사막,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의 깊이 말이다. 시인은 홀로 길을 걸으며 기꺼이 사막의 꽃이 되고 싶어 했고 문학의 절대적 순수함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 사막의 길은 때론 환하고 때론 캄캄했으리라. '바람하늘지기는 시간에 관해 쓴 연작시예요'라고 넌지시 시집을 소개하시던 시인의 음성이 귓가에 울린다. 우리의 삶엔 무한정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삶이 다할 때까지 새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영원은 그 순간 속에 숨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육신이 사라진 자의 기록은 언어로서 후대에 이어진다는 걸 '바람의 시간'을 통해 시인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오늘은 입춘이다. 바람이 분다. 시인의 목소리 같은 바람이 부드럽게 나뭇가지를 흔든다. 봄이 벌써 다가온 걸까.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서 시인의 영혼을 느낀다. 가까운 데에서 손짓하는 시인의 순수의식이, 무(無)에서 펄럭이는 시간의 빛이 조용히 마음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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