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개봉한 임선애 감독의 '69세'는 성범죄 피해노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독립영화다. 69세 효정은 병원에서 29세의 남자 간호조무사 중호에게 성폭행 당한다.
"다리가 예쁘세요. 수영을 하셔서 그런지 뒤에서 보면 아가씨 같아요." 어두운 공간에서 물리치료 중 40세 연하의 남자간호조무사에게 능욕을 당한 효정은 치욕감에 괴로워하다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나 경찰은 정액이 묻은 속옷을 증거품으로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며 효정을 치매환자로 2차 가해했다. 법원 역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주변의 반응 역시 '조심 좀 하지'라는 조롱과 멸시 일색이었다. 피해자인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이 뭘 조심해야 했을까. 만일 내가 젊은 여성이었어도 이런 손가락질을 받았을까?' 효정은 가해자를 찾아 나선다. 중호의 집에는 만삭의 아내와 사위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처가식구들이 있었다. 효정은 현관문에 성범죄 사실을 적은 고발문 한 장을 남긴다.
2012년에 일어났던 실제 사건의 피해자는 '그렇게 젊고 잘생긴 청년이 왜 할머니를? 정말 그 할머니가 피해자 맞아? 할머니가 어린 남자를 유혹한 거 아니야?' 같은 의심과 모욕에 시달렸다. 젊은 남자가 어머니 나이의 여성을 성폭행할 이유가 없다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추문이 기정사실처럼 돌았다.
경찰은 현장검증을 이유로 억울한 피해자를 수없이 불러 추행을 어떻게 당했는지 세세히 상황을 재현시켰다. 지치도록 조사를 받으며 2차 가해에 시달리던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18일 후 5층 자택에서 투신자살했다.
"내가 아이였거나 젊은 여자였다면, 그놈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고 그놈은 구속되었을 것"이란 피해자의 한 맺힌 유서가 영화 '69세'의 모티브다. 영화 속 주인공 효정이 경찰에게 당한 2차 가해와 구속영장 기각은 실화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 한다.
영화에서 효정의 고발문에 열 받은 가해자 중호는 "자기 인생 끝나는 꼴을 보고 싶은거냐"며 효정을 폭행한다. 효정은 비웃는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자신의 모든 잘못을 모두 다 뉘우치고 갚은 뒤에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게 인생이야"
주인공의 대사는 깊은 울림이 있었지만 영화에서 파렴치한 노인 성범죄자 중호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실제사건에서는 억울한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후 이루어진 재수사로 3년 뒤 가해자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노인 성범죄의 현실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아픔보다 주위의 편견과 질시가 더 두렵다. 위로와 분노대신 저급한 호기심으로 기웃거리며 생각 없이 내 뱉는 무책임한 말들이 2차 가해가 되어 피해자를 괴롭히는 것이다.
최근 구미에서 90대 할머니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70대 마을 이장이 긴급 체포됐다. 벌건 대낮에 가해자는 이웃 할머니의 집에 들어가 피해자를 강제 추행했다.
믿고 의지하던 아들 같은 마을 이장을 할머니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방에 들였을 것이다. 유사강간을 당한 할머니가 놀라서 완강히 거부하자 도주했던 이장의 만행은 연로하신 어머니를 걱정해 딸이 설치해 둔 홈캠에 덜미를 잡혔다.
고령의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호소했어도 이번처럼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면 가해자는 범죄사실을 펄쩍 뛰며 부정했을 것이다. 심신이 노쇠한 고령노인은 피해인지가 둔해 진술증거효력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드러나지 않아 성범죄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건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나이 많은 여성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편견을 견디기 힘들어 피해사실을 그냥 덮고 넘기려는 노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고령층 성범죄는 이제 특이한 성적취향을 가진 일부 노인성애자의 문제만이 아니게 됐다.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 중 가장 더러운 범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