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 비로소 푸른 뱀의 해인 을사년 새해가 열렸다. 설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생각하지만 을사년의 기운은 입춘인 2025년 2월 3일 22시 49분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뱀처럼 잠자리에 들기 시작하는 늦은 시간에 슬그머니 새해의 기운이 스며든 것이다.
한해의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이면 새해를 맞는 설렘으로 입춘축(立春祝)을 대문이나 설주에 붙인다. 신께 소원을 빈다는 입춘축의 축자가 주술의 의미로 느껴져 요즘은 입춘축을 입춘방(立春榜)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 됐다.
입춘이 드는 시각인 입춘날 입춘시에 맞추어 입춘방을 붙이면 좋다는 말이 있어 한밤중에 입춘방을 붙이는 경위 바른 집안이 있는 모양이다. 잡귀들을 물리치는 벽사의식으로 여겨 굿이나 독경하는 것보다 입춘방을 붙이는 것이 훨씬 낫다는 속언도 내려온다. 지방에 따라 한문글귀대신 '잡귀야 달아나라'는 원색적 입춘방을 쓴다는데, 따라하고 싶은 유쾌한 입춘방이다.
입춘방의 내용은 해마다 비슷하다. '입춘대길 건양다경(入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좋은 일이 많아지고, 밝은 기운을 받아 경사가 있으리라)',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고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해지리라)',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생기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오리라)' 등의 기원이다. 하나같이 새봄을 맞으며 행운과 평안을 비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올해 해남향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과 함께 '민주회복 민생안정'을 입춘방으로 내걸었다. 새봄과 함께 어지러운 정국이 하루빨리 정돈되고 민생경제가 회복하기를 바라는 글귀다.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태를 걱정하며 새봄의 좋은 기운으로 나라에 길한 일만 생기기를 바란다는 해남향교 유림들의 마음이 어느 해보다 고맙게 느껴진다.
웬일인지 봄이 시작되는 입춘부터 날씨가 사나워졌다. 7년 만에 가장 추운 입춘한파란다. 이번 겨울 들어 가장 낮은 기온에 몰아치는 강풍까지 맞자니 그렇지 않아도 움츠러든 몸과 마음이 더욱 시리다.
입춘 무렵에 큰 추위가 닥치면 '입춘을 거꾸로 붙였나'라며 입춘방을 확인했다고 한다. 장독과 김칫독이 얼어서 터지는 추위가 예전에도 종종 닥치곤 했나보다. 올 입춘 추위는 꽁꽁 얼어붙은 정국과 포개져 더 맵게 파고든다.
하긴 정국이 훈훈했던 입춘은 없었다. 지난 2001년 2월 5일 입춘일에 정창화 한나라당 총무는 국회 정상화에 앞서 당시 여당이던 김대중 정부의 새천년 민주당이 계속 야당탄압책을 쓴다며 '입춘이라 정국이 풀렸으면 하는데 여당은 인조 눈을 뿌려가며 겨울을 지속시키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비난했었다. 꽤 흥미로운 비유다.
정권과 상황에 따라 여, 야가 바뀔 뿐 봄이 시작됐어도 인조 눈이라도 뿌려대며 겨울을 지속시키려 고집하는 정치인들의 작태는 변한 것이 없다. 봄이 왔지만 봄을 느낄 수 없게 몽니를 부리는 꼴이다.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라는 의미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중국 전한(前漢)시대 11대 황제인 원제(元帝)의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을 두고 나온 말이다.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흉노 왕 '호한야선우'의 후궁이 되었던 왕소군은 남편 호한야선우가 죽자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생을 마친 경국지색의 미인이다. 정치적 희생물이 되어 황량한 북방으로 끌려간 왕소군의 가련한 처지를 동정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추모시 '왕소군'을 통해 왕소군의 마음을 춘래불사춘이라 표현했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계절과 무관하게 상징적 의미로 회자되는 성어지만 나라 전체가 얼어붙어 있는 작금의 입춘상황에선 이보다 더 신통하게 어울리는 말이 없게 됐다. 철모르는 한파가 매서워도 이미 입춘이다. 따뜻한 봄기운을 기대하며 문 안으로 들어선 봄을 향해 간절히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뇌어본다. '민주회복 국태민안'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