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생활이 로망인 최영미 시인

2017.09.17 13:12:58

류경희

객원 논설위원

미국시인 '도로시 파커'처럼 호텔에서 살다 죽는 것이 로망이라면서 "서울이나 제주의 호텔에서 내게 방을 제공한다면 내가 홍보 끝내주게 할 텐데"라는 글을 페이스 북에 올려 비난과 동정을 동시에 받은 최영미 시인은 참 특별한 사람이다.

1994년 출간한 그녀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1980년대식의 삶에 종말을 고하면서 일상의 중심인 섹스를 화두로 삼았다는 시집은 '마지막 섹스의 추억'같은 도발적인 작품들이 입소문 나며 50만 부 이상 팔리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현재까지 52쇄를 찍었다고 한다.

작가는 인세를 10%정도 받는다. 1만 원 정가의 책 한권을 팔면 1천원이 작가에게 인세로 가는 셈이다. 50만 부가 팔렸으니 최영미가 받은 인세가 어느 정도인지는 금방 계산이 나온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평생 꿈도 못 꿀 어마어마한 액수의 인세다.

그런 그녀가 현재 생활보호대상자라고 한다. 연간 소득 1천300만 원 미만의 무주택자라고 스스로의 재정 상태를 밝힌 것이다. 투자를 잘못해 낭패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씀씀이다.

"자신이 죽은 뒤엔 자신이 살던 호텔 방을 '시인의 방'으로 이름 붙여 문화상품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나" 라고 한 제안을 보면 사업적 마인드가 있는 사람인 것도 같다.

최영미 시인이 롤 모델로 내세운 '도로시 파커'는 미국 문인들의 사교모임을 주도하며 뉴욕 맨해튼 알곤킨 호텔을 명소로 만든 작가다. 시인,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평론가였던 그녀는 맨해튼의 알곤킨 호텔에서 평론가들과 어울리며 문학과 인생을 논하고 사회를 비판했다. 이 모임이 '알곤킨 라운드테이블'이다.

파커 일행의 알곤킨 라운드테이블 덕에 재미를 본 맨해튼 알곤킨 호텔은 파커가 묵었던 1106호를 '파커 스위트'로 상품화했다.

알곤킨 라운드테이블이 해체된 후 할리우드에 입성한 파커는 영화 각본 집필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라 곤경을 치렀다. 제2차 세계대전 뒤 할리우드를 휩쓴 반공주의에 항거한 좌파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3번의 이혼과 알코올중독, 자살기도 등 굴곡진 삶을 살았던 파커는 뉴욕 센트럴파크 인근 레지던스 호텔인 '볼니 호텔'에서 혼자 숨을 거뒀다. 온기 없는 레지던스 호텔에서 지내다 유해조차 거둘 사람이 없이 떠난 외로운 삶이었다.

최영미 시인이 '아미고 레스토랑을 사랑했던 시인 최영미'라며 투숙 편의 제안 메일을 보낸 호텔은 서교동의 아만티 호텔이다. 특급에서 별이 하나 빠지는 4성급의 이 호텔은 홍대입구에 위치해 있어 젊은이들에게 제법 인기가 높다. 벽이 높아 외부 시선에 대한 부담이 없는 수영장이 있는데다 홍대근처의 화끈한 밤 문화를 손쉽게 즐길 수 있어서다.

'그냥 호텔이 아니라 특급호텔이어야 하며 수영장이 있음 더 좋겠다. 아무 곳에서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라고 했던 그녀의 취향에 상당히 들어맞는 호텔인가 보다. 그러나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작가에게 어울리는 호텔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료로 방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으나 그녀의 호텔 투숙 편의 제안은 격려나 동정보다 비난과 걱정이 훨씬 많았다. 긍정적으로 보면 영향력 있는 작가라는 증거다.

그런데 주거 문제가 해결됐다며 그녀가 밝힌 후속 내용이 흥미롭다. 월세 집을 비울 것을 요구했던 집주인은 1년을 더 살도록 계약을 연장했단다. 그녀에게 강의를 들었던 의사 부부는 아만티 호텔의 1년 투숙 값을 제공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단다.

아만티 호텔보다 지명도가 높은 앰배서더 그룹으로부터 예술가들을 위한 투숙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는 자랑도 보탰다.

잠시 소란스럽긴 했으나 1년간 주거가 안정됐다니 다행한 일이다. 50세를 지천명(知天命)이라 한다. 하늘의 뜻을 이해하여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억지와 욕심에서 벗어나는 나이라는 의미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도 이처럼 천진할 수 있는 그녀가 신선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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