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는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중국에 기대어 중국식 그림을 재현하는 일에 멈춘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사실적 문학 이론을 그림으로 전하는 일도 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풍속도이다. 사진이 발달 된 오늘, 풍속도의 모습에 감흥을 느끼기 어렵지만, 당시 일반인의 살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는 시도 자체가 파격이었다. 강세황의 도움으로 김홍도는 도화원 화원이되었다. 도화원은 국가에서 관장하는 궁중화가 관리소였다. 궁중의 다양한 기록적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사진이 없던 시기에 글로 모두 정리 못 하는 또다른 기록을 주관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김홍도는 그림을 그리며 다양한 선진 그림을 접하게 된다. 본래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곳에 뽑혔겠지만 1781년 어용화가가 되어 정조를 그리게 되었다. 사실적 묘사의 실력은 여행을 가지 않고도 그곳을 잘 옮겨 그려 놓으면, 관광을 갔다 오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먼 곳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김홍도는 비밀리에 1789년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라는 명을 받고 스승 김응환과 함께 일본 밀사로 가게 된다. 그런데 스승 김응환은 병으로 죽게 되었고 혼자 대마도로 가서 지도를 그려왔다. 일종의 일본에 대한 염탐이 주요 목적이었던 듯하다. 김홍도가 일본을 가게 된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뛰어났던 이 사건을 통해 새로운 가설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그림으로 일컫는 그림이 '우키요에(浮世繪)'이다. 일식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사무라이의 모습이나 후지산의 모습을 판화로 표현한 그림이 우키요에다. 이런 우키요에 그림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사람이 '도슈사이이 샤라쿠(東洲齋寫樂)'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10개월간 140여 점을 그리고 갑자기 사라졌다. 그렇기에 그는 예명을 사용하며 그림을 그리다 사라졌거나 아님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그림을 그리다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실체가 있는 전설이 되어있다. 그의 활동 기간은 1794년 5월~1795년 2월까지이다. 김홍도는 발가락이 6개였다는 설이 있는데 샤라쿠도 발가락이 6개라는 설, 일본에 간 기간과 완벽히 맞지는 않으나 유사한 시기에 일본에 있었으므로 일부 가설은 김홍도가 예명으로 10개월간 일본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는 설도 있다. 김홍도의 말년 기록이 없다는 것도 일본으로 가서 활동해서 그럴 것이라는 추측과 상상으로 사건을 사실처럼 더해준다. 김홍도는 1791년 정조의 초상을 그렸고 이 공을 인정받아 충청북도 괴산 연풍의 현감으로 가게 된다. 충북에 있는 동안 충북의 명승을 돌아보며 그의 특별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1796년, 병진년화첩(보물 제782호)을 만들었다. 20면으로 된 화첩은 단양 8경인 사인암을 그린 것이며 도담삼봉, 영랑호등과 같은 풍경, 산수 인물화, 화조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연풍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그리 큰 도읍은 아니었던 곳이다.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관아 곡식을 나누어 구율에 힘을 썼다고 하였으나 그를 헐뜯는 무리가 다른 이야기로 그를 모함했다. 백성들의 중매에나 신경 쓰며 젊은 병사들에게 사냥을 시키는 일에 열중한다는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본업인 그림 그리는 일을 다시 하였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왕이 되면서 김홍도 역시 중요한 일에서 배제되며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서양이나 조선이나 새로운 사고는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나온다. 새로운 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일상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을 다른 세대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다듬어 만드는 것이다. 김홍도가 유명해져 연풍 현감으로 짧게 있었더라도, 지역에 매몰되어 관광 상품 만드는 것보다 정신을 찾고 조명하는 것이 르네상스의 해석에 보다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지역의 문화르네상스는 정신을 찾는 일을 먼저 하길 바란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사용 후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보면 죽고 사라지는 것의 선함도 느낄 수 있다. 그런 것을 본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물과 달리 인간에 대한 죽음은 현상과 이상이라는 두 가지의 다른 측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죽음이 나쁜 것이 되려면 살아있는 것은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부정은 곧 살아있다는 긍정을 수반하게 되는데 이것은 죽음이라는 공포를 이기기 위한 것이다. 생명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능인 생명유지의 욕구는 인간 3대 본능활동: 섭식, 수면, 배설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욕구는 죽음과 정반대되는 생존에 대한 것으로, 본능이라는 어쩔 수 없음에 포함되어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를 요구한다. 살아있는 삶은, 나라는 존재가 현실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른 존재와 만날 수도 있고 약속을 통해 또 다른 시간, 다른 존재와 시간을 공유할 수도 있다. 현재에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은 현실을 주도적으로 조정하며 산다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며 몸으로 만져지는 물리적 상태에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죽음은 무엇인가? 과거는 있었으나 현재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을 갖게 되며 미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실행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렇게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의 차이는 자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가 있다는 것으로 단순히 정리될까? 죽음이라는 논의를 하기 이전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오랜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면 죽음을 물질로 봐야만 하는 가에 대한 논의가 끝나지 않기도 하지만 물질로만 설명 안 되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구성이 먼저 해석이 되어야 인간의 죽음을 다룰 수 있다. 이원론(二元論)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몸은 물질과 비물질적 존재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비물질적 존재를 '영혼'이라 불렀다. 영혼과 몸은 차원이 다른 두 존재가 합쳐진 것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거나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거나 하면서 사람들의 현상을 심리적 이분법에 의거하여 평가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해석은 일원론(一元論)적 관점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육체만 존재할 뿐이며 감정이 있는 물질적 존재로 인간을 본다는 것이다. 영혼의 존재는 없으며 뇌를 통한 다양한 경험이 축적되어 정보가 되면 외부 자극에 프로그램 되어 있는 정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AI와 유사한 방식으로 인간이나 기계나 유사한 방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을 특수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보다 복잡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단순히 물질의 자기 동력을 잃었다는 방식으로 본다면 인간의 존엄보다는 활용의 측면이 강하다. 코로나로 전 세계에 사망자가 증가하고 전쟁으로 삶과 죽음을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벌어진 이태원참사에 대해서 희생자, 사망자, 사고자로 할지 죽음을 맞이한 사람과는 상관없는 논의 싸움이 계속된다. 켈트문화에서 유래된 핼러윈(Halloween)은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제(All Hallows' Day evening)의 줄임말이다. 11월1일이 켈트족에게는 겨울이 시작되는 첫해이며 한 해의 시작이었다. 이날 저승문이 열려 죽은자의 영혼이 나오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사람의 몸과 영혼 그리고 죽음과 삶은 늘 함께 있었다. 고귀한 죽음이 되기 위해서라도 남은 사람이 그들을 기억해주고 주변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함께 사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의미 있는 죽음에 대응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몸이 물질로 만 되어 있을지, 영혼도 있을지 보다는 남을 도우며 현재의 삶을 사는 것이 미래에 사는 누군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역은 지역에 맞는 축제를 해야 한다. 대규모 도시의 대규모 행사와 지역의 축제는 다르다. 그리고 당연히 달라야 한다. 대도시는 물이 모여 큰 강이 되듯 다양한 문화 혼성이 어루러진 축제가 돼야 하고 지역은 문화의 독특성이 남아있는 소규모 문화 중심의 졸보기(먼 곳은 확실히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곳은 잘 보는 시력)의 방식이 돼야 한다. 축제는 예술행사가 주된 중심으로 고대 로마에서는 성스러운 날은 일하지 않고 쉬게 했다는 것에서 유래가 됐다. 그러므로 축제일은 신성한 날임에도 어원은 정반대의 뜻을 지닌다. 신성하지 않은 날이므로 한가한 날이라는 뜻의 디에스 바칸테스(dies vacantes)는 일을 하는 날인데, 오늘날의 휴가(vacation)는 디에스 바칸테스에서 유래했으므로 오히려 반대의 의미로써 지금 통용되고 있다. 축제의 중심은 공연에 있다. 공연은 자신의 기능을 다른 공연자와 이야기를 구성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오랜 시간 조율과정을 거쳐 숙달된 결과를 만들어 낸다. 플라톤이 예술을 정의할 때 모방으로 정의 내린 것처럼 공연은 개개별 모방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모방은 완전한 재현이 아닌 것을 말한다. 예술의 지향점 역시 완벽한 재현이 아닌 진짜처럼 보이는 가상을 논한 것이다. 모방에 치우쳐 모든 예술을 평가하는 것은 바보 같은 해석이겠으나 즐거움에 예술의 본질이 있다는 쾌(快)만으로 축제를 정리할 수는 없다. 예술 축제는 숙달된 예술가의 이야기를 구성한 모방을 넘어 시민참여를 유도하는 모두가 즐거운 축제의 시도가 돼야 한다. 이 시작은 분명 지역 역사에 기인해 기획이 돼야 각 지역에서 무분별하게 동일한 축제가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지역예술은 늘 팍팍하고 모든 것에 어려움이 있으며 여유보다는 부족함에 대해 토의를 할 만큼 어렵고 아쉬운 것투성이다. 이런 지역예술의 불만은, 현실에 대한 자신의 기대치보다 보상이 미치지 못하거나, 미래의 기대치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불안한 마음에서 나오는 표현이다. 지역예술은 대도시와 달리 대규모 자본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므로 지역예술가는 적은 기회를 주는 지역에 대해 푸념하며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사회적 현상으로 젊은 연령층이 군소 도시를 버리고 대도시로 가는 기저(基底)에 이런 현실적 요인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제는 지역예술가들에게 지속적 일자리 제공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행정 지원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문화는 하나의 방법으로 정해지지 않으며 한쪽 방향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문화 중의 꽃이라는 예술 역시도 하나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예의 방법만으로 경지가 될 수는 없다. 인간 감정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공자는 시경(詩經)을 통해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나타내길 가르쳤다. 공자가 만년에 특히 시를 중요시 했는데 이는 시가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우려낸 것이라 믿었으며 사물의 인식을 잘 깨우치고 감정을 나타내는데 중요한 방법이라 느낀 것이다. 그래서 아들 백어(伯魚)에게는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시 공부를 권했다. 오늘날, 예술을 모르면 담벼락 앞에서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며 그만큼 문화와 예술은 삶의 중요한 일부이다. 하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지역토양과 어우러지고 그곳의 해충, 균과 싸우며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 꽃이고, 내일을 향한 희망을 씨앗으로 만들어 낸다. 늘 좋고 편안함을 준다고 씨앗이 씨앗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문화의 씨앗도 발아를 하려면 다양한 협력과 양분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언어는 사람 간의 직접소통에 중요한 요소다. 직접적 소통은 사람의 표정, 말투, 몸짓 등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언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동일 문화권에 사용되는 언어는 문화적 동질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본 조건이 된다. 소규모 지역도 지역마다 특유의 언어 표현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지역화가 되어 지역 방언으로 기능을 하게 되고 사투리 사용으로 지역민 간 유대감이 강해진다. 동일한 언어는 감정적 유대감의 기초이며 특유의 언어 표현법은 유대감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다. 일정 지역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언어는, 지역의 물리적 공간에 대한 유대감을 나타내며 감정 공유와 문화 동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직접소통과 다른 간접소통에서는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은 그 지역 언어를 바탕으로 음을 기록하는 것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아이가 처음 음을 내는 방법은 가장 소리를 쉽게 내는 방법인데 입술을 움직이며 숨을 뱉는 행위를 통해 처음의 언어가 나오게 된다. 그러다 점차 다양한 언어를 하게 된다. 오랜 시간 이런 소리를 정리하게 되고 개, 돼지와 같은 동물들을 부르는 동일한 언어로 정리하게 되며 이를 기록하게 된다. 글로 정리를 하면 개, 돼지와 같은 단순한 사물에 대한 것도 있으나 또 다른 내용적 비약으로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비유로 사용하거나 미련한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며 기록도 하게 된다. 이렇게 기록을 한다는 것은 언어의 발전과 음을 표현하는 기술적 발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1443년(세종 25년) 음력 12월에 28자로 구성된 한글이 창제되었다. 처음으로 우리 글을 고안하고 만들어 제정한 것이다. 그리고 3년 뒤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문자체계를 반포했다.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5만 원권이 나오기 이전, 한국 화폐의 가장 큰 단위를 상징하던 1만 원권에 세종대왕과 한글은 등장했다. 지폐의 금액 만큼이나 한국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한글을 만든 이유와 목적은 훈민정음 서문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훈민정음 서문은 매년 수험생이 한글 창제의 뜻을 외우고 외워야 할 만큼 입시에도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였다. 우리 뜻을 우리 말로 말하고 우리 글로 전하며 소통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 한글 창제의 목적이었다. 훈민정음 서문에는 '나랏말ㅆ미 中國에 달아~'라는 말이 나온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무 생각없이 학력고사에 나온다니 외웠고 듕궉(中國)은 당연히 현재의 중국이라 막연한 생각을 했다. '중국이 쓰던 한자를 백성이 어려워 사용을 못하니 보다.'라며 쉽게 한글을 만들어 주었구나 하는 수험생다운 생각했다. 비슷하긴 하지만 중국이란 국호는 1912년 신해혁명 이 전에는 특별한 국가를 부르는 명칭이 아니었고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그 이전의 나라에서도 별로 사용된 적이 없다고 한다. 중국이라는 것은 특정 국가가 아닌 한자 문화권, 멀리는 베트남에서 만주까지 넓게 볼 수 있는, 한자를 사용하고 한자로 기록하던 국가를 두루 부르던 말이었다. 그러므로 서문의 듕궉(中國)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던 것은 그 한자 문화권을 벗어나고 독자적 문화권을 만들려는 의지 없이는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은 과거처럼 가난하거나 힘이 없는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주위 국가들의 힘이 너무 세다. 한국은 한글이라는 독자적인 문화형성의 근간이 되는 언어의 기록법을 가지고 있다. 1443년부터, 아니면 그보다도 일찍이 독자적 자립 문화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독자적이며 자립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중요성 못지않게 우리라는 공동체적 문화형성이 중요하다. 그러면 주위가 아무리 강국이라도 훌륭히 이겨낼 것이다. 일본 스스로 말하던 '형님 나라는 일본!'이라는 이상한 소리도 안 듣게 될 것이다.
농사가 주된 산업이었던 과거 한국은, 풍년이 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가의 일 중에 하나였다. 오늘은 스마트 폰으로 날씨를 찾아보고 일기를 예측할 수 있으나, 과거는 몸으로 계절을 느끼며 선조의 경험에 의존하며 농사를 지었다. culture라는 언어도 경작이나 재배 등을 뜻하는 라틴어 'cultus'에서 유래했을 만큼 문화의 원형 속에는 '경작하다'라는 뜻이 숨어있다. 그만큼 인류가 진화하고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착과 경작이 중요한 문제였다. 원래 있었던 자연 상태를 인간의 의지로 일정한 자연 변화를 이끌어야 문화가 형성된다. 지역에 오랫동안 자리했으면 인근 지역과 다른 문화가 형성되는데 이는 기후와 지형 등에 따라 각기 차이의 특색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한곳에서 많이 정착해 살게 될 때에는 그 인원에 필요한 생존적 뒷받침도 있어야 한다. 식량 문제가 그것인데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치자는 늘 고민을 해야 했다.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에는 사적 제436호 선농단이 있다. 한국에서, 선농(先農)에 대한 기록은 신라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고려시대 성종2년에 왕이 직접 밭을 갈고 신농에게 제사하고 후직을 배향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농(神農)은 고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삼황 중 2번째의 황제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처럼 얼굴은 소이고 몸은 인간으로 기원전 28세기 중국에서 신농은 태어났다. 마차와 쟁기를 만들었고 소와 말을 길들여 멍에로 일을 시켰다. 농사 만이 아니라 약초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365종의 약초에 대한 목록을 정리해 식물의학의 기초를 만들기도 했다. 3일 만에 말을 하고 1주일이 되기도 전에 걸었고 3살이 되자 들로 나가 쟁기질을 했단다. 그리하여 그는 농사를 짓는 신으로 추앙을 받았고 그 전설이 다시 고대 한국으로 전파 됐다. 선농단에는 신농만을 모신 것은 아니다. 주나라 왕인 희씨의 조상인 후직(后稷) 역시 농사의 신으로 제사를 지낸다. 후직 역시 일반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고 '사기' 주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곡의 정식 부인인 '강원'이 들에 나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자 임신해 아이를 낳게 되고 불행하게 여겨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밟지 않으며 피해 걷고, 얼음 위에 버리니 새들이 날아들어 아이를 따뜻하게 보호해주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다시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 후직은 자라면서 농경을 좋아해 농업을 관장하는 관리로 활동했다. 이후 주나라의 왕들이 후직에게 제물을 바치며 자신의 조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농업은 중요한 생존과 밀접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도 국가 통치를 위해 농사의 중요성과 정통성에 대해 중국의 신화를 이용했다. 그리고 왕 역시도 겸손하게 농사 신을 모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475년 (성종6년) 관경대(觀耕臺)를 선농단의 남쪽 10보 밖에 쌓고 왕이 친히 선농단에 제사하고 밭을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1475년 이전에 제기동의 선농단이 만들어졌으며 농사의 중요도로 본다면 조선 건국년인 1392년에 지어졌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선농단 입구에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있다. 선농단의 수명과 같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600년 정도 된 향나무는 선농단의 제사 때 사용하기 위한 향나무일 것이다. 실제로 나무가 제사를 위해 향불이 되었는지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을리 없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사람이 있을 수 없고, 나뭇가지를 잘랐다는 시시콜콜한 기록도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니 아무도 모를 일이다. 선농단 나무가 말해주는 것은 문화유지에는 생존이 중요하다는 점을 오랫동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존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없다면 생존도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는 또 다른 종이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땅을 파면 뭔가가 나온다. 가치가 있는 것도 나올 수 있지만 있으나 없으나 할만한 것도 나온다. 그럴때는 오히려 땅을 파던 수고스러움에 대한 보상을 떠나, 물건의 나중 처리를 걱정해야 할 일도 있다. 농업 중심의 조선은, 땅 특히 평평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좋은 땅이었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부동산 신화는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 땅속에는 수많은 역사도 함께 품고 있다. 한일합방 이후 어리숙한 조선인들은 자신의 땅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체 일본인들이 땅을 소유하는 것을 구경만 했다. 1900년대 초 조선 땅은 일본인들에게는 재산증식의 손쉬운 투자처였을 것이다. 1910년 일제는,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근대적 토지 소유 관계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소유권, 가격, 측량을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숨은 비책이 있었는데 토지세를 안정적으로 걷어 식민통치자금으로 운영하려는 것과 소유자의 불확실성을 이용해 토지를 가로채려는 방법이었다. 이 가로채기로 습득한 주인 없던 땅은 국유지로 편성했고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과 일본기업의 땅으로 헐값에 주게 됐다. 지주가 불명확했던 소작 농민들의 땅은 토지조사사업 중 경작권을 빼앗겼다. 자신 경작지를 인정도 받지 못하며 땅을 빼앗겼고 조사사업 이후 인근의 대지주에 경작지로 편입되거나 하여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고 몸으로 날품을 파는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야 했다. 글과 서류가 불명확해 생기는 일로 당시의 문맹률만큼 억울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대대로 농사를 지었거나 하더라도 몇몇이 짜고 누구의 땅이라고 하면 서류가 없고 글을 모르면 쉽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으로 일본인들은 급하게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동안 자신 땅으로 살았던 사람들도 해방은 큰 사건이었으므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급하게 가야했다. 그렇게 급하게 가다 보니 처분을 미처 못했던 적산가옥이나 농경지는 다시 국유지로 됐고 그런 국유지는 다시 처세에 뛰어난 사람들이 독식하게 됐다. 어리숙하게 살았고 모든 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억울할 틈도 없었던 식민지배 하의 한민족은 늘 궁핍했다. 그렇지만 해방 이전에도 늘 불행한 사건만이 있지는 않았다. 1936년 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서 일본 대표로 한국인 선수를 보낸다는 것은 일본 정부로써도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파견 마라톤 선수 선발전을 일본 선수들이 유리하도록 조작해놓고 선발전을 치렀다. 그럼에도 선발전은 한국인 남승룡 1위, 손기정 2위로 입상하게 되고 결국 올림픽 일본 대표로 참가하게 됐다. 그리고 두 선수는 올림픽에서 우승과 3위를 기록하며 두 명 모두 단상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모든 신문은 아침 호외로 올림픽 금메달을 알렸다. 작가 심훈은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1일호에 이렇게 칭송하는 헌시를 남긴다. 오, 조선의 남아여! ―심훈 마라손에 우승한 손, 남 양군에게 …(중략)…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어잡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하여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이렇게 글을 쓴 것을 보니 심훈 역시 이 사건이 개인의 영광을 넘어서는 민족의 공통된 가치를 생각하며 썼던 시이며 마라톤을 뛰었던 그들도 개인의 영달이 목표가 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됐다. 식민지배로 스스로 약자로 생각하던 한민족을 이번 일로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는 울분의 표현이었다. 땅은 이렇게 우리가 밟고 사는 것이지만 이전 이전의 또 다른 이전에는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누적된 것이있다. 그리고 그 땅을 통해 우리는 동질감을 느끼는 그런 동물인듯하다.
여러 해 동안 살아있는, 마르지 않고 살아있는 식물이 나무이다. 뿌리, 줄기, 잎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뿌리에서 흙 속의 양분이나 수분을 흡수하고 줄기를 통해 나무 곳곳으로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공급한다. 햇빛을 이용하여 탄수화물과 같은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겨울이 끝나갈 때 쯤 나무의 이런 작용을 이용해 수액 채취로 봄의 시작도 된다. 통일신라시대 풍수학에 능통했다는 도선국사가 나무 수액을 받아먹고 굳어진 무릎을 고친 일이 있었다. 광양의 옥룡사에서 오랜 시간 참선을 하다가 굳어진 무릎이 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무리해서 옆 나뭇가지를 잡고 일어서다 그만 나뭇가지를 부러트리게 되었다. 부러진 나무가지에서 수액이 나오는 것을 보고 갑자기 목이 말랐는지 모를일이지만 그 수액을 먹게 되었다. 그러자 굳어진 무릎이 다시 펴지게 되어 무릎을 고치게 되었다는 믿기 힘든 요약본의 전설이 생겨났다. 이나무를 골리수(骨利水) 뼈를 이롭게 한다는 나무의 이름을 갖게 된다. 현재 고로쇠나무의 이름이기도 하다. 단풍나무과이며 9월이 되면 프로펠러처럼 생긴 열매가 빙글 돌며 떨어지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나무와 관계있는 사건 중, 여러 우연이 겹치고 결과까지 급하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카더라' 하는 이야기는 이 마을 저 마을로 옮겨가며 눈덩이처럼 살이 덧붙이며 전설이 되어간다. 나무와 관계된 전설은 사람보다 오래 살고 한자리에서 이야기를 받아 주다 보니, 오래된 나무는 당연히 오래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나무의 직접적 효능과 같은 1차원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그 나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역사와 연결시키면 더 풍성한 전설을 만든다. 꼭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에 근거하여 실감 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는 870년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나무는 애국나무로 불리기도 하는데,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 자기 스스로 가지를 태워 알려준다고 한다. 많이 듣던 소리기는 하지만 동상 혹은 비석에서 땀이나 눈물을 쏟는 것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다. 최근 가지 태운 일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1년 전에 불이나 진화되었다고 하는데 하루나 1주일도 아니고 1년 전에 예언했다는 것은 믿기는 어렵다. 그래도 이나무는 많은 사람이 믿는다기보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을 더 좋아하여 전설을 만들어 가고있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돋아난 부리를 잘라서 가지고 있으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신묘한 나무로 소문이 나있다. 홍릉근린공원에 있는 영휘원은 고종황제 후비인 엄씨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순헌황귀비 엄씨는 영친왕의 친모이다. 엄귀비는 양정의숙, 진명여학교,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며 근대 여성교육에 기여를 하였다. 이곳 엄귀비의 무덤은 돌아가신 후에 조성된 곳이니 이곳의 자연물과는 별반 관계가 없으나 이곳에 있는 산사나무는 160년이 된 나무로 나름 조선 마지막 역사가 함께 정리되어있다. 그런 역사를 뒤로하고 최근에 가보니 나무는 고사되어 있었다. 주변에 후계목 여러 그루가 잡초 마냥 가득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역사는 오래되기도 다시 시작되기도 하며 전설을 만들어 낸다. 산사나무는 고대 희랍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봄의 여신에게 갖다 바치는 나무이다. 로마에서도 꽃의 여신에게 헌화하였다고 한다. 이런 풍습이 아직 남아 영국에서는 5월 1일이면 산사나무 꽃다발을 문에 매다는 전통이 있다. 1890년 근대 노동운동으로 노동절이 5월 1일이 되자 자연스레 이 문화가 혼합되어 산사나무꽃은 노동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고 5월의 꽃이라는 메이플라워(Mayflower)라는 영어로 된 나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시간과 상황은 대상을 새롭게 해석되게 하고 새로운 해석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변하기도 한다. 나무는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지만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이야기와 혼합되어 전설을 품는다. 이야기를 지어 나르는 사람으로 인해 나무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나무가 가진 신통한 기능도, 오랜 나이로 전설을 만드는 것도 나무는 사람과 소통을 통해 만들어진다. 사람의 전설도 누군가의 칭송이 더 해질 때 긍정적 전설이 만들어질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늘 좋은 이야기를 해야 사회가 보다긍정적 사람이 많아지겠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이 결정됐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은 멀고, 남고, 굽고, 꺽여있다는 말로 매우 복잡한 사연이 많다는 말이다. 특히 이번 대선처럼, 후보자의 이해하기 어렵고 허점도 많은 엎치락 뒤치락 거린 대선을 한마디로 요약하기 적당한 말인 듯 하다. 많은 도덕적 문제가 제시됐고 다 해결하지 못하고 대선이 끝나게 됐는데 이후 불거진 문제를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도 어렵고 다시 끄집어내 밝히기도 어렵게 된 듯하다. 도덕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범죄의 상황으로 비쳐지던 여러 의혹들이 그냥 없었던 일로 돼서는 안 될 것이지만, 아무렇지 않았던 일로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 유권자들은 이런 의혹을 통해 눈과 귀가 어둡게 막혔고 정확한 투표를 했는지 확인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범죄 내용 말고는 도덕적인 비난은 정리해야 할 것이다. 서로를 비난하던 기백은 이제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주는 모습으로 바뀌며 국민 통합을 이끌면 좋겠다. 5년마다 하는 대통령 선거는 나의 우월함보다 상대방의 치부를 밝히는데 애를 쓴다. 남의 치부를 듣고 싶지 않아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알리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사실처럼 인식된다. 상황조작을 통해 대중의 심리 상황을 원하는 대로 조작하게 하는 방법은 대중에 대한 정서적 학대다. 이런 학대를 5년마다 경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상대에 대한 나쁜 인식은 큰 효과가 있고 효과에 대한 지속력도 상당하다. 18년 전, 젊은 사람에게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노인들은 투표는 안해도 된다는 인터뷰를 했던 정동영 의원은 말실수로 오랜 시간 기억에서 지원지지 않는 사건을 만들었다. 본 취지는 미래는 청년들의 시대니 노인들의 투표보다 젊은이들의 투표가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으나 다른 정당에서는 이것을 이용해 노인 폄하로 몰았고 아직까지도 이 발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정치인이 됐다. 나쁜말은 효과적이다. 특히 대결을 통해 하나를 선택 해야하는 상황에서는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게 되려면 깨어있는 지각이 있어야 되고 그런 자각이 있어야 현혹되지 않는다. 정치가 이렇게 벼랑에서 대결하는 것처럼 하는 이유는 승리자에 대한 권한이 많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대통령은 일정 지역을 다스리던 통령(統領)에서 온 말로, 1919년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처음 대통령이란 명칭을 쓰게 되었다. 대통령은 공화국가에서 국가의 일을 담당하는 최고책임자다. 그만큼 일도 많으나 거기에 걸맞는 책임도 따른다. 대통령 근처에서 무언가 본 일이 없어서 알 수는 없으나 대통령은 일이 많다고 한다. 한국의 유능한 학자들과 고위 행정가들이 늘 대통령을 보좌해주며 행정 업무를 협업하는데 이들을 통해 대통령은 다양한 업무에 대해 공부도 하며 행정을 이끈다. 그렇기에 대통령은 자신이 하려는 것을 고집하기도 어렵겠지만 그리 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한국은 과거와 달리 국제 사회에서의 책임이 많아졌다. 세계가 함께 가려는 방향을 한국 정치나 자신이 속한 이념과 다르다고 맘대로 파기하고 자신의 주장을 하기 어려운 국가다. 특히 환경에 대한 문제는 정치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인류가 해결해야 하는 공통의 과제이다. 한국은 이런 과제를 앞장서서 해결해야 하는 국가가 되었고 책임을 져야 하는 국가이다. 새로운 대통령은 자신이 주장한 선거 공약을 지켜야겠지만 올바른 공약이었는지 한국 뿐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지구를 위한 공약인지 인식하고 수정해햐 할 것이다. 국민에게 약속한 공약 말고도 개인적으로 남발한 여러 공약이 존재 할 텐데 이젠 신중히 생각하며 5년을 해결해 나가길 바란다.
무료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보내려면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 쉽게 주위 도움을 받는 방법이 핸드폰을 보거나 TV를 시청하는 일이다. 그러나 대다수 방송을 보면, 어떤 정보를 수용만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전해주는 정보가 나에게 유익하다면 상관이 없으나 별로 알 필요도 없는 정보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에는 뭔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다수의 방송은 시청자 관심을 끌 방송으로 편성된다. 그런 관심 끌기는 방송과 나와의 교집합적 관계 설정이 있어야 관심을 오래 끌 수 있다. 그럴 수 없다면 단편적 이야기로 한 회에 걸쳐 정보를 전달하며 더 이상 관심 유지가 어렵다. 채널을 돌리면 나오는 수많았던, 한 회로 끝날줄 알았던 내용의 재방송을 보면서 왜 그 정보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싶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수의 관심을 맞추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인가? 그러나 불행이도 방송은 그리 다양하지 않으며 몇몇 인기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무한 복사가 되어 방송국마다 이름만 바꾸어가며 계속 재생 중이다. 유독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내용, 곳곳을 돌아다니며 음식 먹어보는, 무조건 맛있다는 맛집 음식을 보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많다는 것에도 놀라지만 방송인들의 무조건 맛있다는 표현의 방법을 시청자가 의심 없이 오랫동안 믿으라는 방송을 보기 거북하다. 특히 반복적으로 게걸스럽게 과도한 음식 섭취의 모습을 시청자들은 왜 좋아할까? 보다 원초적 본능의 즐거움이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삶의 이치를 보여주려는 방송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렇다면 본능을 극복하고 본능을 역행하는 것이 보다 인간적인 삶일까? 본능을 거부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만족을 생각하는 것은 생존의 위기를 넘어설 때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없겠지만 적어도 배고픔이라는 생존의 위기를 극복한 다음 음식 맛을 음미하게 될 것이다. 원초적 자극에 만족감 혹은 대리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개인의 만족을 넘어서는 공동의 만족에 대한 자각 없이는 닿을 수 없는 경지이다. 오늘날 방송에서 수없이 많은 먹방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어떤 대리 만족을 시청자들에게 주려는 것일까? 이미 사회에 생존의 위기가 끝났으니 음식을 음미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방송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소란스럽게 먹어대는 패널의 섭취모습이 생활 모습보다는 생존에 더 가까운 모습이라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방송 중간중간 아프리카 어려운 난민의 생활을 보여주고 국경 없이 서로 나눌 수 있는 기부의 방법을 알려주는 광고가 나오다가 다시 게걸스럽게 먹는 방송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 불합리가 가득하며 진행되는 사회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류가 이렇게 몸에 영양소를 과하게 채운 적이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인류의 대다수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음식을 통한 과도한 식생의 모습은 과거 비참했던 자신과 조상들을 위로하며 스스로 만족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현실을 넘어서는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 생각을 판단하고 그것이 맞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한 단계 더 지적인 성숙을 이루어 낸다. 방송을 보고 그냥 따르는 것이아니라 자신의 지적 성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정하고 분석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이처럼 단순 반복되는 원초적 방송이 조금 나아 질 것이다.
도시의 생명은 물과 함께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살려면 많은 물이 있어야 하고 소수의 사람이 산다면 졸졸 흐르는 개울이라도 충분하다. 흐르는 물이 없다면 구덩이를 파서 만든 우물로도 가능하다. 그래도 흐르는 물보다 좋은 생존 환경은 없을듯하다. 청주는 무심천이 청주의 생존을 책임졌다. 이름을 무심천이지만 다른 발산천, 율량천, 명암천, 미평천, 영운천, 백운천, 월운천, 효촌천, 한계천 등 이름 모를 천들과 복개돼 위치를 알기 어려운 도심 아래의 천까지 다양한 물이 더해져 무심천이 됐다. 무심천의 길이는 약 34㎞나 되고 금강의 지류 중 2번으로 분류될 만큼 대접을 받는 천이다. 예전엔 인근의 평야보다 천이 높아 청주 시내에 자주 수해를 끼쳤고 정비를 통해 지금처럼 천이 낮아졌다. 그러다 보니 천과 연결된 옛 건축물들이나 주택들은 새로운 도시정비에 따라 도시를 들어 올리다 보니 많은 문화재가 매몰되거나 사라졌다. 대표적인 것이 육거리 시장 아래에 묻혀있는 남석교이고, 중앙 공원 근처에 있는 우물들이 과거의 도시 높이를 말해준다. 남석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돌다리로 아직 명성이 남아 있다. 남석교는 신라 박혁거세의 건국과 같은 기원전 57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신라 시대부터 있었던 다리로 구전된 것으로 보인다. 건립에 대한 다양한 설이 있으나, 역사기록을 근거로 짜맞춰 본다면 다리의 교두에 세워져 있던 '고려견' 조각상의 모습으로 고려 시대의 다리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있었던 '고려견'은 매몰 전 총 4개로 1개는 도지사의 관사에, 충북대학교박물관에 1개가 있고 2개는 청주대학교 내의 용암사에 옮겨져 있다. 무심천은 인근의 다양한 천이 모여 이루어진 천이고 이런 천 역시 인근 지역의 다양한 전설을 가지고 또다시 무심천으로 모여 있다. 그것과 다른 전설의 문의면은 구석기 유적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보인다.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인근에 많은 주거지가 있었고 매장에 특이한 풍속을 겸하는 경우로 보아 문화의 형성도 있을 만큼 문의 지역은 다른 곳과 달리 더 빠른 문화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의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흥수 아이는 꽃을 뿌려 죽음을 애도했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구석기 시대에도 장례의 문화가 있었고 이는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다. 이름이 흥수 아이라 좀 이상했다. 아이 이름이 새겨진 글도 없었을 텐데……. 원래 이곳은 채석장을 하던 김흥수 사장이 발견하고 역사적 유적이 되도록 본인 손해를 감수했다. 그래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우리나라 1호로 사람 이름을 유적에 정하게 된다. 그래서 구석기 유적 이름이 흥수가 된다. 우리지역에 재미있는 문의의 문화 고전이다. 현재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고 과거 문의는 지금 대청호안에 잠들어있다. 수장돼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가 본 적 없는 물 안에 현재 문의보다는 넓은 벌판 속 문의가 있다. 과거 문의에서 배를 타면 강경포구까지도 뱃길이 있었고 이 뱃길로 소금이 들어오고 곡물도 날랐다고 한다. 청주 그리고 문의는 늘 교통과 소통의 오랜 중심지였다. 청주와 문의가 오래되었다고 반드시 좋은 것이 될 리는 없다. 때 묻은 시간을 좋아해 주고 상상하는 힘이 있어야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 된다. 옛날을 생각하려면 옛 마을 어귀에 가봐야 한다. 그곳에서는 좀 더 직접적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때 묻은 모든 시간도 좋아진다.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이 청주, 문의가 되었으면 좋겠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집에 차가 있으면 부의 상징이었고, 자랑거리는 자연스레 사람들을 자동차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자동차라도 보기 드문 자동차라면 자동차와 기념 촬영을 하려 차 주변으로 슬금슬금 모이곤 했다. 자동차는 과학이 만들어낸 대단한 소비품으로 도로 발달을 촉진 시켰고 물량, 유통, 산업의 급속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동차는 지난 1769년 프랑스의 군사학자 니콜라스 조셉 퀴뇨(Nicolas-Joseph Cugnot, 1725~1804)에 의해 만들어 졌다. 바퀴가 3개로 구성된 증기 트랙터이며 대포를 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을 통한 증기로 움직이는 구조였기 때문에 증기 생산을 위한 물을 15분마다 보충하며 운행해야 했고 핸들을 꺾거나 제동하는 것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미완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 기술은 개인이 조작 가능한 새로운 방법으로 계속 시도되고 발전되었다. 증기차는 나왔으나 큰 덩치로 인해 개인이 사용하기 적합지 않자 영국의 로버트 앤더슨 (Robert Anderson)은 1832년 최초의 전기차를 개발했다. 1859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가스통 플란테 (Gaston Plante)가 운송수단에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충전식 납축전지를 발명하면서 전기 동력원 개발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아직 기술적 완성이 되지 못해 아주 짧은 거리운행이 가능했고 그런 기술적 문제는 전기차를 역사 뒤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보다 쉽게 사용 편안한 자동차의 엔진은 1885년 독일의 다임러에 의해 발명된다. 전기나 증기의 사용 불편을 없애고 오늘날의 자동차처럼 석유엔진 힘으로 움직이는 간편한 자동차가 발명된 것이다. 나무 마차와 같이 만들어진 자동차는 매우 불편했지만 가격이 아주 비쌌다. 비싼 이유는 모든 공정이 수공정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비쌌지만 바퀴는 마차와 같이 나무로 된 수레바퀴와 기타 편의 장치도 거의 없는 가고 멈추는 기능뿐인 단순 구조였다.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았으므로 말이 없다 뿐이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엔진 폭발음으로 아주 요란한 자동차였다. 그래도 이 신기술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기계가 되었다. 점점 대량 생산의 모습을 갖추어가며 획기적 가격 변화로 대중 이용이 가능하게 되었고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는 하나의 상품이었다. 오늘의 자동차는 이런 수많은 시행착오와 기술의 진보가 만들어낸 걸작물이다. 자동차의 핵심기술은 엔진이다. 사람으로 치면 심장과 같은 곳이라며 중요성을 강조 하지만 그 중요한 것은 쉽게 만들거나 따라 하기 어렵다. 전세계적으로도 자동차 엔진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손에 꼽을 만큼 까다로운 기술이다. 엔진은 200년이나된 자동차 기술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기술이기에 후발 기업, 국가에서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현재 한국의 자동차 기술은 서구 자동차 기술의 역사를 완전히 넘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술진보를 불과 50년 만에 이룬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오히려 더 훌륭한 자동차를 만들고 기술을 흉내 내거나 남을 쫓아가는 것이 아닌 새로움을 제시한다. 이제 한국은 남이 가던 길을 빠르게 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물을 데워 증기로 가던 자동차와 석탄 석유를 태워 만드는 자동차 엔진을 이젠 새로운 방법으로 움직이게 한다. 축전지의 기술개발로 포기했던 전기차가 실현 가능하게 되었고 한국은 세계최초로 수소연료 전지차도 만들었다. 새로움은 한탄만 한다고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꿈이 있고 노력을 하면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편안함에 취해 오늘을 보내면 내일의 희망은 안 올지도 모른다. 한국의 자동차는 누구나 안 될 것이라 믿었던 것을 극복해낸 한국인의 긍지가 아닐까?
현대화는 우리에게 알지 않아도 되는 다양한 정보를 계속 주입시켜 현실에 정주하는 것이 뒤처지는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만들어 낸다. 대도시에서는 현대의 과잉정보와 현실이 아침이면 매번 새롭게 시작된다. 과거 도시에 있는 동물원 시간과 도시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같은 시간이 흐르는 지구의 공간이며, 거의 동일 공간에 속하는 지역에 있으나 뛰다시피 하는 판교 사람의 도보 속도와 과천에서 되새김질하는 먼 아프리카에서 온 동물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의 극명한 시간, 공간의 차이를 느꼈다. 생물적 행동하는 방식의 차이로만 모든 시간 개념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당시에 생각했던 것 같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처럼, 사람들끼리도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시간에 대한 각자의 다름이 있었다. 그런 다른 가치와 시간 개념이 하나로 합쳐졌던 신기한 경험이 있었다. 1988년 올림픽 당시 코리아 타임이 존재했었고 이를 극복하려 외국인의 시선을 가지고 국민계몽적 공익광고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는 30분 정도 부정확한 것이 코리아 타임이었고, 국밥 등을 줄 때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담가 주는 문화도 있었으며, 찌개에 밥 먹던 숟가락을 쓱 밀어 다 같이 찌개를 떠먹던 것이 한국의 식문화였다. 그러나 1988년 올림픽 이후로 우린 국제화에 관한 보편규정을 생각하게 됐고 의심 없이 따랐다. 따르지 않으면 뭔가 야만인이 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난 이때부터 지역과 도시에 대한 격차도 걷잡기 어렵게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화를 되새김질하는 입장의 예술가로서는 분명 나쁜 일이며 사람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했다. 도시와 지역의 간극은 이렇게 새롭기도 했지만 서로를 멀게 만들기도 했다. 그 후, 벌어진 간극은 지역도 도시화가 되면서 서로 강요적 문화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내가 원한 적이 없던 '지구촌은 한 가족'이라는 주제는 이데올로기(집단 신념) 문화적 산물이다. 지구촌의 관점으로 모든 것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되면, 지역에서 예술가가 바라보는 것이 곧 세계라는 모호한 논리는 비논리로 결론된다. 중앙의 한가지 관점에서 지역의 관점이 멀 확률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적 획일 시각의 이데올로기는 도시를 떠나 점차 지역으로 확산, 전파되고 지역 문화예술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유행과 같은 지구촌의 관점은 어떤 것도 이해하려는 상황이 아닌 그냥 문화식민적 사고로써 지역이 따라야 하는 일로 대한다. 예술가는 각자 의견의 관점이 있고 그것이 꼭 세계적일 필요가 없는 경우도 많다. 일부 문화식민적 사고는 무조건이라는 절대 잣대를 대고 지역의 결과가 세련과 촌스러움으로 결정짓는 우를 범한다. 그렇기에 예술표현은 각자 지역에서 지역에 맞게 진화되더라도 결정을 지을 필요없이 오랫동안 꾸준히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이런 방법이 문화식민적 관점을 극복하는 시도가 되고 지역 정체성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충주에서 10월에 시작하는 이번 3인전에서는, 지역에서 각자의 사실주의와 휴머니즘에 대한 작가 관심이 바탕을 이루어 전시하고 있다. 휴머니즘과 사실주의는 작가의 예술적 희망, 신념과 일상의 행복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충주에서 활동하는 3인의 작가들이 그간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이것들이 모여 하나, 하나 지역 시선으로 만들어지길 바란다. 3명의 작품이 시처럼 나열되어있고 내용 역시 관람객에게 친절히 설명되기 어렵지만 그려진 대상물과 작가들이 이곳 충주에서 어려운 인내의 시간을 가지고 생존하며,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담담히 보여 주려 한 것이다. 그 대상이 미동조차 없는 멈춘 풍경이라도 분명 살아있던 어느 순간의 기록이다. 누구는 대상으로 접근하는 과정이었고 어릴 적 보아온 장소의 재현이나 멈춘 시간을 그린 것과 같은 각자의 방법이지만 같은 주제로 전시를 바라봐야 할 이유는 없다. 그건 3인의 사색 방법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미술의 거장이라도 예술가의 작품은 늘 과정이다. 그런 과정의 시간이 충주에서 충주에 맞도록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감염병 예방을 위해 균을 인위적으로 우리 몸에 투여하여 그 미생물에 저항가능하도록 항체를 만들어 내는 행위가 백신이다. 1798년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천연두에 대해 영구적 예방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직접 바이러스를 접종한 것이 시초이다. 백신(Vaccine)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젖소(Vaccinus)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번 우두를 이용한 균을 접종을 받으면, 환자 몸에서 우두에 면역이 있는 항체를 개발하는데, 그 항체가 천연두 바이러스에 대하여도 똑같은 면역을 가진다. 천연두 예방 접종의 발견은 1980년에 세계보건기구에서, 천연두가 전 세계적 예방 접종으로 몰아낸 최초의 감염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한 획기적 발견이었다. 천연두를 이겨내면서 다양한 병이 생겼을때 이와 같은 항체를 생겨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몸에 주입시키며 다양한 백신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런 백신을 통해 병의 대유행을 막아내며 인류는 생존해 왔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혼란을 겪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백신을 통한 예방이라는 것은 이미 정설로 되어가고 있다. 임상실험을 통해 백신은 효과적인지에 대한 객관적 실험으로 결과를 만들고 설명을 하지만 과학과 다른 해석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부류의 사람 때문에 더 큰 불안이 되고 있다. 국방비를 천조나 쓴다는, 세계경제를 이끄는 미국에서도 이런 백신에 대한 거의 광신도적인 미국의 상황이 먼 나라 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백신 접종을 비과학을 떠나 미신을 믿는 것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논리로 반 백신운동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본다. 과거 조선 궁궐에 역병이 돌자 궁궐 내부 담 아래에 구덩이를 파놓아 역병이 담을 넘다가 빠지게 했다 하는데 그와 유사한 논리로 백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수준이다. 앞서 말한 백신은 면역을 자체적으로 획득하고자 외부물질을 주입하는 것으로 우리 몸은 침입한 외부 물질과 싸우기위한 항체를 만들게 유도하는 것이다. 화이자와 모더나의 백신은 mRNA, 메신저 RNA를 이용하는 백신이다. RNA 바이러스가 가진 단백질을 인체에 주입시키고 인체 내에서 합성한다면 면역세포가 이를 인식해 항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인체에 들어온 균에 몸이 반응을 하면 면역세포B를 자극하고 활성화 시킨다고 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다양한 백신의 성분은 다르지만 인체에 주입하는 균은 항원단백질, 약화된 바이러스, 사멸된 바이러스 등을 주입하여 백혈구의 역할을 하는 림프구인 B세포를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이 B세포가 활성화가 되면 바이러스를 제거할 수 있는 중화항체를 만들게 되고 호흡기를 통해 들어온 바이러스를 직접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아직까진 우리 인류가 코로나를 이겨내기 위한 연구의 결과이다. 가장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까지는 코로나19의 전파력을 억제하며 통제하기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서서히 코로나와 함께 살기 위한 준비를 각 나라별로 시도하고 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한 노력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근거 없는 자신이 만든 허상을 공유하며 무논리로 오늘의 이야기와 내일의 이야기가 계속 변하는 혼란을 제기하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방해만을 한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사람이 아닌, 중화항체와 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연일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새롭지 않은 인물들이 대권에 도전하고 있다. 과거 어떠한 일로 새로운 인생을 잘 해결하고 있었다며 주장하지는 않고, 세상이 잘못 가고 있으니 내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제일 잘 나가!'라는 철 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공허하게 들리지만 본인은 2절까지도 부를 수 있듯이 힘차게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연기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 스스로가 제일 찔리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몇 번 해보면 양심적 인내의 기술이 늘듯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주장을 꺼리낌 없이 해댄다. 과장된 몸짓으로 세상의 모든 애환을 담아내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트롯가수를 보는듯하다. 본질은 어디에 있으며 나 또한 무엇을 하는지 유체 분리 해탈의 경계를 보여주는 듯 사뭇 웅장하기까지 하다. 그러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부끄럽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지지하며 열광한다. 대중은 정말 이런 정치인들이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느껴지지 않는 내가 이상한 것일까? 정치인들처럼 주장을 펼치려면 충분한 자기 확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과도한 자기 확신은 정신분석학에서 나르시시즘(narcissism)으로 분류한다. 누구나 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지만 욕망이 자신에게로만 향해진 상태는 하나의 인격장애로 분류한다.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해하려는 행위로 문제를 확장 시키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와 같고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는 대상만을 선호하며 그것도 어려우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인들 뿐만이 아니라 추종하는 사람들도 유사한 오류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Narkissos)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아름다운 남자였던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오래 살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잘살고 있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에코라는 이름의 요정이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청을 거절했다. 이 행위는 신의 노여움을 받게 되었고, 저주로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습을 갈구하며 사랑하던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그가 빠져 죽은 곳에서 그의 이름의 나르키소스(수선화)의 꽃이 피었다고 한다. 지나친 자기애는 앞을 못 보는 사회 부적응자로 남게 된다. 자기가 만든 무덤 속에 빠지게 되고 결국 헤어나지 못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 사회는 적당한 자기 소개능력과 외모를 갖추어야 한다. 모든 것을 갖추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균형을 맞추는 능력은 대단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나를 비난하는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면 대중은 우유부단하다고 무시하고, 나의 것을 관철하려는 모습을 보이면 고집세고 완고하다 비난받기 쉽다. 그렇기에 이러한 외부적 내용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를 갖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지나치지 않을 때가 어느 선일지는 모르나 상대방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은 정치인들이 갖추어야 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자신을 신뢰하고 내가 아는 나의 편은 무조건 선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정말 이상하며 위험한 일이다. 나를 강조하고 나를 주장하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외부적 모습만을 지나치게 다듬는 사람에게는 속에 숨어있는 본질인 타인의 미래를 생각하지 못한다. 나의 인생은 이렇게 준비하고 실행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쉽지만 남들은 어떤 인생을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해결하기는 어렵다. 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남을 사랑하기위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속에 빠져죽은 나르키소스와 같다. 더군다나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폐쇄적 마음으로 나만 잘났고 세상의 모든 일을 내가 해결할 것이라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
유산균이나 효모균이 식품을 먹을 수 있도록 부패를 시키면 발효라는 작용이 된다. 작은 생물 분해 활동으로 식품의 성분이 새롭게 합성되는 것으로 식품에는 이 작용으로 독특한 향과 맛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발효된 식품은 일반 식품보다 저장의 시간이 길어지게 된다. 발효는 인간에게 유용할 때 발효라는 칭호를 준다. 발효는 알코올, 젖산, 아세트산 등으로 나뉜다. 알코올 발효는 산소가 없을 때 생기며 효모가 포도당을 분해하여 에탄올이 생긴다. 이런 에탄올식의 발효가 아닌 단백질의 분해되어 효소가 나타나는 것을 젓갈이라 한다. 젓갈은 근육이나 내장의 단백질이 분해되어 아미노산까지 분해되고, 독특한 향과 맛이 나게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문왕조에서 젓갈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신라 신문왕이 왕비 김씨를 맞이할 때 폐백 품목에는 다양한 기술이 되는 품목이 있다. 이중 젓갈이 들어있다고 하니 당시에도 중요한 기록적 폐백의 음식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계절이 강조된 환경에서 저장 음식은 주요한 생존의 기본 조건이었을 것이다. 남과 다른 위치와 환경이 되어야 하는 귀족의 생활에서 음식으로 일반인과 차이를 나누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 일이었다. 그만큼 음식은 하나의 집안의 품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교통의 발달이 어려운 환경에서 해안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계절을 거스를 수 있는 음식 섭취는 절대 특권 의식을 보여줄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주요 폐백 품목에 젓갈이 위치한 것은 신라 왕비 김씨의 품격을 기술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기록이 더욱 풍성하였기에 소금에 절인 것뿐만이 아니라 술이나 기름, 누룩, 산초 등에 절인 것까지 다양한 절임법이 등장한다. 여기에 더해 소금과 엿기름, 찹쌀밥 등을 섞어 만든 식혜도 등장한다. 조선보다 이전의 음식 방법을 기록한 것들로 보이는데 이런 기록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옮겼거나 당시 시대 일반적 음식 만드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왕래가 요즘과 같지는 않았더라도 귀한 음식을 만드는 방법은 집안의 품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격식이었다. 특히 보도 못 한 음식을 내놓는 것은 집안이 갖는 사회적 위치를 음식으로 은근슬쩍 나타내는 생색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젓갈은 지역 특산물을 염장하여 유통기간을 길게 하였다. 지역의 특산물 또한 계절별로 채취 시기가 달랐기에 지역과 계절에 따라 다양한 젓갈의 방법이 만들어졌다. 문헌을 보면 젓갈의 종류는 140종이 넘는다고 했다. 그 젓갈은 독자적으로 반찬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양념으로 사용되어 보다 다양한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기초 재료로써 이바지했다. 그래도 밥도둑이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는 범법적인 이름으로 밥과 잘 어울리는 반찬이다. 특유의 짠맛은 다른 반찬을 필요로 하지 않아 밥으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으니 당연히 밥을 많이 먹게 된다. 포만감을 밥으로 채워야 하니 밥도둑이라는 말처럼 게눈 감추듯 밥이 사라진다. 보통 공깃밥 하나를 더 시켜 나누어 먹다 다시 하나를 시키고야 마는 아쉬운 결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짠 기로 인해 당겨지는 흰쌀밥의 유혹이라 하겠다. 젓갈은 해안가에서 유명했다. 당연히 소금과 관련 있으며 상하기 쉬운 어류로 인해 자연히 유리한 환경인 해안가에서 발전되었지만, 대도시에서 추억의 음식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큼 유통이 쉽고 보관이 쉬웠던 음식 자체의 완성도 있는 유통기간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젓갈의 사랑이 유독 한국의 것만은 아니다. 한국의 까나리젓이나 멸치젓처럼 베트남 생선젓인 넉맘이나 필리핀 새우젓인 바곤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다른 나라도 충분히 젓갈을 음식의 재료로써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더 시대를 거슬러 가면 고대 로마에서도 젓갈을 먹었다. 가룸(Garum)은 향신료를 깐 항아리에 기름 많은 생선과 소금으로 20일 동안 막대로 휘저어가며 숙성시켜, 위에 뜬 액젓을 떠서 만들었다. 젓갈은 생존을 위한 음식보다는 풍미를 위한 음식의 발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처음엔 먹기 어렵지만 여러 이유로 먹기 좋았으니 여러 지역 여러 곳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