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뉴욕 맨해튼 연방 청사 앞에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 있었다. 73t의 거대한 강철판으로 제작된 작품은 3.6m 높이로 36m나 늘어져 있었다. 작품 제목은 '기울어진 호(Tilted Arc)'다. 거대한 작품을 설치하는 것은, 특히 사람의 왕래가 잦은 장소에 놓는 것은 공공성을 기반으로 작품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왕래는 작품을 보고 느끼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었지만 거대한 작품 때문에 양옆에서 반대로 가려면 70m가 넘는 거리를 돌아야 했다. 움직일 수 없는 철판의 거대함에 당연히 사람이 피해가야 했고 이를 불편하게 느낀 사람들이 철거를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존치를 주장하는 예술가와 예술종사자, 존치 옹호자들은 작품은 공간에 맞도록 설계가 되어있는 것이므로 장소를 옮기는 것은 작품 파괴 행위라고 했고 철거자들은 보행에 불편을주며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의 휴식처를 빼앗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배심원들은 철거를 결정했고 공공미술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의 소재로 이 사건은 기록되었다. 하지만 작품은 사라졌다. 본 사건은 예술가 작품이 공공성을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가는 작가가 결정하는 그것이 아닌 대중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철거와 존치의 주장은 둘 다 타당하다. 특히 예술은 시대성을 담고 있으나 동시대성을 반드시 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동시대에서 해석이 안 된다고 폐기나 파괴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작가의 주장만을 올곧이 주장하기는 어렵다. 이런 두 간극을 1985년 미국에서는 청문회를 통해 배심원들이 결정하게 했다. 민주주의식 예술평가 방법을 도입한 것이다. 공공미술은 이렇게 작품에 대한 논의도 있어야 하지만 작품 설치 이전에 지역민들과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도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형 뉴딜 정책 사업의 일환으로 코로나 19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미술인 일자리 창출 및 지역 공간 품격 제고를 위해 '2020 공공미술 프로젝트 우리 동네 미술' 사업을 전국적으로 하였다. 비용도 상당하여 전국 228개의 지자체 참여 총 948억을 집행한 대규모 공공미술사업이었다.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에 대한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였으므로 인건비 비율을 55%로 산정하고 지자체별로 4억 원씩 37명의 작가에게 지출이 가능하도록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짧은 시간 예술가들의 생존에 도움을 준다는 취지는 좋았으나 너무 급하게 진행되어 작가들의 참여는 제한되었다. 작가들의 주 수입원인 대학시간 강사와 같은 일을 하거나 근로계약이 되어있는 경우는 작가 참여를 제한하였다. 더 어려운 작가들에게 양보해달라는 좋은 취지로 생각이 되었지만 작은 규모의 지자체에서는 37명의 작가 모으기가 불가능했다. 청주는 3팀으로 나누어 10여 명씩 진행을 하였지만 작은 군소도시는 인근 도시에서 예술가들을 빌려오고 약간의 비전문 예술가들을 채워 넣어 부족함을 메우며 진행하게 되었다. 동일 시간대에 결과를 만들어야 했기에 작품의 질보다는 공정에 맞도록 진행이 되었고 많은 작가의 손때 묻은 작품을 기대하였으나 공장에서 만든 세련된 제품으로 설치되고 말았다. 마치 4대강을 하면 일자리가 수만 개 생긴다고 했으나 넓은 강을 파고 있는 굴착기 몇 대와 트럭이 보였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예술가의 일자리도 이런 착시의 일자리 창출로 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예술가의 가계와 생존에 도움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청주 곳곳의 공공미술 장소를 돌아보고 느끼는 감정은 차가운 금속의 날카로움이다. 풋풋한 예술가의 따스함보다 기계가 만들어 낸 차가운 결과물만 느껴진다. 획일화된 예술가의 제품을 만드는 행위는 나중 작가 스스로 작품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36m짜리 거대 작품도 주민의 요청에 사라졌다. 하지만 모양은 사라져도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청주공공미술은 주민에게 어떤 관심을 받을 수 있을지 그리고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결핍이 있어야 욕구를 갖는다. 결핍은 목적이 있으면 생기는 것으로 목적을 세우는 것은 결핍의 시작이다. 누구와 물고기를 잡는 법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아이에게 잡은 물고기를 편히 가져다준다면 결국 아이는 물고기 잡는 법을 모르며 누군가 물고기를 주지 않았을 때 물고기에 대한 욕구도 상실된다. 욕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기준점으로 서서히 생겨난다. 물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낚싯대의 품질은 중요치 않으며 낚시꾼들의 거대 물고기 사냥에 대한 무용담도 대수롭지 않다. 자신이 적은 일이라도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욕구도 생기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결핍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욕구가 발생하기 전 관심조차 주지 않고 더욱 쉽게 포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물고기는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한다.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면 똑똑한 이는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 더욱 많이, 더욱 넓게 바다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수확한다. 그렇게 나온 것이 쌍끌이 저인망 어선으로 바닷속을 샅샅이 훑으며 온갖 물고기를 싹쓸이한다. 이렇게 물고기 잡는 법을 발전시켜 더욱 거대해진 배로 먼바다부터 물고기를 잡아 올려 연안에는 물고기가 줄어드는 상황까지 만들게 된다. 이런 연휴로 다양한 부수적 과학발전을 이루지만 결국 남에게 보이지 않는 피해를 넘긴다. 자연 역시 생태계의 혼란이 가중되며 황폐화가 급속적이며 지속적으로 생기게 된다. 결핍은 생존과 욕구에 대한 개인 갈증에서 시작되지만 결핍이 사회적 결핍이 되었을 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량의 사회 욕구가 수반되며 자연정화의 생태계는 파괴되기 쉽다. 결핍에 대한 해결은 그래서 근본적 이치를 깨닫고 왜 생겨난 결핍인가를 고민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배를 만들어주면 배를 갖지만, 배를 만드는 기술을 갖게 하면 배를 만든다. 그러나 바다를 꿈꾸게 하면 배를 만들지만 더욱 넓은 바다를 생각하며 자신의 욕구에 충족한 배를 만든다. 낚시도 물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닌 바다를 꿈꾸게 하였다면 오늘처럼 물고기의 씨가 마를 걱정으로 치어를 키워 방류하는 수고가 없지 않았을까 한다. 과거 생존의 시대에서는 널려있는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었다. 내가 선점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남이 사용하여 남의 것이 되었고 그로 인해 남이 사용하기 전 기회가 된다면 내가 있는 힘껏 모든 것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는 곧 '지속불가능한 발전'이라 명명할 수 있는 형태였다. 지구의 물질자원이 현재의 기술로 유한한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화석에너지에 의존한 에너지 기술은 그 구조적 한계로 수년 내에 소진될 것이라는 여러 연구는 이미 주변에 널리 알려져 있다. 지구의 날은 늘 4월 22일이다. 이날은 세계 190여 개 나라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차 없는 행사나, 전등 소등 참여 등으로 잠시 지구를 쉬게 해준다는 캠페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속가능한발전'은 인류의 가치를 다 함께하자는 것으로 1987년 세계 환경개발 위원회(WCED)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국가별 발전 속도도 다르고 이것이 또 다른 강대국이 약소국을 죄이는 족쇄로 작동하는 우려도 있으나, 인류의 기본적 공유가치로 반드시 필요하다. 현세대가 미래세대에게 삶의 기본을 남겨두는 것부터 삶의 꼭 필요한 소비를 통해 인류가 아닌 다양한 동식물의 생태도 보전하여야 한다. 인류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가져야 한다. 개인의 결핍을 개인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나 외의 모든 것에 대한 결핍을 생각해보는 2021년 코로나 4차 유행 지구의 날에 생각해볼 문제이다. 결핍은 욕구를 부르는 삶의 성공을 위한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만, 이성 없는 결핍은 모든 이를 파괴할 것이다.
1866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섬나라 특유의 문화를 극복하고자 대륙에 기반한 교두보 마련에 노력을 기울였다. 신식 무기와 신식 군함을 수입하여 기존의 해군력에 비해 상당한 진전을 이루자 인접 국가인 조선을 통해 섬나라 극복을 이루려 했다. 사건의 발단이 운요호사건이다. 영국에서 수입한 운요호(雲揚 うんよう, 운양호)는 강선 철골에 목조로 된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식 함포가 가능한 군함이다. 1875년, 운요호는 5월 25일 부산에 도착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함의 위력을 보여주며 외교교섭을 시도했으나 조선 정부는 협상을 거절했다. 국가 간 예의 없는 것도 문제였지만 나라별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윽박지르는 듯한 협상은 조선정부에서도 불쾌한 일이었다. 일본은 뜻대로 되지 않자 운요호를 강화로 이동시켜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게 한다. 강화도에서 시작된 이 도발이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지고 일본에 유리하도록 조선이 개방되었다. 강화에서 싸운 전쟁은 한양을 목전에 둔 일이기에 그만큼 조선정부의 부담이 큰 것이었다. 강화군은 한양으로 가는 뱃길이 연결되어있는 교통과 군사의 중요한 지역이다. 그렇기에 강화에는 외세를 막기 위한 다양한 군사적 요충지를 진지로 구축해놓았다.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항하기 위한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부터 시작하여 운요호사건 때 박살 난 초지진등 다양한 군사적 시설이 있다. 당시 운요호는 강화 초지진까지만 오고 돌아갔으나 오늘날은 다양한 현대식 진지까지도 구축되어있다. 외세보다는 북한의 위협을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운요호가 쑥대밭을 만든 초지진을 넘어 한강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면 강화도 물줄기가 한강과 임진강 물이 합해져 나뉘는 곳, 월곶돈대에 '연미정'이라는 군사요충지가 있다. 임진강과 염하강의 모양이 제비 꼬리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연미정이다. 고려시대 고종이 사립교육기관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고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도 하는 기록이 있다. 연미정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는 유서 깊은 곳인데 현재는 북을 감시하는 군사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2008년부터 민간인에게 개방되어 북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북을 감시하는 군인들이 서로 다른 마음으로 같은 곳을 보는 곳이다. 높은 곳에 있으며 물줄기 3곳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연미정은 한강 하구 중심에 따라 남과 북으로 나뉜다. 북한의 개풍군이 강 건너편에 있으며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개성이 보이는 거리에 있다. 과거 강화의 군사적 상황을 보호해주고 수도인 한양을 지키는 갑옷의 역할을 강화가 해왔는데 국가 간 무한경쟁과 경제의 상황에 따라 물리적 국경의 필요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새롭게 재편되는 국경 없는 지구촌화에서도 연미정은 여전히 국가 안보의 갑옷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북한이 전쟁을 치르려면 서울을 공격 할 것이지 강화도까지 와서 공격을 해야 할 필요성이 없겠으나 강화의 연미정은 습관처럼 국가를 지키는 곳이 되어있다. 북에서 내려오는 임진강 물줄기와 남에서 내려오는 한강 물줄기는 김포와 파주에서 만나 강화로 흘러든다. 물에는 이념도 없고 국경도 없이 흐른다. 연미정에서 바라보는 강줄기 속에는 유도라는 작은 무인도가 있다.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으므로 남한 땅이라 불리지만 남북 각각 철조망으로 쌓여있어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땅이다. 그 덕에 이곳은 동물들이 살기 좋은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강화에 있는 철갑을 두른 갑옷 사이 살짝 삐져나온 말랑한 속살이다.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 아무도 가지 못해 만들어진 생명의 섬 유도에는 생태적 이해관계가 만들어 놓은 자연국립공원이다. 운요호를 타고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던 일본에 마음 아파하던 한국의 역사는 오늘날 남북 대치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서로에게 가해지는 강요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이해관계 속 유도는 조용히 답을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TV를 보면 중간중간 광고가 들어간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모델들이 주장하는 상품의 우수성은 직접 보지 않아도 '정말 이렇게나 좋구나!'라고 세뇌당하는 듯 멍하니 그 상품의 우수성을 경청한다. 쌍방 소통에 의한 전달이 아닌 일방적 주장을 현란한 영상과 가장 보기 좋은 각도의 상품을 보고 있다 보면 왠지 모를 신뢰가 생겨나는 느낌이다. 그 상품이 좋다고 이야기 하는 모델은 유명인으로 평소 품행이 방정한 사람으로 정평 난 경우가 많다. 당연히 상품의 신뢰는 모델의 후광으로 인해 더욱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상품을 이렇게 방정한 사람이 좋다는데 일반인이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각형 틀 안에 잘 맞추어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방정이다. 성품과 행동이 사각의 틀 안에서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말이나 행동이 수선스럽고 가벼운 것을 칭하는 방정맞다는 것과 동음이다. 그런 의미로 상품의 우수성 주장을 조용히 관조한다면 방정맞는 소비 방법을 꿰뚫는 통찰이 생길지도 모른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가족계획 표어, 1960년대)의 내용처럼 '덮어놓고 사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와 같은 상황은 소비 중심의 현시대다. 그렇게 온 집안은 다양한 물건으로 과거에 비해 현란하고 찬란한 집안이 되었으나 사용되는 것은 일부분이다. 4계절이 뚜렷한 기후니 다음 계절에 이것이 필요할 거라 재워 둔 것이지만 켜켜이 쌓인 물건은 다음 해에도 사용이 잘 안 된다. 집안 대청소를 할 때 켜켜이 쌓인 물건은 드디어 집 밖으로 외출을 하게 된다. 신년 초나 일정한 기간에 맞추어 묵은 때를 깎아내듯 잉여 물건은 외출이라는 표현보다 배설에 가깝게 내동댕이 처진다. 같은 물건이라도 집안에서 보는 모습과 집 밖에서 보는 모습은 새삼 다르다. 식탁에서 맛있게 먹던 음식을 식탁 밖에서 보게 되면 불쾌한 쓰레기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위치 변경으로 생겨나는 대상에 대한 인식변화는 대상의 변화보다는 바라보는 사람의 변화이다. 짧은 순간에 벌어지는 물건에 대한 사람의 배신이다. 장난감 영화 토이스토리에는 카우보이 모자를 쓴 '우디'라는 주인공 장난감이 등장한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장난감 시선을 통해 인간과 추억을 쌓았지만, 버려지는 것, 잊혀지는 것에대한 이야기를 한다. 장난감 주인공 '앤디'가 점점 자라면서 더 이상 장난감이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으로 앤디를 떠나려는 장난감들의 갈등에서 우디는 어떤 것이 현명한 이별인지 고민한다. 자라나서 더 이상 장난감이 필요로 하지 않는 '앤디'는 장난감과의 추억이 있으나 다른 사람도 추억을 가질 수 있도록 어린이집에 장난감을 기증하며 끝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은 사라지고, 잊혀지고 다시 시작되는 물건의 생애주기를 보여주는 것과 장난감의 시점에서 사람이 가진 관심변화를 연결시켜 놓았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생기며 영화가 계속 만들어져서 다른 내용들이 첨가되었지만 물건의 생성과 소멸과 버려짐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밖의 현실이다. 버려진 물건들이 자리하는 곳은 쓰레기 매립지이다. 과거는 일정 부분의 땅에 직매립이라는 방법으로 쓰레기를 붓고 흙으로 덮고 누르는 방법을 통해 매립을 하였지만 보다 친환경적 매립의 방법이 필요로 하였다. 편안한 생활이 되도록 더 많은 생산물이 나오는 시대에 더 많은 쓰레기 배출은 당연한 문제였다. 경제적 풍족함은 필요로 하지 않는 물건까지도 구입을 촉진시키도록 국가가 나서서 산업장려라며 보여주었고 그 결과 어마한 경쟁을 통해 작은 물건에 과대한 포장이 붙는 것은 물론 아침마다 찾아오는 물건을 통해 편안한 소비산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연에서 시작된 물건을 가공하여 사용하다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 편의를 위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을 길게 하는 것은 결국 쓰임이 없어졌을 때 오는 역겨움을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느끼게 해주는 일이다. 이렇듯 쓰레기 매립지에는 현시대의 이기가 만들어 놓은 결과가 전시되어있다.
르네상스시대는 다양한 인류 발전을 일으키는 대단한 사건들이 즐비했다. 특히 미술은 그중 특별한 발전이 있었고, 오늘날 르네상스의 대표로 이야기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인물의 등장도 미술의 중흥에 이받이 했다. 과거 미술은 독자적 학문의 분야로 취급되기보다는 부속적 학문으로 취급되었다. 중요한 근거는 미술이 독자적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표현해야 하는 것을 지시받고 재현에 집중했던 결과였다. 기껏해야 유명인물, 귀족이나 왕족의 초상을 그리는 것이 주요 업무였고, 글자를 모르는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삽화가 주된 일이었다. 종교적 이야기를, 대중에 실감 나게 전달하려는 방법을 위해 화가를 사용했다. 실감 나는 재현의 기술이 화가의 등급을 결정 나게 하는 중요한 일이 된 것이다. 그러니 고급 기술을 가진 기술자로 취급하는 것이고 주문에 의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미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종교뿐만이 아니었다. 권력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이끌 수 있는 통치자도 종교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에 신이 사랑한 귀족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귀족 핏줄에 대한 종교 신임은 대중이 왕권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미술가가 권력의 시녀처럼 권력자의 입맛에만 따라갔다면 르네상스라는 유행에 미술장르가 숟가락을 올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미술표현을 잘하기 위해서 대상물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요구된다. 일반 대중은 그림을 잘 그리진 못해도 그림의 틀린 점은 쉽게 찾는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관람자보다 훨씬 더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일반인들과 비슷한 사물인지 능력을 가졌다면 대중들의 거침없는 지적질에 화가란 직업을 당장 그만두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 르네상스시대에도 화가들에게 찬사가 내려졌지만 혹독한 비판도 따랐다. 화가별로 자신의 유명세를 과시하며 자기 작품의 결과물을 자랑했지만 대중은 다른 화가의 작품과 비교를 하며 서열을 정리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미켈란젤로에게는 한수아래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전문 화가들은 자체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연구했다. 정확한 표현술을 익히기 위해 평면에 입체적 표현을 보다 체계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수학적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원근법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평면화면에 입체로 만들려고 시도된것이었다. 자연에 대한 분석은 이렇게 다양한 발전을 이룩했다. 자연에 대한 표현은 신에 대한 찬미를 넘어서는 자연과학에 근거를 두고 발전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전개되기 전인 13세기말과 14세기초에는 초기 르네상스라는 것이 있었다. 초기 르네상스는 성 프란키스쿠스의 급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성 프란키스쿠스는 당대를 지배하던 그리스도교 신학의 형식적인 스콜라주의를 배격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영적인 가치를 설교했다. 성 프란키스쿠스에게 자극받은 이탈리아의 미술가·시인들은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싼 세계에서 기쁨을 추구했다(다음백과). 초기 르네상스시대에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은 다양한 학문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시도가 르네상스를 살찌우게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변화를 통해 과학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그 근간에는 종교에 매몰되지 않는 다양한 논의와 철학이 사회를 견인한 것이다.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과 시도를 한다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이루고 내일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과학과 무속의 싸움이 코로나로 인해 계속 신경이 쓰인다. 세상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다른 이치를 가진 사람들 덕분인데 이런 것도 다양한 논리와 시대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인가?
예술가조차도 작품의 질이나 예술적 수준을 자본에 의해 나누고 있다. 사고로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이 사는 동안 얼마를 벌지를 미리 예측해, 사람생명의 가치를 평생노동을 통한 비용으로 물어주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서 예술 또한 가격으로 등급을 정하고 또 낮은 등급에 속하는 작가들은 낮은 부류의 작가로 무시를 하거나, 자신 삶을 필요 없는 일에 매진하는 대상쯤으로 여긴다. 그렇다고 예술품을 잘 파는 작가들이 그닥 훌륭하거나 대단치는 않지만, 일반 작가들과 다른 대우를 받기 위해 목에 힘주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예술가에게는 예술가 말고 별다른 지위를 지니진 못한다. 그렇기에 불의의 사고나 장애를 얻게 되면 전문직업인으로 대우를 받기보다는 일용직, 무기술 노동자로 대우를 받는다. 2005년 37살의 구본주 조각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20여곳에서 작품이 매입된 촉망받던 젊은 예술인이었다. 그런 그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시간강사 기간만 인정한 그의 수입은 예술가적 작품의 가치와는 별개로 일용직보다도 못한 시간강사 임금을 소득기준으로 삼고, 남은 수명과 활동에 대한 미래의 비용을 보험사에서 계산을 했다. 수입을 증명할 자료가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논리는 사회에서 아직 예술계가 해결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후 예술인 복지법은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최고은 작가는 이웃집에 '배가 고프니 식은 밥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요?' 라는 메모를 끝으로 굶어 죽었다. 2011년 한국에서 벌어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통해 예술인들의 삶이 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아직 제도적 장치로 연결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대부분 예술인은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4대 보험 바탕의 사회보장제도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런 예술인들을 돕기 위해 예술인복지법과 재단이 운영되고 있으나 아직은 초기 단계라 할 일이 많다. 유럽의 경우처럼 단기적 활동 중 공백기간 동안 예술가들의 어려움을 위해 단기실직수당과 같은 것을 지급하는 방안이 연구되고 있으나 표면적 활동을 등록하지 않고 즉흥적 관계 맺기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 예술계에서는 예술종사자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예술인 복지법에 따라 예술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예술인 등록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런 등록의 방법이 전문적 예술가와 아마추어 예술가를 구분 할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예술가로 등록 되어진 예술가라고 동일한 예술가적 대우받기도 어려울뿐더러 취미생들의 대규모 가입은 결국 전문예술가들의 이탈로 이어질 것이다. 예술가적 지위를 아마추어, 취미생들이 주로 있는 예술가 조직으로 변질될 위험은 시작 초기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다. 대다수 도시, 우리 주위엔 도시의 철학, 사회, 역사적 맥락과 관계없는 화강암, 스테인레스로 되어있는 조형물이 많이 있다. 부르는 것이 엿장수 값인 이 조형물들은 천지개벽 중에도 빠짐없이 동내를 빛내어 왔다. 별다른 고민 없이 진행된 작품들은 도시의 품격을 심하게 저하 시킨다. 이렇게 설치된 조형물들은 한 도시의 미적 수준을 평가하기보다는 상황에 맞추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그 조형물의 수준을 본다면 도시 문화수준을 보는것에 꽤 좋은 방식이 될지도 모른다. 도시의 예술품에서 도시의 품격이 나올 것이고 지역 예술인들의 대우에 의해 지역예술의 격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Naissance는 기원, 발생이나 시작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거기에 re를 더해 Renaissance는 14~16세기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과 문화지식을 다시 부흥시키려는 새로운 재생문화활동이다. 동양에도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비슷한 뜻이다. 온고(溫故)는 옛것을 익힌다는 뜻이고, 지신(知新)은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이렇게 늘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오늘에도 과거의 인류 발자취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새롭다는 것은 과거 관습을 깨뜨리며 가치관 변화를 이끄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우리가 당연하다 느꼈던 벽이 계속 변화되던 시대였다. 여러 획기적 사건들이 즐비했으며 이로인해 사람들은 새로운 소식에 민감했으며 정신적 진화가 거듭되었다.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경험을 통해 사람은 사고가 정해지므로 눈으로 보이는 곳이 평평하며 넘어지지도 않으니 굴곡은 있더라도 당연히 지구는 평평하다 생각했다. 끝없는 지구를 생각하기 어려우니 일정한 곳까지 간다면, 지구의 끝이므로 똑 떨어질 수 있는 지구의 끝도 존재할 것이라 생각 했다. 영화 부시맨이 콜라병을 주워 다양하게 사용하다 마을주민 갈등이 생기니 지구 끝이라 생각되는 곳에 가서 콜라병을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15세기의 사람들도 이런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Paolo dal Pozzo Toscanelli, 1397~1482)는 이탈리아의 수학자겸 천문학자이다. 그는 당시 평평하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유럽 서쪽으로 항해하는 계획을 만들었다. 그를 믿고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가졌던 콜롬버스는 토스카넬리와 서신을 주고 받았다. 지구의 절벽을 믿는 대다수의 사람과 달리 콜롬버스는 지구 구형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 토스카넬리는 콜롬버스를위해 이런 충고를 하였다. '콜럼버스씨, 당신의 생각이 옳소. 동양으로 가려면 육지로 가는 것보다 또는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서 가는 것보다 서쪽 바다로 곧장 가는 것이 훨씬 가깝다고 나도 굳게 믿고 있소. 나는 이미 내 생각을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에게 전하여, 서쪽 항로를 탐험하도록 권한 적이 있으나 왕은 내 말을 믿지 않았소. 당신은 젊으니 계획대로 일을 성공시키기를 진정으로 비오.' 당시 항해술은 갤리선이라 불리우는 노예를 이용한 노 젓는 배였으나 노르만인들이 사용하는 돗이 달린 범선이 개발되었다.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라의 후원으로 콜롬버스는 범선을 이용하여 서쪽으로 항해를 할 수 있었다. 지구 끝을 향해가는 용기 있는 시도였지만 식수와 음식문제로 3분의 2의 선원은 괴혈병으로 죽었다. 더군다나 지구의 크기를 잘못 계산하여 무식을 용기로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가 도착한 아메리카를 인도로 믿게 되는 결정적 오류는 지구 크기를 너무 작게 계산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는 '지팡구'라는 섬은 황금이 모래처럼 흔하며 건물 벽까지 황금으로 되어있다는 구절을 콜롬버스는 믿었다. 그래서 그가 도착한 아메리카를 인도라 믿었고 그곳에서 '지팡구'의 황금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계속된 실패로 왕실의 후원도 끊기고 명예도 잃게 된 콜롬버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시를 당하게 된다. 이미 개척된 항로로 1~2달만 항해하면 아메리카로 항해가 가능하자 사람들은 누가 항해를 못 하냐고 이야기하며 그를 비난하자, 콜롬버스는 유명한 달걀 이야기를 한다. 달걀을 세워보시오라는 이야기에 아무도 세우지 못하자 톡 깨뜨린 후 달걀을 세운다. 비웃는 사람에게 그는 처음하는 일이 어렵지 다음에 하는 일은 그 만큼 쉬운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새로운 일 하는 사람에게 비난보다 찬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의 지원을 보면 문화예술 향유자를 중심으로 정책이 돼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나 기획자에게는 단기적 지원과 프로그램 위주의 지원이 주를 이룬다. 작가나 기획자도 그러한 프로그램에 맞춰 단기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런 결과물을 즐기는 향유자나 행정 또한 그러한 단기적인 행사 일정에 맞춰져 있다. 문화예술은 보다 장기간으로 만들어지고 조금씩 바뀌는 상황을 통해 꾸준히 진화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지원에 있어서는 장기적 안목으로 모든 프로그램을 만들지만 단기적으로 기획지원하고, 계량적 수치에 행정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의 기본방향과 방침은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우선돼야 한다. 문화와 예술을 창조해내는 문화예술가에 지원 초점을 맞추어 놓아야 장기적 문화예술 공급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문화예술인 근본적 지원 방식으로 주거지 지원 방식을 통한 문화예술인 생존정책이 필요하다. 이는 보다 장기적 문화예술인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과거 한국의 주택 상황은 이촌향도현상으로 도시에서는 절대 부족의 주택 보급률을 갖게 됐으며 대도시를 중심으로 부족한 주택 보급률에 따라 주택의 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정부 정책도 주택 보급률이 중요한 정책으로 인식됐고 주택 물가를 잡으려 했으나 투기로 이용하는 세력들에 의해 아직도 일반적인 서민들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주택을 갖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2006년도 주택 보급률은 107.1%이지만 자가 점유율은 56%로 나타나고 있다. 이마저도 농촌지역의 자가 점유율을 제외하면 도시지역에서는 40%에 불과하다('싱가포르 공공주택정책, 국민의 90%가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나라' 18~19p 인용). 보급률이 100%를 넘으면서도 불구하고 다수의 국민은 자신의 주택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적인 여유가 있는 소수가 많은 주택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주택보유유행의 상황에서 주택 갖기 열풍은 단순한 재산의 의미보다는 가만히 있어도 가치가 상승되는 투자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사고 파는 행위를 통한 이윤으로 주택을 갖기는 문화예술시장조차 형성되지 못한 사회에서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장기적 문화예술인 지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존 프로그램형식 지원으로는 장기적 지원이 불가능하다. 이미 여러 차례 지원한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예술단체의 대표들은 이미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것은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으며 예술하는 것보다 다른 일을 찾는 것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프로그램 지원이 문화예술인의 생존, 생활환경에 좋은 역할을 못했다는 반증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문화예술인의 지원이 가능하도록 하려면 보다 현실적이며 장기적인 생존 대책이 필요하며 그러한 지원으로 주거지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많은 문화예술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주거지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활동할 공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지역 일정한 공간에 동일한 분야의 문화예술인 주거지 확보는 산업 단지, 상업 단지처럼 일정하게 모아놓으면 스스로 진화하는 형태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 것이다. 문화예술 진화의 중심은 예술가 생존공간 지원으로 불규칙적 일을 하는 문화예술인의 안정적 삶을 제공하는 것에 기반을 둔다. 본 주거지 지원의 방법은 현재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유휴공간 문화예술인 활동 공간 제공과 더불어, 인근 지역에 생활공간 지원을 이용한 장기지역문화 활성의 문화예술도시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1948년 심리학자인 비넘 포러는 학생들에게 성격검사를 실시한다. 학생들 각자에 대한 고유한 성격을 분석한다는 명분으로 실시 된 성격 분석이었지만 실제로는 모든 학생은 동일한 실험 결과를 통지 받았다. 학생들이 선택한 결과에 상관없는 동일한 가짜 평가서였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또 다른 실험은 정확한 평가 결과와 모호한 가짜 평가 두 가지를 평가 결과로 제시했다. 그중 어떤 것이 본인을 잘 평가한 결과인가를 뽑으라 하니 오히려 59%의 학생이 가짜 평가를 잘된 평가로 선택을 하였다. 가짜평가서에는 '원래는 정확한 성격이지만 상대방에 따라 우유부단한 성격이다.'와같은 모호하고 불분명하며 막연한 평가를 제공한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함을 스스로 정확하다 믿는 효과를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 부른다. 모호한 결과를 나타내는 별자리점, 혈액형 성격 테스트나 띠별 운세와 같은 것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바넘효과의 결과물이지만 나름 신념을 가지고 믿는 사람도 많다. 보통사람들은 사실을 근거로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닌 주관적 상황에 따라 믿는 폭을 정해놓으며 지속될 경우 사고가 더 견고해지며 자신과 무관한 사건임에도 연관성이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올바르고 가치적 판단을 분석하는 것이 아닌 무리적 평가를 별 의심없이 믿는 경우가 이런 경우이다. 대중을 위한 공연으로 9월30일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의 공연 방송을 KBS에서 하였다. 가수와 노래를 통해 코로나19로 힘든 대한민국을 위한 특별 방송이었다. 최근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트롯 열풍에 트롯의 황제라 대접을 받는 나훈아의 등장으로 그간 기교 일색임에도 삶의 애환 등등 온갖 미화적 표현을 받아온 젊은 가수들에게 본대를 보여주는 것이려니 생각되었다. 20대의, 그보다도 어린 10대의 기교 섞인 간들어진 목소리에 삶의 한이 서려 있다는 과도한 해석에 식상해져 있기에 나훈아의 공연은 기대되었고 전국시청율 29%라는 경의적 수치를 보여주었다. 트롯이란 장르가 특유의 꺾이는 기교와 과장된 제스추어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것이 개인의 기호이니 별관심은 없다. 그러나 트롯의 고향이 서양음악이 일본 엔가와 섞여 만들어 진 것이 사실임에도, 한국 대중음악의 원조로 여기는 역사 곡해는 분명 문제다. 트롯이 전통음악이라는 것은 친일했던 지주가 돈이 있다고 나중에 슬그머니 독립유공자로 둔갑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몇몇 정치인들은 이미 친일을 슬며시 독립운동가로 변화시키다 걸리기까지 했다. 나훈아도 공연 중 계속 노래만 할 수는 없으므로 공연 중간에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나훈아의 공연 중 멘트는 힘들어하는 국민에게 힘을 주고 국민의 사소한 동참도 훌륭한 일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만들어주기 위한 추임새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일부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불분명한 평가를 본인의 느낌에 따라 찰떡같이 듣고 나훈아가 이야기 했다며 떠드는 낯뜨거운 저질 문화비평을 해댄다. 나훈아의 이야기를 가지고 소크라테스를 대입하여 만들어 내는 과장된 선전의 모습은 대중이 그런 말을 믿는다는 자기최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름 한번 거론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정치인들이 뱉어내는 거친 말을 모르는 척 언론이 증폭시키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언론사는 정치인이 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써 날랐다고 할 것이고 정치인은 "자신 생각을 말도 못하냐!"며 오히려 역정을 낼 것이다. 확대된 이런 이야기들은 곧 사실처럼 오르락 내리락 거릴 것이다. 유튜브나 카톡을 통해 전파되며 어느덧 절대적 사실이 될 것이다. 바넘효과는 이렇게 사실과 관계가 없더라도 사실로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나훈아가 아무리 뛰어난 노래실력과 인문학적 소양을 가졌더라도 그는 음악인으로 존중받았던 것이다. 성인군자도 아니며 도덕적으로 무결점을 논할정도의 인물이 아닌 대중 사랑을 받기 위해 대중과 호흡하던 대중음악인일 뿐이다. 음악인은 음악으로 이야기하고 문학인은 문학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정치인이 음악을 평가하는 것은 코메디와 같다. 임시정부수립이 101년째이고 6.25전쟁 발발이 70년이 된 올해, 한국을 걱정하는 트롯가수의 멘트가 이렇게 씨끄러울 일 인가·
1970~80년대, 어딘가에 있었을 듯한 흔한 이야기이다. "나의 딸을 당신에게 넘겨 줄 수 없네!"라며 완고한 아버지는 이발사에게 딸을 시집보낸다. 자신이 생각한 최고의 안정적 일은 기술자이며 이발 기술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일한 만큼 비용을 바로 받는 안정적 직업이라 생각했다. 이발기술은 미래가 보장된 기술로 몇몇 대머리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늘 머리카락이 자라며 일정한 시간 뒤에 반드시 머리카락을 자르기 때문에 시대를 불문하고 변함없는 직업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농사 외에는 공장에서 기름을 만지는 일이 직업의 종류였기에 이발은 근사한 하얀 가운을 입고 늘 그늘에서 일을 하니 보기에도 편해 보이는 최고의 직업으로 보였다. 미래는 불확실한 일이 계속해서 생기기 때문에 자신 경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한다. 자신 경험을 토대로 안전한 대응책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미래는 과거의 반복이 아니며 나선형으로 상승한다. 복고가 되는 것을 보고 유행은 돈다고 믿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일부분만 수용되고 버려지는 더 많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완고한 아버지가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계속 존재할 것이지만 아버지의 선택이 딸을 위한 잘된 선택이 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다가오는 미래는 반복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라 불리는 본성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나의 과거와 현재를 혼란스럽게 하고 미래를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불안의 씨앗으로 생각한다. 과거를 중심으로 해석하다보면 미래를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익숙한 과거 경험에 기인하여 변함없기를 바란다. 실수를 줄이기 위한 신중함이 오히려 새로움에 대한 배척이되며 새로움에 대한 거부감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게된다. 미래를 만들어 가기보다는 새로운 것이 없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비추어 지는 것이 그런 모습인데, 지나치게 신중하고 익숙함을 추구해서 나오는 현상이다. 새로움에 익숙한 청년기보다 노년기가 보수적으로 된다는 것은 미래를 대하는 그들의 관점이 어느 시점에 멈추어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몇몇 보수주의는 대중의 의견 통일을 만들기 위해 종교나 정치를 활용하여 구성원의 연대감을 높인다. 종교로써 대중을 관리하고자 할 때 자주 등장하는 기독교적 인간원죄설은 보수주의의 중심적 철학 요소로 보여진다.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은 애당초 자유롭지도 선하지도 못하며 오히려 무질서와 사악함, 상호파멸로 나아가기가 쉬운 존재로 생각했다. 대중의 자유로움은 이렇게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이므로 의식을 통제하고 현재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이라 믿은 것이다. 스스로 무엇을 이루려는 청년의 기상을 보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청년들도 보다 보수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들도 안전한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도전한다. 조물주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자조섞인 농담은 어린이의 꿈이 건물주라는 희한한 꿈을 안겨주었다. 스스로 땀을 흘리지 않고 남의 땀을 양분 삼아 산다는 것이 과연 현실을 지키며 살아가는 보수적인 삶인가는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다 수의 청년들이 다시 시험공부를 위해 학원가로 몰려다니고 있다. 새롭게 기획하고 도전하기보다 소위 철 밥그릇이라는 공무원이나 공사시험에 몰두하고 있다. 창의적 시도보다는 보장되어있는 사회안전망 속 편승의 시도는 대한민국 사회의 단면이다. 보수는 가치를 훌륭히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쉽게 정신을 바꾸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남의 땀을 양분으로 삼으며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는 것도 보수가 될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는 하나님이 심판한 것"이란 설교를 하는 목사가 있다. 자신이 아는 몇몇 단편적 지식을 종교로 포장하여 상상력을 펼치고 이것이 사실처럼 둔갑 되어 신자들에게 설교하는 것이다. 그는 어디서 정보를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엊그제 들었다. 미국에서는 백신 개발하는 회사마다 몇 백억 씩 몇 천억 씩 후원해주는데 그 백신을 개발하면 백신을 맞은 사람은 백신 안의 그 사람의 유전자까지 다 조작될 수 있고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까지 다 조종당할 수 있다고 한다"고 했다. 그 교회 목사와 신자는 그의 말대로 38명이 하나님 심판으로 병들었다. 서울 노원구의 A교회에서는 2020년 6월 28일부터 6일간 교회에서 '코로나19' 완전 퇴치와 나의 무너진 삶의 회복을 위한 를 개최하였다. 거기에서는 "~~일주일 동안 00교회에서 편안하게 먹고 자고 쉬면서 ~~ 새 출발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라고 광고하고 있으며 매월 1회씩 2박3일간 교회에서의 교육도 했다. 전액 무료로 한다고 하며 금전과 무방함을 강조 하지만 하나님의 돈 전달이라는 명목을 세우는 것으로 봐서는 헌금을 걷는 것이 당연한 듯 하다. 금액이 늘어난 것을 "인생 최절정기 하나님의 축복에 거의 다시 육박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것을 본다면 결국 헌금이 얼마냐가 하나님의 축복의 크기라는 이상한 논리의 글로 정리한다. 더 나아가 신앙으로 코로나를 극복한다며 기도로써 무장하면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는 곳도 있다. 자신이 기도를 하면 성령으로 가득 차 병이 올 수도 없고 걸린 병도 낫는다는 설교를 하는데 이처럼 믿기 어려운 해괴한 논리를 보통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달리 목사에 의존도가 높은 기독교는 목사의 자율성 만큼 독립적 목회활동도 가능하며 이를 통한 신자들에게 세뇌 역시 가능하다. 정상적 사고를 갖지 않은 목사라도 목회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일부 유투버가 구독을 통한 수입을 만들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 구독율이 곧 돈이기에 수많은 구독자 생산을 위해 남보다 자극적 소재 개발에 혈안이다. 일부 교회에서도 이런 자극적 소재 개발로 교회를 유지해나가는 것은 이번 일뿐만은 아니며 계속되어왔던 문제이다. 종교적 자유라는 논리에 숨어 정치, 사회, 경제 등 편협된 지식으로 남을 헐뜯고 논리가 막히면 세상이 잘못되어 그러며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일부 개신교에서는, 미국에 대한 추종을 미국이 원해서도 아니며 본인 스스로 무조건 미국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미국에 있는 교회 역시도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대면 예배를 강행하며 사회적 문제를 만들었다. 그들의 해석도 코로나 19는 사탄과 관련이 있다는 논리로 코로나19 전염병을 기도로 이겨내며 이런 종교활동을 바이러스가 막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현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망상이다. 미국 의학협회장 패트리스 해리스는 "'거리두기'가 전염병 확산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100년 전 스페인독감에서 이미 증명됐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실과 증거보다는 이념과 정치, 신념에 치우친 결정을 보고 있다"고 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도 종교의 자유를 방패 삼아 종교활동으로 병이 전파되고 있으며 사회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사회를 걱정해야 하는 종교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일부 교회의 이탈이란 교회의 주장을 무신론자들이 곧대로 믿기 어려운 것은 그간 교회가 행해 왔던 독자적 해석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이야기했다. 왕이 어질지 못해 가뭄이 든다고 탓하는 백성에게 세상의 이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늘과 땅은 인간이 원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태풍이 오고 바람이 불며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종교는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고 과학은 현실에 대응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원전 6세기에 노자가 가르쳐 주었다.
공자께서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이란 말을 하였다.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고 이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덮고 자신이 피해를 보더라도 조금 넉넉히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이 따른다. 공자는 인간 됨됨이를 설명하는 것에 많은 이야기와 명언을 남겼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 간 관계 맺기를 통해 이해관계가 형성되며 발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가 사회신뢰를 구성하는 중요한 근간이 된다. 관계 맺기가 잘되려면 넉넉한 포용의 마음이 있어야되며 이런 것이 신뢰 사회로 연결된다. 코로나19로 인한 집단 감염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를 통해 국가의 행정과 시민, 학생의 활동 등 어려움이 끝나지 않고 있다. 사람 간 전파는 사람 활동에 제약을 남기고 마주 대면하는 사람 간 관계의 어려움을 남긴다. 나 외 모르는 사람에 대한 거리감은 관계 맺기가 중요한 사회에서 활동의 위축이 가속화된다. 그럼에도 사람 간 전이되는 전염병 예방을 위해서 사람 간 거리두기는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되는 일이다. 과거 일상이 좋았다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전염병을 종식 시켜야 한다. 모이지 말라 외치는 질병관리청의 이야기도 무시하고 8.15 광복절, 광화문 집회에 성조기와 일장기 들고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간은 외롭지 않고 뜻을 함께 나눈 이웃이라 생각이 들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한국 인접 국가인 북한, 중국과 가까이하는 것에 불편하고 일본, 미국과 가까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한국은 아버지와 같은 미국과 형님과 같은 일본을 따라 자유 민주공화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한국이나 미국, 일본, 중국 등 거의 모든 나라는 자국을 위해 일한다. 공짜로 남을 도울 나라는 전 세계에 없을 것이다. 후진국 경제를 살려주는 것은 자국시장을 넓히고 장기적으로 그 나라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수십 년 공들이는 시간이다. 태국에 도로를 일본이 포장해준 것은 오늘날 일본 차를 태국에 팔기 위한 오랜 공들임의 시간이었다. 그런 측면으로 본다면 미국의 한반도 주둔 목적은 다양한 미국 이해관계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주한미군 일자리 창출과 그 가족들에 대한 지원, 미군 무기와 운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저효율 고비용의 미제 무기를 구입 할 수밖에 없는 한국군대, 만들지도 않은 최신형 F-35를 구입하고, 수리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해야하는 등 자주국방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도움은 철저히 미국을 위하며 한국을 위한 것은 전쟁 억제라는 명분뿐이다. 인류는 두 번의 거대한 전쟁으로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승리로 패전국 경제를 독식하는 것이 야만적 행태이며 상대방 고통은 나의 승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국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하게 되었고 국가 간 상호 평화를 위해 군사적 침략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였다. 더 나아가 '불가침 조약(Nonaggression Treaty)'이라는 명칭으로 주권 및 영토보전의 존중과 무력행사의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 간 합의를 명문화 시켰다. 이런 조약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 맘대로 사용폐기나 과도한 해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 많은 국가들이 이성을 가지고 인류의 양심적 잣대로 해결하려 한다면 과거와 같은 전쟁 승리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에 기대어, 함께 사랑하는 사회제시보다 악마를 제시하는 광기는 계몽시대에서나 봄 직한 한심한 행동이다. 공자의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이야기는 남의 주장을 들을 줄 아는 경청이 우선되어야 한다. 갓 태어난 새 새끼가 자기에게 먹을 것을 달라 빽빽 울어대는 모습으로는 외롭고 이웃도 없는 초라한 사람 간 관계만이 존재할 것이다.
근엄한 얼굴표정으로 턱을 치켜세우고 눈을 아래로 하는, 전형적 고압 자세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던 사람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허리를 크게 굽고 산듯한 표정을 지으며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한다. 이렇듯 얼굴 근육은 전혀 다른 얼굴을 만드는데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첫인상은 그 사람에 대한 오랜 기억에 남는 이미지일 텐데 산뜻 발랄하게 웃는 모습의 여운은 오래간다. 물론 안 좋은 인상은 그것보다도 더 오래간다. 사람의 얼굴은 크고 작은 근육 80개로 되어 있다. 그 80개의 근육으로 7천가지 표정을 지을 수 있다. 웃고, 화내고, 말하고, 감정의 표현도 다양하게 하는, 바쁘게 움직이며 자신의 상황을 얼굴 근육을 통해 나타낸다. 이렇게 다른 근육보다도 더 세밀하게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방향의 진화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물의 종류가 과거에서 현재까지 대를 이어 가면서 변화해 온 과정을 '진화'라고 한다. 생물이 일정한 조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도태된 것을 포함하여 점차 간단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하등한 것으로부터 고등한 것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루 일컫는 것이 진화다. 진화의 특징은 잘하는 것을 극대화하며 안 사용하거나 필요 없는 것은 도태를 시키는 것을 통해 생물 원형을 유지한다. 필요로 하다고 덕지덕지 다양한 능력을 더하지는 않고 필요 없는 것을 빼는 것으로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영화 속 상상은 덕지덕지 붙이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진화를 표현한다. 인간의 몸에 기계를 혼합한 사이보그와 같은 것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인간 신체를 업그레이드하는 것과 같이 인류의 진화를 급속도로하고 자신 요구에 의해 부분진화도 등장한다. 상상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현재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보행보조기계 같은 것을 통해 걷는 것을 넘어 달리기하는 사람의 모습이나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 수 있도록 고안된 노동자 슈트 개발은 인류가 원하는 진화의 노력을 보여준다. 그러다 얼굴표정이 가능한 로봇을 만들어 발표를 하였다. 로봇의 다양한 얼굴표현은 경의로움을 넘어서는 공포감을 주었다. 그 이유는 감정을 표현하는 로봇이라면 통제 못하는 감정시에 인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징가Z나 로봇 태권V와 같은 지구평화를 지키는 로봇은 늘 표정이 없고 우리의 지구를 지켜주는 좋은 로봇이지만 감정을 통해 인간을 대하는 기계가 등장한다면 얼마나 무서운 사회가 될 것인가? 인류의 공포는 예측 못 하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기 때문이다. 얼굴표정은 언어나 몸으로 전달 가능한 대화를 더 실감 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런 전달의 목적은 상대방과 공감을 더 쉽게 만들기위한 방법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은 나와 너가 우리라는 개념으로 함께 할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오래전부터 인류는 혼자보다는 무리를 지어 살았던 생존 방법의 결과이다. 표정은 부족한 표현전달을 보조하며, 숨어있고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모습까지도 나타내곤 한다. 언어가 덜 발달 될수록 몸짓이 커지고 문자가 없을수록 전달을 위해 얼굴 근육은 바쁘게 활동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웃는다면 일종의 당신을 믿는다는 혹은 공감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앞으로의 사회도 이렇게 정서의 공감과 소통이 중시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과거처럼 서로에게 정서 소통이 직접에서 간접으로 바뀌어지고 있긴하지만, 비 대면이 되었다고 그 사람의 정서적 소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얼굴 근육이 진화 된 이유는 생존의 필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얼굴근육도 팽귄 처럼 앞 손인지, 날개인지, 지느러미인지 모를 상황처럼 단순 용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삐삐를 차고 다니던 시절에는 다들 수십 개씩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고 새로운 번호도 손쉽게 외우던 시절이었다. 당시 쉽게 외우던 두뇌는 젊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용 안 하는 20년도 넘은 통장번호와 남의 주민번호를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은 편집증이라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살았던 당시 시대 습관이 남긴 에누리 기억으로 생각된다. 10년쯤 지나 줄줄이 외우던 전화번호와 중요한 일정을 기억 못 할 때쯤 수첩에 일정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다시 10년쯤 지나니 이젠 가족의 전화번호를 외우기 위해 한 달을 노력해가며 겨우 외우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세월의 매정함을 몸소 느끼며 만감의 교차를 머리로만 고민하다 보니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 코끝부터 고소함이 느껴지는 쓸데없는 쾌감이 생긴다. 남들처럼 전화번호 못 외우는 현상을 디지털 치매라고 부른다. 디지털 치매가 강화된 현상은 삶과 함께 연결되는 기기의 발달이 급속도로 이루어 지면서 두뇌 활용이 안 되는 것이다. 단순 정보 기억이나 계산, 암기 등과 같은 왕년에 한 주름 하던 것이 이젠 220V 스팀 다리미로 쫙 펴진 듯 도무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단순히 더했다가 빼는 산수문제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스마트폰의 계산기 어플을 켜야 마음이 놓인다. 노래를 부를 때도 한 손엔 스마트폰으로 가사를 읽고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도 손전등 모드로 걱정 없는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의 이름처럼 스마트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폰이 스마트 해 질수록 사람들은 영리해지지 않는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생겨나는 정보를 저장할 필요가 없다면 응용능력이 올라갈까? 창의력이 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하는 다양한 능력을 말하는 것인데 남들과 다른 문제 해결방법을 보일 때 우리는 "어허 이 친구 창의력 있네!"라며 칭찬과 같은 감탄을 한다. 보통 이런 이야기가 전해질 때 이전에는 쓸 때 없는 짓이라는 질책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만들어진 문제해결 능력이 창의력이다.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는 소리 듣기 싫고 씨끄럽다는 이유로 이미 만들어진 결과만을 따르게 된다면 나에게 맞는 새로움은 분명 생기지 않는다. 지역에 씨끄러운 소리 듣는 것이 싫으니 이미 있는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지역 해결 창의력과 전혀 무관한 일이 될 것이다. 청주에는 문화도시선정이라는 즐거운 숙제가 있다. 이 숙제가 생겨난 이유는 문화자원의 고령화와 지원 원형문화의 가치를 활용하여 지역민과 새로운 공동체 기능을 만들라는 중앙행정의 써비스 지원이다. 도로 잘 깔고 건물 그럴듯하게 지어 인근 영세 문화시설 폐업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지역의 돈 있는 문화 투자가들이 선점하며 대형 건물에 값싸게 들어와서 영업을 한다. 인근 영세 사업자들은 문화제조창C를 중심으로 서서히 망해 갈 것이다. 이유는 당연히 문화제조창C에서 커피를 먹어도 폼나게 먹지 인근 누추한 까페에서 차를 마실 필요가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스타벅스는 못 오게 했지만 유사한 기업의 진출에 행정이 도와 근근히 지역을 살리겠다는 소상공인들이 폐업되는 것이다. 편안함과 안전함으로 접근하면 지역 공동체는 행정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게 바꿔진 지역은 스마트폰으로 생겨난 치매처럼 새로운 저장을 하기도 어렵고 새로운 시도도 하지 않는 표정 없는 도시가 될 것이다. 과거만 생각하는 문화도시 만들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지원센타의 중앙은 작아야 하고 민간이 하는 공간의 확대와 지원 방안을 만들어 문화적 도시를 작은 조각투자로 다양한 지역이 구심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원심력이 유지 되는 곳은 작은 거점이어야지 큰 덩어리가 중심이 되어서는 돌아가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1920년대 미국은 경제의 호황을 누렸다. 다양한 일자리가 계속 창출되었고 소비는 경제를 이끄는 자양분이 되어 소비와 성장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로 경제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1932년에는 미국 노동자의 1/4정도 되는 1천300만 명이 실직했다. 이 문제는 국제 경제시장의 붕괴로도 연결되어 유럽의 경제 역시 동시에 붕괴 되었다. 당시에도 미국은 중요한 경제 대국이었고 경제 공황시기인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을 하였다. 루즈벨트는 미국 경제개혁을 목표로 뉴딜(New Deal) 정책을 시행한다. 노동시장 붕괴를 일자리 창출로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였다. 공공토목사업과 같은 일자리를 만들어 노동자가 돈을 벌고 다시 소비를 촉진시키는 일을 통해 경제를 재건한다는 것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군비 증가를 통한 이익을 바탕으로 경제가 살았다. 분명 다른 나라는 이를 통해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겠지만 미국은 공황을 졸업하였다. 한국은 2017년 문재인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 중 주요 국정운영으로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시행했다. 매년 10조원 씩 5년간 총 50조원을 도시재생 사용한다. 도시의 철거와 뉴타운 건설이 도시발전이라는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가 도시재생 뉴딜사업으로 볼 수 있다. 주민들이 원하는 소규모 생활밀착형 도시재생으로, 재개발 시 내몰리는 주민이 없도록 만들려는 재개발인데 이 역시 수많은 현안의 문제점이 있다. 특히 의견 수립에 수많은 시간과 각자의 이해 관계로 의견 통일이 이루어 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기 쉽다. 사업기간 동안 무엇하나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과거 도시 재생의 접근에는 도시환경, 주택 재개발, 주거환경개발 등이 주된 사업이었다. 그렇기에 본 사업도 이런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주요 사업일 것이다. 현재 보편적인 국민의 주된 재산은 부동산에 집중되어있으며 상위10%가 전국토의 46%의 주택과 토지를 소유하였다. 그리고 상위 1%가 하위 56%가 보유한 것과 맞먹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2014년세무사신문). 그렇기에 아무리 좋은 취지의 국책사업을 실시하더라도 도시재생에서 발생되는 이익의 절반정도는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의 혜택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문화뉴딜이다. 도시가 가진 사회적, 문화적 기능의 회복을 위한 문화뉴딜은 도시 재생사업의 보다 중요한 핵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도시재생뉴딜역시 문화의 역할이 중요 하지만 문화예술인은 곁가지처럼 도시 재개발의 소모품으로 취급받으며 단기간 알바처럼 대우받고 있다. 문화예술인은 조직도 약하며 법적 이해도나 기획에 대해 개인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본인 예술활동은 잘 하지만 대중의 관점에 맞추는 능력은 어려워하거나 관심이 덜하다. 2020년 6월 29일 코로나19극복을 위한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토론이 있었다. 이곳에서 문화는 코로나 대유행 이후에 국민에게 행복한 꿈을 전달하는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하였다. 한국형 뉴딜 사업에서 문화뉴딜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문화뉴딜은 관광이나 다른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켜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제조 중심의 사회를 바꾸어 보려는 문화 혁명적 시도이다. 코로나19로 직접적인 대면이 어려워지는 오늘 비 대면 접촉의 문화를 제안하며 시도해 보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당연한 수순이다. 어려운 시간일수록 감정을 통해 극복해 나가야 한다. 문화예술은 희망을 주기위한 오래된 인류의 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