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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수필가

집 뒤에 있는 오래된 밤나무가 "툭," 알밤을 떨구는 소리를 낸다. 드디어 가을이 되었나 보다. 계절은 이름을 먼저 달고 오지 않는다. 거친 회갈색 가지에 연두색 잎이 보이기 시작하자 부지런히 달려오더니 봄이 되었고, 덥수룩한 누런꽃을 요란하게 흔들며 진한 밤꽃 향기와 함께 절정을 맞는다, 그 꽃들이 어느새 단단한 열매를 맺었나 보다. 불과 대여섯 달 만의 시간으로 결실을 만들어 가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매해 한결같이 사는 밤나무의 소명은 무얼까, 열매를 맺어 살아있는 것들을 먹이는 것이 그들 소명의 전부일 리는 없을 터, 그런데도 밤나무는 열매를 떨어뜨리며 자꾸 소리를 낸다.

"툭!" 밤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이 익고, 단풍은 낙엽이 되고, 바람은 차가워져 거둔 것 없이 쓸쓸한 한 해가 또 가게 될 테지. 나에게 밤이 "툭" 떨어지는 소리는 다람쥐나 청설모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 본능을 일깨우는 소리에 가깝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 그 짧은 기간에 먹을 것을 모아두려는 마음 바쁜 다람쥐처럼 나도 모르게 장화를 신고 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밤새 밤나무를 흔들며 지나간 바람 덕에 아침이면 붉은 갈색의 커다란 알밤이 혼자 튀어나와 흙바닥을 뒹굴거리고, 좁은 밤송이 안에서 어깨를 비비며 자라온, 크기가 제각각인 삼 형제가 모여 두런거리고 있다. 바닥에 밤이 지천이다. 가끔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면 볼이 빵빵한 다람쥐와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나를 보는 다람쥐의 심기가 불편한지 두 손에 들고 있던 밤을 내던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밤이 떨어지는 계절이면 아침마다 밤을 주워 봉지 봉지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그러다 계절이 지나도록 먹는 걸 잊어버리고 여름쯤에 내다 버리게 된다. 다람쥐가 애써 모은 밤을 땅에 묻어두고 까맣게 잊어버리듯. 밤 줍는 일 앞에서 나는 다람쥐나 청설모류의 머리보다 나을 것 없는 수준이 되어버린다.

아침마다 밤 줍는 재미에 빠져 다람쥐와 경쟁하고, 주운 밤을 까맣게 잊어버리더니 결국엔 먹지 못했다. 다람쥐가 잊어버린 밤은 땅속에 있다가 싹이라도 나, 새로운 밤나무가 되기도 하련만, 감사와 겸허함을 잊은 '나'라는 인간의 욕심은 뭐 하나 이익이 되는 게 없나 보다. 미련한 이기심 뒤에는 늘 자괴감이 따라 다녔다.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 속의 여자는 밤을 몇 알 주워와 밤 조림을 만든다. 이른바 보늬 밤. 번거롭고 시간 또한 많이 걸리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시간을 즐긴다. 밤을 줍는 나의 라이벌은 다람쥐가 아니었음을 그제야 깨달은 느낌이다. 주인공은 계절 따라 나오는 제철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힘들었던 마음을 치유해 간다. 몇 번씩 영화를 돌려보며 그녀의 쉼을 응원했고, 그녀의 음식을 따라 만들었다.

보늬밤은 밤의 겉껍질만 까서 만드는 저장 음식이다. 탄닌 성분의 떫은맛이 나는 속껍질에 상처가 나면, 여러 번 삶고 헹구는 과정에서 밤이 부서지기 쉽다. 떫고 질기고 거친 속껍질이 부드러워지도록 소다를 넣어 삶고, 헹구고, 맹물로 다시 삶아내기를 두세 번 정도 반복해 떫은맛이 사라지게 한다. 거칠던 속껍질이 한 겹만 남아 말갛게 된 다음, 다시 물을 자작하게 붓고, 설탕을 넣고, 간장과 럼주를 조금 넣어 보글보글 졸여서 소독한 병에 담아 보관하면 된다. 뚜껑을 닫기 전, 전에 없이 파랗고 맑은 하늘 조각을 담고, 그래서 더 아까운 계절을 추억으로 맛볼 수 있게 바람 한 자락도 돌돌 뭉쳐 병 속에 넣는다면 금상첨화.

찬바람에 마음이 흔들려 이리저리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날에 보늬밤 병의 첫 뚜껑을 열면 된다. 진한 밤색의 달디단 보늬밤 한 알을 입안에 넣으면 무엇보다 따뜻한 위로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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