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은 '총애'(寵愛)를 '남달리 귀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총애 중 임금이 특별히 총애하는 것을 '은권'(恩眷)이라고 부른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김세적이 비록 무재는 뛰어나다 하더라도 기간(器幹)이 없고 또 조행(操行)이 없었다. 그러나 은권이 매우 높아서 영광이 그 어버이에게 미쳤다" 하였다.'- 기간과 조행 역시 지금의 거의 사용하지 않는 조선시대식 표현이다. 전자는 재기와 도량을, 후자는 몸가짐 즉 품행을 일컫고 있다. 이밖에 은권과 비슷한 표현으로 '권우'(眷遇)라는 단어도 조선시대에 유통됐다. 두 단어는 큰 차이는 없지만, '권우'에는 행동의 의미가 보다 강조된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임금이 김세적이 장재(將才)가 있다 하여 가려서 승지에 발탁시키고 배우지 못했다 하여 학문을 배우게 하였고, 이제 또 은혜가 그 부모에게 미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 권우가 지극하였다.'- 인용문에 김세적(金世勣·?∼1490)이라는 인물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은권', '권우'라는 표현이 잇따라 등장한 것으로 봐 성종 임금이 김세적을 무척 총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관은 그런 모습에 무척 질투를 느꼈는지 '무재
성과 관련된 범죄로는 간통죄도 있다. 간통죄는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간통을 함으로써 성립되는 범죄다. 강간죄와 간통죄 모두 형법의 영역이지만 간통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한다. 이른바 친고죄인 셈이다. 조선시대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간통녀로는 어을우동(於乙宇同·? ~ 1480)이 있다. '어우동'으로 많이 알려진 여인으로, 성종실록에 총 27번 언급된다. 어을우동 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섹스 스캔들 메이커가 있다. 바로 어을우동보다 조금 앞선 시기를 산 유감동(兪甘同)이다. 그녀의 생몰년 미상으로 돼 있다. 다만 세종대에 남자 40여 명과 간통했고, 이로 인해 처벌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종실록에 관련 기사가 정확히 17번 등장한다. 유감동의 남편은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였다. 그가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유감동을 현지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유감동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서울로 올라와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되고, 이에 최중기가 그녀를 버린 것으로 돼 있다. "본 남편은 지금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입니다. 중기가 무안 군수가 되었을 때에 거느리고 가서 부임했는데, 이 여자가 병을 핑계하고 먼저 서울에 와서는 음란한 행실을 마구하므로 중기가 이를 버렸습니
조선시대에는 강간범을 명나라 형법인 대명률(大明律)에 의해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특히 10대 여아를 강간한 경우 교수형에 처했다. 교수형과 참형은 같은 사형이지만 신체가 훼손되는 참형을 보다 무겁게 여겼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평해(平海)에 있는 죄수 김잉읍화(金仍邑火)는 여덟 살 난 계집아이를 강간했사오니, 율(律)이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같은 강간범이면서 참형보다도 더 혹독하게 처벌되는 경우가 있었다. 남자종인 '노'(奴)가 상전의 아내를 강강한 경우로, 이때는 가장 잔인한 형벌인 능치처참형에 처해졌다. 아래 인용문에 등장하는 '내은이'는 양민의 딸이다. '내은이는 굳세게 항거하다가 5경(五更)에 이르러 힘이 빠지니, 이에 박질이 그의 손발을 묶고 강간(强姦)하였다. 내은이가 도망하여 한성부에 호소하였다. 한성부에서 실구지 형제와 박질을 잡아다가 국문하니 사실대로 토설(吐說)하였다. 의정부에 보고하여 계문하니, 율(律)에 의하여 능지처참하였다.'- 지금까지 거론한 인물은 남자종이거나 양민남자다. 이와 달리 양반 남자가 강간범이 되면 어떤 처벌을 받을까도 궁금한 대목이다. 답을 미리 말하면 태반이 유권무죄(有權無罪
지난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특별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때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92년 개성 왕건릉에서 출토된 고려 태조상이었다. 조각상은 발견 초기에는 단순 청동불상으로 알려졌으나 그후 고려 태조의 동상으로 확인됐다. 문헌추적 결과, 태조상은 951년 제작돼 개성 봉은사에 봉안됐고 이후 고려 전시기에 걸쳐 국가의례 때마다 주된 숭배 대상이 됐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성리학 제례법과 맞지않는다는 이유로 1429년(세종 11) 개성 왕건릉 옆에 매장됐다. 당시 서울에 왔던 태조상은 머리에는 통천관(通天冠)을 썼고 몸체는 벌거벗은 나상(裸像)이었다. 이밖에 남근(男根)이 2㎝밖에 안 될 정도로 매우 축소된 모습이었다. 따라서 일부 신문은 이를 '번데기'로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노명호 교수는 "왕건상이 앉은키는 84.7cm로 성인 남자와 비슷한 크기인 데 반해 남근은 유아의 것처럼 표현했다"며 "이는 색욕을 멀리하는 불교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왕건 조각상에 대한 언급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에도 등장한다. 이와 관련, 우리지역 청원 문의도 언급돼 있어 지역적인 관심을 크게…
전회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대가 끊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손자 '숙길'(淑吉)을 봤고, 이후 점쟁이의 말에 따라 친모가 아닌 유모(乳母)에게 젖을 물리게 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양아록은 시간 흐름에 따라 발육과 유년기 학습 과정도 시형식을 빌려 매우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始立', 즉 '일어서기를 시작하며'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두 손으로 다른 물건 잡고 / 양다리에 의지해 쪼그리고 앉는다 / 한 달을 이와 같이 하더니 / 점점 제 스스로 오금을 펴고 일어선다 / 동지가 되어 양의 기운이 다시 생기려 하니 / 이날에 맞추어 네가 일어서는구나.'- 앞서 언급한대로 숙길이에 대한 할아버지 이문건의 기대는 일반의 상상을 크게 웃도는 것이었다. 이문건은 숙길이가 유교적 소양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조선의 문신답게 공자를 이상형으로 삼았다. '너의 조급하고 경망한 마을을 제거하고 / 성현의 발자취를 쫓아야지 / 마음에 잘 간진해주고 상실하지 않는다면 / 이것은 孔子를 잘 배우는 것이다 / 네 자신에게 잘 머무르게 하면 어찌 조상의 복을 받을른지 알겠는가 / 亨達은 정말 운명에 달려있고 / 富貴는 얻기가 어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묵재일기 외에 양아록(養兒錄)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양아록은 글자 그대로 '아이 양육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이상주 박사가 발굴·소개하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내용은 할아버지 이문건이 손자 '숙길'(淑吉)의 출생~16살 기간의 성장과정, 질병내용, 공부시키는 과정 등을 한시 형태로 적었다. 전체 분량은 60여쪽으로 이중 성장과정과 질병·사고와 관련된 것이 각 16건, 교육에 관한 것이 8건 등이다. 보통의 경우 육아일기는 부모가 아이를 대상으로 쓴다. 그러나 양아록은 특이하게도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상으로 썼다. 가정사의 굴곡이 많았다. 이문건은 충북 괴산 태생 안동김씨 부인(돈이)과 사이에 6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온'이라는 아들과 '순정'이라는 딸만 성인으로 성장하고 나머지는 일찍 병으로 잃었다. 뿐만 아니라 아들 '온'도 이문건 나이 64살 때 '숙길'을 포함해 1남3녀를 남긴 채 병사했다. 이문건은 가문의 대가 끊길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고, 때문에 하나 남은 친손자 '숙길'에게 집착하게 된다. 참고로 숙길의 셋째 누이는 동래부사 순절도로 유명한 송상현의 부인이 된다. 이문건은 손자 '숙길'이 태어나
전회에 이문건이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괴산에 집을 신축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괴산 새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상주목사와 경상도관찰사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문건은 전직 승정원 도승지 직함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관향 성주지역에서 나름의 예우를 받고 있었다. 묵재일기에는 성주 사족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음은 1562년 9월 27일자 일기 내용이다. '내가 손자를 데리고 유향소에 가자, 참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이유가 통문을 돌려 물품을 거두어서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은 것이다. 나를 대접하는 것을 명분삼아 모였다.'- 이문건 부의 원천은 노비와 전답이었다. 그는 많을 때는 남자종 83명, 여자종 50명 등 총 130여명의 노비를 거느렸다. 물론 이들의 상당수는 이른바 '신공노비'였고 때문에 괴산서 멀리 떨어진 충주, 보은 등에도 거주했다. '신공노비'는 주인집과 떨어져 사는 대신 매년 추수한 곡식의 절반 정도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말한다. 이문건은 신공노비가 약속한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기르던 소를 끌어오기도 했다. 그렇다해도 노비 130여명은 매우 많은 규모다. 이문건도 당시 여느 양
전회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유배지 경상도 성주에서 노비들을 원격조종, 처가가 있는 우리고장 괴산에 집을 신축했다고 밝힌 바 있다. '1551년 7월 15일자: 서동이 괴산에서 돌아왔다. 목재를 계곡 근처로 끌어다 놓았으나 계곡의 물이 없어서 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듬해 4월 25일자: 오늘 괴산에서 기둥을 세운다고 하는데, 비가 오니 일이 좋지 않겠다.8월 12일: 집을 덮는 철장물을 가져갔다.'- 일기를 보면 26칸 기와집으로, 규모가 꽤나 큰 편이었다. 새로 지은 괴산집이 지금의 어느곳에 위치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지금의 문광면 일대에 위치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문건이 귀양을 가자 부인 안동김씨(김돈이)가 한양에서 친정집이 있는 괴산 문광면으로 내려와 이문건가의 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또 조카 이휘를 포함한 성주이씨 묘역이 문광면 유평터널 부근 야산에 존재하고 있다. 이문건은 성주 유배생활 중에 3번이나 괴산을 찾는 것으로 나타난다. 첫번째가 바로 새 집이 완공된 후였다. 그는 1552년 5월 22일부터 7일 동안 괴산에 머물다 성주로 돌아간다. 이밖에 그는 집수리를 할 때(1561)와 아들 장례를…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조선 성종과 명종 사이를 산 인물로 호는 묵재, 본관은 경상도 성주다. 그는 그의 호를 딴 '묵재일기'를 32년간 쓴 것으로 유명하다. 학계에서는 조선전기 양반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3종류의 개인일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유희춘의 미암일기, 오희문의 쇄미록 등이 그것이다. 이들 일기의 행간을 하나하나 살피면 당시 양반들의 사유체계와 부축척 방식, 그리고 가정사의 시시콜콜한 사연을 손금보 듯 알 수 있다. 그는 73살 생애에 두 번의 유배생활을 경험한다. 그는 영남사림의 거두인 조광조 제자였다. 1519년 그 유명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때 다른 제자들의 외면과 달리 이문건 형제는 조광조를 문상했다. 이것이 빌미가 돼 2년 후 훈구파에 의해 형 충건은 유배당한 후 사사됐고, 이문건은 전라도 낙안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이문건에게는 조카 이휘라는 인물이 있었다. 장래가 촉명했던 그는 택현설, 즉 "어진 임금을 선택해서 세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문건도 택현설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지금의 성주로 '본향안치'를 당해야 했다. 본향안치는 유배형 중 가장 약한 형으로, 고향에서
주민 생활권에도 이른바 물방울 이론이 작용한다. 조치원은 행정구역상 충남에 속하나 청주와 가깝기 때문에 청주를 생활권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옥천은 그 반대 경우다. 행정구역상 충북에 속하나 대전과 가깝기 때문에 대전을 생활권으로 하는 군민들이 많다. 이와 관련, 몇해전에는 대전광역시로 편입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옥천은 행정명이나 편제에 있어서 도내 다른 어떤 시군보다 역사적으로 복잡한 변화를 겪었다. 옥천군의 신라 때 지명은 고시산군(古尸山郡), 경덕왕 때부터는 관성군(管城郡)으로 불렸다. 고려의 지방행정은 이른바 5도양계 체제였다. 5도는 행정, 양계는 국방 기능이 중요시됐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꽤나 불합리하나 당시는 북쪽(북계)와 동쪽(동계)을 군사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이런 배경하에 옥천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는 옥주(玉州)로 불렸다. 그러나 조선 건국기만 해도 옥천은 충청도에 속하지 않았다. 옥천이 지금의 모습처럼 충청도에 속하게 된 것은 조선 전기인 태종 때였다. 이때 보은, 영동, 황간, 청산 등도 함께 충청도로 편입됐다. '경상도 옥천(沃川)·보령(報令)·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을 충청도에 옮겨 예속시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權敏手)가 도내(道內)에 장문(場門)을 설치하겠다고 청하므로 호조(戶曹)에 의계(議啓)하도록 했더니, 또 각도에도 아울러 설치하자고 청했다."- 전회에 충청도관찰사 권민수(權敏手·1466∼1517)라는 인물이 건의, 우리고장에도 장시(場市·5일장)가 처음 들어서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갑자사화 때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하다가 영외(嶺外)로 유배됐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또 홍문관부제학이 되어서는 군정을 엄히 할 것,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 기강을 바로 세울 것 등을 주청하기도 하는 등 강단있는 관료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는 사관으로부터 악평을 받은 인물로 유명했다. 심지어 당시 사관은 '술주정하다 죽었다'라고 졸기를 쓰기까지 했다.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가 졸하였다. 권민수는 심술이 심벽하고 불측하여 겉으로는 화평하나 속으로는 시기를 부려, 선류(善類)에 대해서도 속으로 시기하고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젊어서부터 글한다는 명성을 도둑질하여 명류에 끼었었고 또한 성격이 사나와 기세를 잘 부렸으며, 벼슬과 세력이 점점 높아지매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술주정하다가 죽었다.'- 사관(史官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 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 아으 다롱디리 / 시장에 가 계신가요 / 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 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 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악학궤범 권5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백제 가요인 '정읍사'(井邑詞)이다. 정읍사는 아내가 행상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높은 곳에 올라 남편을 기다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망부가(望夫歌)다. 그러나 정읍사는 경제사적인 시각에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적인 시(詩)가 된다. 남편의 직업이 '행상'(行商)이기 때문이다. 행상은 보통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으로 구분된다. 정읍사의 행상 남편이 보상인지, 부상인지는 내용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은 대형마트 등에 밀려 장시(場市)의 일종인 5일장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장시는 양민들의 유일한 교역장소이자 정보 너트워크의 공간이었다. 장시에 나가 막걸리를 곁들인 대화를 나눠야 이웃 동네를 비롯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혹자는 장시를 '조선시대 인터넷'이라
상서(上書)는 일종의 민원서로, 백성들이 수령이나 관찰사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그 내용은 산송(山訟)과 효행(孝行)·탁행(卓行)의 정려(旌閭)를 위한 것이 주류를 이뤘다. 인원이 많을 경우는 연명하여 올리기도 했다. 상서를 접수한 관찰사나 수령은 이를 검토하고 그 처분 내용을 문서의 좌편 하단의 여백에 써놓았다. 이것을 '제음'(題音) 또는 '제사'(題辭)라고 불렀다. 수령은 처분한 내용을 상서를 올린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관례였다. 상서는 수령에게 1차로 올리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하면 2차, 3차 계속 올렸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에게까지 올렸다. 이러한 상서는 당시의 사회사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사례는 많지 않으나 시골 지식인이 직접 임금에게 상서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상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임금의 집무공간에까지 전달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정황상 신문고 제도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임금에게 좋은 내용의 상서를 올려, "역마로 모셔오라"는 소리를 들은 인물이 있다. 바로 우리고장 옥천의 곽유(郭瑜)라는 인물이다. 그는 실록에 딱 한번 이름이 보일 뿐 사마방목(과거 합격자 명
조선시대 죄인을 심문하는 방식의 하나로 추국(推鞫)이 있다. 추(推)는 죄를 심문한다는 뜻이고, 국(鞫)은 죄인에게 물리력을 쓰면서 죄를 추궁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고문을 동반한 심문이다. 이와 달리 물리력을 쓰지 않고 심문하는 것은 평문(平問)이라고 불렀다. 추국 중에서도 강상(綱常)을 어긴 죄인에 대해서는 이른바 '삼성' 추국을 했다. 이는 임금의 특명에 따라 의정부·사헌부·의금부 등 세 관원이 합석하여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는 삼강오륜을 어긴 사람은 강상죄인(綱常罪人)이라고 해서 중죄로 다뤘다. 조선 세조 때를 산 인물로 최청강(崔淸江·?~?)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강상윤리라는 시대의 불운을 만나 관직생활을 망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영의정 권람의 말이다. "최청강(崔淸江)은 천안군사에 제수되었는데 실상이 없습니다. 연산(連山)에 있으면서 거짓으로 노모를 따른다고 하여 서울에 살면서 사직하였고, 어미가 죽어서는 분상(奔喪)하지 않고 길복 차림으로 연산에 돌아갔으니, 천총(天聰)을 기망한 것이 매우 심합니다."- 인용문중 '분상'은 먼 곳에서 부모가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밖에 '군사'
조선은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이 응대했다. 반면 명나라는 환관을 조선국의 사신으로 보냈다. 이같은 현상은 양국 관계가 사대(事大)와 조공무역을 바탕으로 맺어졌 때문에 발생했다. 명나라는 사대를 약속한 조선을 국가 실체로 인정해 주는 대신 은(銀), 말(馬), 처녀 등의 조공을 요구했다. 15세기 무렵 조선에 자주 온 명나라 사신으로 황엄(黃儼·?-?)이 있다. 그는 황해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명나라 국경을 넘어가 잡일을 하면서 학식을 쌓았다. 그는 본래 평민 출신이라 예의범절을 잘 몰랐고, 따라서 조선에 오면 자주 거만하게 굴었다. '임금이 태평관에 나아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환관(宦官) 황엄 등의 행동거지가 무례하므로, 임금이 뜻에 맞지 아니하여 잔치를 재촉해 파하였다.'- 사대를 약속한 조선은 환관출신 사신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면 임금이 몸소 궁궐 밖까지 나가서 이들을 전송해야 했다. 말 그대로 굴욕으로, 이날은 황엄이 제주도에 있던 구리 불상을 건네받은 후 귀로에 올랐다. '황엄 등이 동불(銅佛) 3좌를 받들고 경사로 돌아가니, 임금이 반송정(盤松亭)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우군총제 조면(趙勉)을 보내어
전회에 김익수(金益壽·?~?)라는 인물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일반에 알려진 어사는 암행으로 비리를 적발하는 등 사정의 상징처럼 돼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 전기는 그렇지 않았다. 푸대접을 당하는 장면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그 주인공의 한 명이 김익수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의 일화다. '신은 말을 타고 다니느라 피곤한데다가 밥먹을 겨를도 없어서 기갈이 심했으나 전혀 음식을 공궤(供饋)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도 역시 이와 같았으므로 또 밥을 먹지 못한 채 나왔습니다. (…) 이처럼 대우할 수는 없는 것인데, 사체가 지극히 매몰스럽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형조참판에 이어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 그리고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관상감제조에 오르는 등 관료의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관상감은 천문·지리·달력, 측후 등에 관한 일을 전담했던 관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다. 그의 아내는 질투심이 병적으로 심했다. "내가 헌부의 죄수들을 보니 김익수의 처가 그의 계집종 봉황(鳳凰)의 남편을 시켜 야간에 몰래 자식이 있는 익수의 첩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하여 간사(姦事)를 저지르게 한 것 같
조선은 농업국가였고, 그중에도 벼농사를 가장 중시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정치 중 농사보다 더한 것이 없고, 그 농사의 요체 중 수리(水利)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지리지는 수리와 관련된 내용으로 제언(堤堰)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제언은 인공적으로 쌓은 저수지나 보를 말한다. 지금의 저수지는 그 규모가 무척 큰 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방죽도 제언으로 표현했다. 벼는 마지막 추수기를 제외하고 생육기간 내내 물을 필요로 하는 작목이다. 때문에 벼농사를 잘 지으려면 제언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사료에는 제언 축조를 게을리한 고을 수령에게 곤장을 때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태종 18년의 실록 기사에는 우리고장 충청도와 관련된 내용도 등장한다. '청주 목사 김매경·판관 윤번·충주판관 장안지·진천 현감 진운수·죽산 현감 김종서에게 각각 태(笞)50대를 때려서 환임(還任) 시키니(…) 행대(行臺) 정길흥이, 김매경 등이 제언을 수축(修築)하지 않았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수령'(守令)은 군수와 현령의 앞뒷말을 취한 단어로, 지금의 시장·군수와 같은 지방관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들에게 곤장을 쳤다는 것은 당시 조정이 제언을
괴강 건너편 괴산읍 능촌리에 충민사(忠愍祠)라는 사당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김시민(金時敏·1554∼1592) 장군의 위패만을 모신 사당으로 알고 있다. 김시민은 임란 종전후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릴 정도로 명장이었다. 그는 왜적 2만명을 맞아 불과 3천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 진주성에서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였다. 비록 적의 유탄을 맞아 숨지기는 했으나 진주성을 방어해 냈다. 그러나 충민사는 단수가 아닌 복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 다른 주인공은 김제갑(金悌甲·1525∼1592)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다. 그는 왜장 모리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 원주를 침공하여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경내의 요새인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지구전을 벌였다. 그러나 70살이 거이 다 된, '고령의 문관'이었던 거는 산성의 허점을 틈탄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됐고, 부인, 아들 등 전가족이 몰살됐다. 사실 그가 전장에서 최후를 맞은데는 불운이 크게 작용했다. 방금 '고령의 문관'이라고 표현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령인 관계로 '임지를 교대하라'는 명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쪽…
전회에 백두대간 운하사업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경세가 하륜도 다음과 같은 말로 적극적인 찬성을 했으나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역시 엄청난 규모가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윤이 말하였다. "기쁨으로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의 도(道)입니다. 만일 의리에 합한다면, 비록 칼날에 죽더라도 또한 분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쁘게 하는 도리는 창고를 열어서 양식을 주고 밤에는 역사를 쉬게 하여 피로해서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역사'는 세곡선에 올라 노를 져었던 역부(役夫)를 의미한다. 이때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인물이 한옹(韓雍·1352∼1425)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씨(韓氏)는 '청주'를 단일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청주한씨는 한란 이후 곡산(谷山), 평산, 안변, 한양, 당진 등 한때 10여 본으로 분관했다. 그러나 지금은 곡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원됐다. 따라서 현재의 한씨는 엄밀히 말하면 청주, 곡산 등 2개의 본관이 존재하고 있다. 한옹이 바로 곡산을 관향으로 갖고 있다. 현재 곡산 한씨는 전국적으로 4천9백여명(1천5백여 가구·
조선초기 경상도 세곡(稅穀)은 마산창 등 남해안 3창에 모아져 서해를 거쳐 한양 경창으로 운송됐다. 그러나 바닷길로 운송하다 보니 사나운 바람을 만나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태종 3년(1403)의 침몰 사고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무려 34척의 배가 동시에 침몰했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해중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만호(萬戶)가 사람을 시켜 수색하니, 섬에 의지하여 살아난 한 사람이 이를 보고 도망하였다. 쫓아가서 붙잡아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 하였다.'- 실록은 이날 침몰 사고의 재산손실과 인명희생 규모를 "쌀은 만여 석이고, 사람은 천여 명"이라고 적었다. 태종은 이때부터 경상도 세곡을 바닷길이 아닌 육로로 운반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태종은 생각이 대범했다. 그는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세곡을 운반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 백두대간에 운하를 뚫어 남한강과 낙동강 수계를 연결하는 구상을 한 바 있다. 결국 환경론자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디어의 원조는 조선…
고려 공양왕 때에는 말 한마리를 팔면 노비를 두세명 살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초에는 14세~40까지의 노비로는 무명 400필, 14세이하, 40이상의 노비로는 무명 300필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말(馬)의 값은 450필이었다. 노비가 말보다 더 싼 셈이었다. 이밖에 여종을 팔 때애는 뱃속의 태아까지 값을 쳐서 받았다. 16세기 인물인 미암 유희춘은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열살짜리 사내종에서부터 예순일곱된 늙은 계집종까지 모두 여섯명 노비를 상으로 주었다. 우리고장 보은 출신으로, 조선 전기의 홍윤성(洪允成·1425~1475)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종을 막 대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종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뿐만 아니라 겁탈하는 모습이 실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생겨난 속담이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 였다. '시첩(侍妾)·노복(奴僕)이 조금이라도 어기고 거슬리면 문득 용서하지 않고, 궁검(弓劍)을 쓰기까지 하였으며, 아내 남씨에게 자식이 없어서 같은 고을의 사족 김자모(金自謀)의 딸을 강제로 취하여 장가들었다'.- 노비 목숨을 경시한 대표적인 사례로 이른바 '용석(龍石)의 사건이 있다. 그는 사랑하던 양반집 종년을 데리고 도망갔으
지리서는 말 그대로 당시의 지리 환경과 문화에 대한 인문적인 기록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수정할 내용이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세종 때의 관찬 지리서로 '동국여지승람'이 있다. 이를 새롭게 수정·보완한 것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제목에 '新增'(신증)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수정·보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행(1478∼1534)이 진전문(進箋文)과 서문(序文)을 쓰는 등 사실상 대표저자 역할을 했다. 진전문은 책의 성립 과정을 알리는 문장을 말한다. 이행은 용재집을 남길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그러나 이행은 유배와 이배를 거듭하고 또 평안도 유배지에서 최후를 맡는 등 불우한 삶을 살았다. 첫번째 시련은 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한 것에서 찾아왔다. 그는 이 사건으로 곤장 60대를 맞고 우리고장 충주로 유배됐다. '전교하기를, "승지 박열·이계맹은 금부에 가서 홍문관 원에게 형장 때리는 것을 감독하여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라. 박안성은 장형을 속받고 진잠에 부처하고, 응교 최숙생은 장 60을 때려 신계에 부처하고, 부
조선 시대에도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눴다, 다시 주거 형태와 신역의 부담 형태에 따라 각각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뉘었다. 주인집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노예를 솔거노비, 관청이나 주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노예는 외거노비라고 불렀다. 외거노비는 약간의 자유를 누리는 대신 주인에게 곡식, 베 등 일정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를 신공(身貢)이라고 불렀다. 노비는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으로 물건처럼 취급됐다. 가축이나 토지에 비견해 '말하는 재산'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는 단위를 '名'(명), '員'(원)이 아닌 '口'(구)라고 했다. 공노비 중에 선상노(選上奴)라는 노비가 있다. 말 그대로 지방에서 선발하여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노비를 일컫는다. 이들 선상노는 관원의 수행, 각궁의 잡역, 성상(城上), 방직(房直), 고직(庫直) 등을 담당했다. 성상, 방직, 고직 등의 표현이 다소 생소하다. 성상은 각 관서의 소장기물을 맡아 간수하던 노예, 방직은 관청의 심부름꾼으로 달리 '방지기'라고도 불렀다. 고직은 창고를 지키던 노예를 말한다. 실록에 우리고장 백성이면서 군복무하듯 서울로 올라간 선상노의 사례가 더러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회화사를 논할 때 조선 전기의 최고 작품으로 단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가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엄밀히 말하면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이 기획하고, 안견이 그린 작품이다. 안견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안평대군은 그에게 이런 종류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몽유도원도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산문과 시가 곁들여져 있다. 전회에 이현로와 정분에 대한 서술을 한 바 있다. '이현로가 벼슬이 떨어져서 충청도관찰사 안완경(安完慶)·체찰사 정분을 따라 충주(忠州)에 이르렀는데, 미처 말에서 내리기 전에 잡는 자가 끌어내리어 묶어서 담 그늘에 두었다.'- 인용문 중에 안완경(安完慶·?∼1453)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관찰사 안처선의 아들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만큼 전도가 양양했다. 안평대군과 함께 거명됐다는 것이 다소 불안하다. 안완경이 어떻게 해서 안평대군과 친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때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안평대군은 문신, 수양대군은 무신을 포섭하고 있었다. 안평대군이 안완경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용(瑢)이 정자양(鄭自洋)을 시켜 충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바람을 막고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풍수에서는 바람은 기(氣)를 흩어지게 하고, 물은 재화를 불러온다고 보고 있다. 사실 농사를 짓는데 있어 물을 얻지 못하면 재화를 얻지 못한다. 풍수상 물은 홀로 움직이지 않고 산과 함께 움직인다. 때문에 풍수를 '땅의 관상학'이라는 뜻으로 상지법(相地法)이라고도 한다. 이와 관련, 풍수는 산의 흐름인 맥을 '용'(龍)으로 표현했다. 풍수상 용은 그 모습에 따라 바르게 뻗은 정룡(正龍)과 치우쳐 뻗은 방룡(傍龍) 그리고 생기가 있어 보이는 진룡(眞龍)과 그렇지 않은 가룡(假龍) 등으로 구분한다. 이상에서 보듯 풍수는 주관적인 성격을 많이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때 천기(天氣)에 해당하는 풍수 내용을 발설해, 천지풍파를 일으킨 인물이 있다. 바로 이현로(李賢老·?∼1453)다. 수양대군 세조가 안평대군 이용에게 하는 말이다. "먼저번에 이현로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궁(宮)을 백악산(지금의 북악산 지칭) 뒤에 짓지 아니하면, 김보명의 말과 같이 정룡(正龍)이 반드시 쇠하고 방룡(傍龍)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이현로에게 말하여 여러 정승에게 고하라고 했는데, 말
[충북일보] 충북도가 청주시를 대상으로 진행중인 종합감사에서 도청 감사관실 일부 직원들이 시 소속 직원들에게 갑질을 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도 감사관실은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17일까지 청원구청에 감사장을 차려놓고 시 산하 전 부서를 상대로 종합감사를 벌이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갑질을 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제보자들은 "행정적 미비사항이나 지적사항에 대해서는 충분히 용인할 수 있지만, 일부 사안에 대해 대답을 요구해놓고 막상 대답을 하니 말투와 태도 등에 대해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 취급을 받았다"며 "게다가 행정적 미비사항도 아닌 부분에 대해서까지 억지로 지적사항에 끼워 넣으려는 태도에 기가 찼다"고 토로했다. 해당 제보자들이 당했다는 언어적 갑질폭력을 구체적으로 기사에 서술할 경우 제보자가 특정될 수 있어 밝힐 순 없지만, 이들은 대체로 "인격적인 모욕감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한 직원은 제보를 하면서 "안그래도 업무에 회의를 느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기가 힘들고 사표를 내고 싶다"고까지 말하고 울먹였다. 또 다른 제보자는 감사에 임하는 직원들의 업무이해도를 문제 삼기도 했다. 한 제보자는 "감사를 보는 직원이 업무를 너무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충북도가 청주 오송에 들어서는 철도클러스터 국가산업단지의 성공적 조성을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신청 준비에 공을 들이고 있다. 내년 상반기 내 예타가 마무리돼야 오는 2029년까지 사업을 완료한다는 도의 구상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16일 도에 따르면 오송 철도클러스터 국가산단의 공동사업 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충북개발공사는 오는 9월 기획재정부에 공기업 예타를 신청할 계획이다. 공공기관이 진행하는 사업 중 총사업비가 1천억원 이상이면 공기업·준정부기관 사업 예타를 받아야 한다. 오송 국가산단 조성에는 5천500억원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도는 이때 예타가 진행될 수 있도록 힘을 쏟고 있다. 공기업 관련 예타 신청은 1월과 5월, 9월 등 연 3회로 제한돼 예타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면 사업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신속 예타'로 신청할 계획인데 대상에 반드시 반영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 제도는 예타 기간이 기존보다 3개월 정도 단축돼 6개월 정도면 결과가 나온다. 그런 만큼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게 된다. 도는 예타 통과를 위한 준비도 철저히 하고 있다. 이 사업이 예타를 통과하려면 경제성이 중요한 만큼 기업의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증평·진천·음성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중임을 맡겨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총선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약속드린 미래 비전을 군민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임호선(61)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증평·진천·음성)은 겸손한 자세로 소통하며 어려운 민생부터 확실히 챙겨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며 "서민경제를 살피지 못하고 국정운영을 독단적으로 하며 과거로 퇴행하려는 정부에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민심이다. 제1야당으로서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적극 따르며 민생해결과 지역발전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앞으로의 의정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22대 국회에서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활동을 원하고 있다. 임 당선인은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현재도 농촌에 살고 있다"며 "지역적으로도 증평·진천·음성군이 농촌이기에 누구보다 농업농촌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임 당선인은 "농촌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