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永同)은 충청북도에서 최남단에 있는 군이다. 그런데 강원도 동쪽을 영동(嶺東)이라 부르다 보니 음이 같아서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영동(嶺東)은 대관령의 동쪽이라는 뜻인데 대관령은 과거에 강릉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다니던 주요 교통로였으며, 이를 기준으로 동쪽은 영동지방, 서쪽은 영서지방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영동(嶺東)이라고 하면 백두대간의 축인 태백산맥의 동쪽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며 기상 예보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나 영동(永同)은 충북의 작은 도시이므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동(永同)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으로 대왕산이 신라의 영토였고, 비봉산(飛鳳山)의 조천성(助川城)은 백제의 전초기지로서 두 나라의 치열한 각축장이 었다. 신라 초까지 길동군(吉同郡)으로 불리다가 신라 35대 경덕왕(757년) 때 지명의 한화(漢化) 정책에 따라 지금까지 사용하는 이름인 영동군(永同郡)으로 개칭하고 상주에 예속시켰으며, 양산현(陽山縣, 양산면)과 황간현(黃澗縣, 황간면)을 속현으로 하였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계산(稽山) 또는 계주(稽州)라 개칭하고 승격시켜 자사(刺史)를 두었으나 1005년(목종 8년)에 자사를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년)에 또다시 상주(尙州)에 소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년)에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 원래는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에 해당하는 신라의 상주에 소속된 현이었지만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되었다. 1895년(고종 32년)에 군(郡)이 되고 1906년 옥천군의 학산면, 양산면, 용산면을 편입하고 1914년에 황간군을 편입하였으며 1940년에는 영동군의 읍소재지인 영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면 영동(永同)이라는 지명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영동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길동(吉同)이었는데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이수(二水)'를 합쳐 '영(永)' 자가 되고, '길동(洞)'의 '동(洞)' 자를 따서 영동(永同)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길동'이란 오랜 옛날부터 이 지역에 있었던 마을을 부르는 지명이었지만 '이수(二水)'는 지명으로 사용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아마도 영동읍에는 주곡천(主谷川)과 양정천(楊亭川)의 이수(二水)가 합류하여 영동천(永同川)을 이루고 있으므로 '영(永)'이라는 한자를 '이수(二水)'로 풀이하여 만들어낸 말로 추정이 된다. 이러한 한자 자형을 이용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가 있다. "해 두 개가 서로 맞잡고 있고, 산 네 개가 빙 둘러 있고 두 왕이 한 나라에서 살고, 입 하나가 입 네 개를 삼키고 있는 글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田'이다. 왜냐하면 '日'자를 두 개 포갠 모습이 '田'이며, 중간의 세로 획은 서로 공유한다. 같은 윈리로 '山'자 네 개를 빙 두르면 역시 '田'자가 된다. 그리고 '王'자를 가로와 세로로 겹치면 역시 '田'자가 되는데, 그것은 어떤 구역을 연상하게 하는 큰 네모 안에 들어 있어서 두 왕이 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또한 큰 '口'자 안에 작은 '口 '가 네 개가 들어 있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행정구역의 변경에 따르는 지명의 변화는 병합된 지역의 지명이 사라지고 병합하는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합성지명법에 의하여 한 자씩 따서 이름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영동(永同)이라는 지명에서 '영(永)'이라는 지명요소가 만들어진 유래를 설명하기가 어렵게 되자 한자 '영(永)'의 형태가 '이수(二水)'가 합쳐진 형상이므로 이를 가지고 유추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영동의 옛 이름은 '길동(吉同)'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인 영동(永同)으로 바꾼 것은 이두식 한자 표기를 중국식 표기로 바꾼 것이므로 '길'이라는 음을 훈차하여 '영(永-길 영)'으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타당한 유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중리에 도롱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중리 저수지에서 안족봉 낮은 골짜기를 따라가면 된고개골을 지나 피고개를 넘어 미원면 용곡리로 가게 되지만 안족봉을 향해 직접 올라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도롱골이라는 마을을 만나게 된다. 예전에는 깊숙한 산골짜기를 가리키는 지명이었겠지만 오늘날 이곳에 천연염색 공방을 비롯하여 가죽공방 등 공예 체험장들이 들어서면서 도롱골 공예 마을이 생겼다. 그러면 도롱골의 '도롱'이란 무슨 의미일까? 충북의 지명에서 도롱골이란 지명을 찾아보니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덕암리의 '도롱골'을 비롯하여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충주시 노은면 법동리, 충주시 앙성면 지당리, 진천군 이월면 동성리,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영동군 양강면 묘동리, 영동군 상촌면 돈대리, 영동군 매곡면 공수리, 영동군 양강면 만계리, 제천시 봉양읍 장평리,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등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는데 유사한 음을 가진 '도롱뇽'과 연관지어 '도롱뇽이 사는 깊은 산골짜기'라는 의미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그 유래가 전해지지 않는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지역의 지명에 나타나는 '도롱'의 유래를 보면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道龍洞)은 조선시대에 공주군 탄동면의 지역으로 뒷산의 모양이 도룡뇽과 같으며 산의 모양새 또한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도롱 또는 도룡이라 불렀다고 전해지며, 경북 청도군 운문면 방음리의 방음산은 까치산, 도롱굴산으로도 부르는데 도롱골산이란 정상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의 형상이 '도롱이(비옷)'와 비슷해 도롱골로 불린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와같이 지명에서 '도롱'의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도롱뇽'이나 농민들의 필수품인 '도롱이'와 연관짓게 되었으나 '도롱이'의 경우에는 자주 사용하면서도 그 이름이 생겨난 본래의 의미를 모르므로 어쩔 수 없이 그 지명을 가진 지역이 도롱이의 형태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롱'의 의미는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하나는 돌아가는 형태의 지형을 나타낸 것으로 '돌은골'이 '도롱골'로 변이된 것으로 볼 수가 있는데 회룡곡(回龍谷), 회룡포(回龍浦)와 같이 한자로 표기된 지명들로 보아 설득력이 높다고 하겠다. 또 하나는 짚으로 만든 비옷을 '도롱이'라 명명한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농사일을 할 때 비를 막기 위하여 도롱이라는 비옷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도롱이는 짚이나 띠같은 풀로 촘촘하게 잇달아 엮어 들이치는 빗물이 스며 들어가지 않게 하고, 줄거리 끝부분은 그대로 드리워 끝이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빗물이 안으로 스며들 겨를이 없이 줄기를 따라 땅으로 흘러내리게 만들었다. 길이는 활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둔부선(臀部線)까지 내려오게 하였으며 농촌에서 비오는 날 들일을 할 때 사용하였는데, 머리에는 어깨 너비 이상이 되는 삿갓을 씀으로써 우비의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도롱이는 도랭이, 도롱옷, 드렁이, 도링이, 되랭이, 되롱이 등의 여러 방언이 있는데 도롱이의 방언이 많은 것은 그만큼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도롱이를 한자로 '녹사의(綠蓑衣), 사의(蓑衣)'라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풀로 덮어서 가린 옷'의 의미이므로 '도롱'이란 '비를 가리기 위하여 몸을 덮는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며 '이'는 명사형 접미사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도롱골이란 '숲이나 산줄기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마을,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가리키는 말로 추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형의 형태를 묘사하는 지명의 명명 과정을 볼 때 골짜기나 산줄기가 곧은 형태가 아니라 돌아가는 형태라면 결국 둘러싸여서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도롱이라는 비옷도 몸을 한바퀴 돌아 덮어서 비를 피하는 물건이므로 결국은 '돌다(回)'라는 어근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음성의 진산이라고 할 수 있는 가섭산은 한자로 '迦葉山(가엽산)'으로 표기하면서 '가섭산'이라 부르고 있어 처음에는 매우 의아했었다. 부처님의 제자인 '마하가섭'의 이름을 따서 가섭사의 이름을 짓고 가섭사라는 절이 있는 산이라 하여 가섭산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지명의 유래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인도에 있는 가섭이 이곳을 다녀갔을 리도 없고 가섭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므로 아무리 생각해도 가섭과의 연관성을 발견하기가 어려워 절의 이름을 짓는 일반적 과정을 생각해 보았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각지에 절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절의 이름을 지을 때 아무 근거도 없이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의 이름에는 위치적 정보가 가장 중요하기에 절이 지어진 지역에 전해지는 자연 지명을 근거로 하되 유사한 음의 불교 용어를 사용하여 절의 이름을 짓거나 아니면 절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자연 지명을 근거로 하여 유사한 음의 한자로 표기하고 절의 이름은 불교 용어로 지어 '○○山 ○○寺'라 부름으로써 위치 정보를 표기하곤 하였다. 예를 들면 속리산(俗離山)에는 순우리말 지명인 '수리산(높은 큰 산)'이라는 지명이 원래 존재해 왔는데 '수리산'을 중국 발음으로 하여 한자로 표기하면 '俗離山'이 되고 또 그 의미도 '속세를 떠난다'는 불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불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을 오가던 승려들이 자연스럽게 '俗離山'으로 표기하고 우리말 발음으로는 '속리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절의 이름은 불교적 의미를 지닌 '법주사(法住寺)'로 하면서 '속리산 법주사'라 하여 위치를 알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음성읍에 있는 가섭산은 원래의 산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안타깝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전국의 지명에서 '가섭'이라는 순우리말 자연지명을 찾아보니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의 용문산 정상이 가섭봉이며, 경북 문경시 호계면 호계리의 '가섭',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하림리의 '가섭', 경기도 아산시 실옥동의 '가섭이들'처럼 여러 지역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음성의 가섭산도 주변에 '가섭 마을' 또는 '가섭들'이라는 지명이 존재했기에 산의 이름이 '가섭산이 되었을 것이며, 이곳에 세운 절의 이름을 지을 때 부처님의 수제자이며 염화시중의 미소의 주인공인 '가섭'과 이곳에 전해오는 자연지명의 발음이 유사하기에 '가섭사'를 절의 이름으로 하다 보니 산의 이름과 절의 이름에 '가섭'을 사용함으로써 산의 이름과 절의 이름이 같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순우리말 지명에 쓰인 '가섭'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가섭'이란 고어에서 '갓+섣'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갓'은 '가슴, 몸'을 의미하는 고어로써 여자의 몸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여자를 '가시나, 가시내'라고 하게 되었고 '가시버시'는 아내와 남편을 의미를 나타내는 등 '가시'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섣'이라는 고어는 '땅, 토지'를 뜻하는 말로 '섣-설-설엄-서엄-섬'과 같이 변이되었으며 지명에서 마을 이름으로 흔히 쓰이는 '-실'이라는 지명 요소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볼 수가 있다. '여자의 땅'이란 곧 '어머니의 땅'이요 '어머니와 같이 곡식을 길러 먹여 살리는 땅'의 의미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그래서 경기도 아산시 실옥동의 '가섭이들'은 '농사가 잘 되는 옥토'의 의미를 가진 말로 추정되며 경북 문경시 호계면 호계리와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하림리의 '가섭'이란 지명은 '농사가 잘되는 땅, 어머니의 품처럼 살기 좋은 포근한 땅'의 의미로 지어진 이름들로 본다면 지명 명명의 유연성으로 보아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가섭산 아래 어느 지역에 '가섭'이라 불리는 지명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섭산의 북쪽 줄기인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에는 가엽산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가섭산 남쪽에 가섭 마을이 있었다면 지형으로 보아 용추구레골이거나 아니면 전원마을로 개발된 도화마을 주변일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더 늦기 전에 주민들에게 전해오는 민담, 유래를 채집하여 가섭들 또는 가섭마을을 찾아내는 일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진천군 진천읍에는 백곡에서 흘러오는 백곡천이 진천읍을 가로질러 금강의 지류인 미호강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백곡천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고지도에 보면 진천읍 신정리와 삼덕리의 경계 지역에 흐르는 백곡천을 '우천(牛川)'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신정리 지역에는 '소강정(小江亭)'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주민들에게는 '소강징이'라 불리어 왔다. 영동군 황간면의 우천리(牛川里)는 본래 황간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쇠내'라 부르는 개천가에 있어 지금까지도 '쇠내'라 불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천(牛川)'이란 '쇠내'를 한자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전국의 지명에서도 '쇠내'라는 이름이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우천리,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 전남 고흥군 영남면 우천리, 전남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경북 영천시 청통면 우천리, 경남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경남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진천읍 신정리 지역의 '우천(牛川)'이라는 지명도 예전에 '세금천'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마도 한자로 표기하기 전에는 '쇠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옛날 '쇠내'라는 냇가에 정자를 짓고 '쇠내'를 '우천(牛川)'으로, '쇠내' 가의 정자를 한자로 미화하여 '소강정(小江亭)'이라 이름 지은 후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는 장면이 선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실제로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로 유명한 조선의 문신인 약천(藥泉) 남구만이 젊은 시절에 이곳에 머물면서 지은 '소강정에서'라는 시가 에 남아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쇠내'란 어떤 의미일까? 하천이란 두 산 능선 사이의 골짜기에 물이 흘러 생기는 지형을 말하는 것이므로 '두 산 능선의 사이에 있는 내'라는 의미로서 일반명사처럼 하천의 이름으로 흔하게 쓰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팔당댐 주변인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소내'라는 곳이 있어 다산 정약용이 지은 라는 시가 전해온다. 고지도에는 '우천(牛川), 소천(小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남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의 우천마을은 마을 뒷산이 소가 누운 것 같은 형상이라서 '소내'라 불려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소내 안골짜기를 쇠꼴(소곡)이라 부르고 쇠꼴재(소곡재)라는 고개도 있는 것으로 보아 '소'의 원형은 '소(牛)'가 아니라 '쇠, 새'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는 한자로 '금(金)'으로 표기하면서 '금곡(金谷), 금천(金川)'이라는 지명이 많이 나타나며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도 전해오는 자연 지명은 '쇠내'였던 것이다. 또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의 금곡이라는 지명도 '쇠골'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옛날 이곳에서 금을 채굴하였으므로 금곡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글자를 통해 유추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므로 지명이 지형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면 지명에 나타나는 '소, 쇠, 새'는 '두 지형지물의 사이'의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하겠다. 진천읍 신정리의 '소강징이'라는 지명의 경우에는 '배나무징이, 으능징이'라는 지명처럼 '징이'란 '정자'가 아니라 어떤 사물이 위치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던 순우리말이므로 '소강정(小江亭)'이라는 정자가 있기 전부터 전해져 온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지역에 '옹징이(瓮井)'이라는 자연지명이 있는데 커다란 항아리를 묻어서 사용하는 샘이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원래는 '독징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옹정(瓮井)'이라 표기하면서 '옹징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옹징이'라 부르는 샘의 안쪽(속)에 있는 마을을 '속옹징이'라고 부르다가 '소강징이'로 변이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하지만 지명은 언어의 변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며 이러한 지명에 생명을 불어넣고 아름다운 의미를 덧붙여 미화하는 것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자랑스러운 문화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의 삶의 흔적과 풍류가 남아 있는 이 지역을 문화적 명소로 만드는 일이 후손들의 도리가 아닐까?
지명에 쓰인 '용'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일반적인 동물은 일계(一界)에서만 사는데 조류는 하늘과 땅의 두 세계에서 살기에 신의 뜻을 전달해 주는 상징물로서 상서로운 동물로 대접을 받아왔다. 그런데 용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하늘과 땅, 물의 삼계(三界)에서 사는 동물이기에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녔다고 여겼으며 동아시아 문화에서 용이 황제를 상징하고, 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자리 잡은 것도 그런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용솟음)하는 것은 인간의 뜻을 하늘에 전할 수 있다고 믿어 왔기에 용을 수호신으로 숭배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의 지명에는 용이 들어있는 지명이 참으로 많이 나타난다. 용의 순우리말은 '미르'였으며 '미르'의 어원은 '물'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龍)은 한자어로서 오랜 세월 동안 중국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문화적 의미, 그리고 인도의 불교적 의미 등으로 인한 다양한 영향을 받아 복잡한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물과 가장 연관이 있기에 '미르'를 '용'으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과 커다란 물줄기인 강물의 형세가 바로 용의 모습과 흡사하기에 경상도와 제주지역을 아우르는 남부지역에서는 은하수를 '미리내'라고 하였다. 용은 땅에서는 물, 즉 강과 호수, 바다에서 살다가 승천하여 하늘 나라로 가면 은하수 곧 용천(龍川)에 산다고 믿었던 것이다. 순우리말의 '용하다'는 말은 '뛰어나다'는 의미이며 '용을 쓰다'는 '기운을 한꺼번에 몰아 쓰다' 또는 '있는 힘을 다해 버티거나 저항하다'라는 뜻이다. 또한 순우리말의 '용'은 '날아오르다, 하늘로 솟아오르다'는 의미로서 '용솟음치다'라는 말로 쓰이고 있다. 지명에서도 보은군 마로면 소여리에 '용소솜골'이 있는데 '골짜기에 용이 하늘로 솟아 올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지명에 많이 나타나는 '용소'는 한자로 '龍沼'로 표기하여 '용이 사는 못'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물이 솟구치는 웅덩이(폭포), 물이 용솟음치는 웅덩이'라는 말에서 '용솟음'이 '용소'로 변이된 것으로 보는 것이 '용소'라는 자연 지명이 많은 이유를 설명하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음성군 생극면 생리의 '용댕이'를 비롯하여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소사리의 '용댕이',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의 용댕이산 등 순우리말로 이루어진 지명에 용이 쓰이고 있으며, 전북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의 '용골, 용굴',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의 '용나루' 등에도 용이 쓰이는 것으로 보아 자연지명에 있는 '용'도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에서 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경남 양산시 삼호동에 '이응골'이 있는데 인근에 용소골과 용소천이 있으며 마을의 자연지명도 용소였다. 그래서 지금도 용소마을회관, 용소삼거리 등의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이응골→용골'의 변이를 인정한다면 '이응골'에 있는 웅덩이는 용소가 되며 '이응골, 용소, 용소골, 용소천'이라는 지명이 같은 지역에 나타나게 되는 숨겨진 고리가 한꺼번에 풀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지명에서는 '이응골'이라는 지명이 경북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리,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등지에 나타나고 있으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의 '이엉골'은 과거에 이곳에 있었던 큰 연못의 주변에 이엉(지붕을 덮기 위해 짚으로 엮은 것)이 많아서 이엉골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역시 연못을 가리키는 지명으로서 '솟구치다'는 의미의 '이엉→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러한 지명 예로서 단양군 영춘면 장발리의 '영골 계곡, 용바우(용암)'를 비롯하여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와 경북 안동시 길안면 송사리의 '영골', 전북 완주군 비봉면 대치리와 경남 거창군 북상면 병곡리,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의 '이영골'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로 볼 때 '이응골, 이엉골, 이영골, 영골' 들이 '용골'의 어원으로서 '물이 솟다, 물이 솟구치다'는 의미를 가진 순우리말이 존재하였는데 한자어 '용'과 음이 비슷하여 쉽게 동화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2024년 용띠 해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갔다. 하지만 사실 용띠 해의 시작은 1월 1일이 아니다. 띠는 양력도 음력도 아닌, 입춘을 새해 첫날로 하는 절기력(節氣曆)을 사용하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2월4일 입춘일부터 용띠 해가 시작된다. 따라서 양력 1월 1일부터 2월 3일 사이에 태어난다면 용띠가 아니라 토끼띠인 것이다. 예로부터 용과 관련된 꿈을 꾸게 되면 고위 관직에 오르거나 하고 있는 일의 성공을 암시한다고 믿었고, 장차 크게 이름을 떨칠 자식을 낳게 될 태몽이라고도 생각하였으며 지명에도 용과 관련된 지명을 선호했으므로 충북에도 용이 들어 있는 지명은 매우 많다. 하지만 지명에는 행정 지명과 자연 지명이 있는데 행정 지명은 자연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곳도 있지만 행정의 편의를 위하여 일정한 기준에 따르는 명칭을 부여하거나 행정관서를 중심으로 방향을 나타내는 방법(상하, 동서남북), 또는 동일한 명칭에 숫자를 순서대로 덧붙여 구별하거나 정해진 구역에 있는 자연지명들을 합성지명법에 의해 표기된 곳이 많아 지명에 들어 있는 원래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청주시 상당구의 용정동(龍亭洞)은 본래 청주군 서주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유정리(有亭里), 구곡리(九谷里), 용성리(龍城里), 구하리(九下里) 일부를 병합하여 용성과 유정의 이름을 따서 용정리라 하였으므로 실제로 용과 관련된 지명은 용성리(龍城里)라는 지명이다. 지금은 그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청주시에는 용정이라는 지명이 또 있었다. 지금의 강서동은 청주군 서강내일하면(西江內一下面)의 지역으로 용이 승천했다는 큰 우물이 있어서 샘미마, 용정이라고 하였으며 1914년 중암리, 석담리, 봉산리, 호암리, 반송리 일부와 주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정리라 하였다가 강서면에 편입되었으며 1983년 2월 청주시로 편입되면서 강서동으로 명칭을 고쳤던 것이다. 이처럼 행정 지명은 두 개 이상의 지명의 합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많으므로 진정으로 용(龍)과 관련된 지명은 행정지명이 아닌 자연지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청주시 오창읍의 용두리에는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용머리'라 불리는 자연 지명이 있는데 한자로 용두리(龍頭里)로 표기하였으며 오송읍 호계리에는 산형이 용처럼 생겼다 하여 용산(龍山)이라 하였다.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옥화리에서 운암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절벽 아래에 연못이 있는데 이곳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용소(龍沼)라 하고 이 고개를 용고개라 부르며 가뭄이 들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청주시 미원면 용곡리에는 용골, 용박골(용바윗골), 용바위라는 지명이 있다. 이 마을에 용처럼 생긴 용바위가 있는데 글방에서 글을 읽던 사람들이 중을 박대해서 보냈더니 그 후에 어떤 중이 찾아와 마을이 번창하려면 용바위를 없애야 한다고 하여 그 말을 듣고 이 바위를 없애려 하니 한 쌍의 학이 날아와 바위에 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용골'이라 하고 용바위가 있는 골짜기는 '용박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미원면 월용리의 '용바위(용암동)', 청주시 남이면 양촌리의 '용구녁, 영구녁샘', 문의면 묘암리의 '용머리골', 문의면 후곡리의 '용징이', 강내면 테성리의 '용실', 북이면 용계리의 '용담', 현도면 노산리의 '용뱅이, 용정', 단양군 단성면 중방리의 '용수구미', 단성면 벌찬리의 '용두골, 용두산', 단성군 가산리의 '용바우, 용소', 가곡면 대대리의 '용바우', 영춘면 용진리의 '용나루', 영춘면 오사리의 '용탄여울', 영춘면 유암리의 '용구마이', 어상천면 임현리의 '용바우골', 보은군 회남면 남대문리의 '용굴(龍窟)' 등이 있으며 다른 지역에도 용이 들어간 지명이 많이 나타난다. 이처럼 자연 지명에서 용의 의미를 찾아보면 우리 조상들이 지명을 만들면서 지명에 나타내고자 했던 꿈과 이상, 삶의 소망 들을 알아볼 수가 있으며 지명에 쓰인 '용'이라는 말의 어원도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용이란 예로부터 물을 다스리는 수호신으로서 땅에서는 홍수,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 바다에서는 태풍과 같은 재앙을 면하기 위하여 용을 공경하고 용에게 의지해 왔기에 용이 들어 있는 지명이 참으로 많다. 또한 불교에서도 용을 불법의 수호신이라 생각했기에 절의 이름에 용이 많이 쓰였다. 옛날 청주가 주성(舟城)이라 불리면서 배가 풍랑에 떠내려가지 않게 하려면 돛대를 세워야 한다는 풍수지리에 따라 철당간이 세워진 절이 바로 용두사이며, 사직동의 용화사를 비롯하여 옥천읍 삼청리의 '용암사',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과 음성군 삼성면 용대리,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의 '청룡사'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와 옥각리의 '황룡사'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처음부터 불교의 수호신으로서의 '용'의 의미를 가지고 지어진 이름도 있지만 지명에 근거하여 지어진 사찰명도 있다. 충북에는 용이 들어있는 지명이 70여 개가 있다고 하는데 국토정보지리원에 파악되지 않은 자연지명을 포함하면 훨씬 많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인 지명으로 청주시 상당구의 용암동을 들 수가 있는데 용암동은 용이 들어 있는 지명으로서 용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용암동은 본래 청주군 동주내면의 지역으로서 바위가 용처럼 생겼다는 용바위가 있어서 용바위골, 용박골로 불리다가 한자로 용암리(龍岩里)라 표기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장사가 무예를 단련하려고 이 산으로 들어왔는데, 이 산 동굴에는 승천하려는 용이 살고 있었다. 무사는 용을 죽여서 그 정기를 차지하려고 동굴 밖에서 기다렸으나, 천둥 번개로 인하여 용을 잡지 못하고, 용은 무사히 승천하고 말았다. 용박골에는 그 당시 장사가 용을 잡지 못하여 발을 구른 흔적이 발자국으로 남아 있으며, 일설에는 그 장사가 용물구뎅이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청용리는 본래 문의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청용사가 있었으므로 청용리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금곡리, 능변리, 화산리를 병합하여 청용리라 해서 가덕면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의 자연 지명으로 능갓, 장자울, 원청용, 꼴뫼, 지평리, 띠골, 웃씨앗골, 아래씨앗골(금곡←쇠골←씨앗골)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용이라는 마을 이름이 자연 지명으로 이미 존재한 것을 알 수가 있으며 후에 세워진 절의 이름은 청용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청용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자로 '靑龍'이라 표기한다면 '청용'이 아니라 '청룡'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명에 용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용과 관련된 지명으로 초평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진천군 초평면에 있는 초평호의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놀랄 정도로 용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용이 한반도 지형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은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힘차게 솟구치는 형상이기에 용의 해인 올해 모든 국민들에게 보여 주고 힘찬 기상을 느끼게 하고 싶다. 인근에 있는 두타산에 전망대가 있어서 청룡이 품고 있는 한반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용의 해를 맞아 지역 언론이 앞장서서 초평호를 조명하고 홍보하여 전국에 알리고 지자체에서 시설을 좀더 보완한다면 충북의 명소, 아니 전국의 명소가 되지 않을까? 더욱이 초평호 인근에는 용(龍)과 관련된 지명도 많이 나타난다. 진천 농다리 위에 있는 용고개를 비롯하여 용이 승천했다는 승룡산(먹뱅이산)과 용이 잠시 쉬었다가 승천했다는 피서대, 그리고 용신제를 지내고 있는 소두머니가 있고 용산리, 용기리, 용정리 등등 모두 용과 관련된 지명들이다.
2024년은 갑진년(甲辰年) 용띠 해다. 그런데 용 중에서도 청룡이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민속의 전통적인 상징 체계에서 10개의 천간(天干)은 각 둘씩 다섯 방위와 그에 따른 오방색을 상징한다. 즉 갑(甲)과 을(乙)은 동(東)으로 청색(·色)을, 병(丙)과 정(丁)은 남(南)으로 적색(赤色)을, 무(戊)와 기(己)는 중앙(中央)으로 황색(黃色)을, 경(庚)과 신(辛)은 서(西)로 백색(白色)을, 임(壬)과 계(癸)는 북(北)으로 흑색(黑色)을 각각 나타낸다. 그리고 12개의 띠는 자(쥐), 축(소), 인(범),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와 같이 우리 생활과 밀접한 동물을 상징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용은 상상의 동물로서 하늘과 땅과 물을 넘나드는 초능력을 지닌 존재이며, 예로부터 인간 세계에서 최고의 존재인 임금을 상징하는 한편,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물과 불을 다스리는 존재이기에 신처럼 떠받들었으며, 불교에서도 수호신으로 여겨 왔다. 또한 인간의 꿈과 소망을 자연에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명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용의 몸통이 뱀의 모양이기도 하지만 땅 위에 흐르는 물줄기인강의 모양, 즉 지형을 묘사한 것으로 본다면 용과 지명과는 깊은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품에서 자연을 이용해 살아가지만 자연은 수시로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재앙을 안겨주기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특히 용은 홍수로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강줄기의 형세이기에 수호신으로 숭배해 왔으며 다른 동물들보다 우리의 지명에 유난히 많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지명(地名)에는 얼마나 많은 용(龍)이 있을까? 국토지리정보원에서 2012년에 전국의 지명을 분석해본 결과, 우리나라 150만여 개의 지명 중에서 1천261개 지명이 용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호랑이 관련 지명 389개에 비하여 약 3배, 토끼관련 지명 158개에 비해 약 8배가 많았다. 지명의 종류별로는 마을 명칭이 1천40개, 산 명칭이 110개, 폭포 명칭이 24개, 바위 명칭이 23개 등의 순이다. 글자별로 살펴보면 '용산', '용동', '용암', '용두' 등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용골, 용바우, 용머리'라는 자연지명이 한자로 표기된 것이므로 통합하여 통계 처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유래별로 조사해 보면 제주도의 용두암을 비롯하여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에 있는 '용두산'처럼 모양이 용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 407개나 되었는데, 그 중에는 머리를 닮은 모양이 가장 많으며, 기타 뿔이나 목, 코, 꼬리 등을 닮았다는 모습을 묘사한 지명도 있었다. 그 외에 용이 승천하거나 누워있거나 엎드려 있는 동작 묘사 등의 유래를 가진 지명도 있고, 풍수 관 련 유래를 가진 지명도 나타났다. 용의 종류에 있어서는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의 '백룡산(白龍山)'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청수리의 '청용(靑龍)',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의 '황용동(黃龍洞)' 등이 있는데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청룡 관련 지명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매년 이와 같은 십이지 동물 관련 지명들이 일상생활에 어떻게 반영되고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국토에 스며들어 있는 지명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삼고 있는 점은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에 머물지 말고 급변하는 우리 사회에서 급속하게 멸실되어 가는 지명을 더 늦기 전에 찾아내고 정리하는 제도적 체계를 갖추어 미고시된 지명을 적극 발굴하고 재정비하는 한편 그 어원을 밝히는 작업을 지속함으로써 우리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을 보존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추진해 나갔으면 좋겠다. 아무쪼록 청룡의 해인 올해는 하늘로 솟구치는 푸른 용처럼 우리 민족이 세계를 향해 힘차게 비상하는 한 해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
옥천의 대표적인 산으로는 장령산(654.5m), 환산(578.8m), 월이산(550.9m), 마성산(509.5m) 등을 들 수가 있으며 해발 500m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같은 이름이면서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는 국사봉을 들 수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높고 큰 산은 장령산이라 할 것이다. 장령산은 옥천군의 군서면, 이원면, 옥천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656m이다. 충청남도의 최고봉인 서대산과 마주 보며, 산의 서쪽에 휴양림을 개발하여 휴양지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장룡산(壯龍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산에 용바우라는 바위와 용암사(龍岩寺)라는 사찰이 있어 지명 유래가 용암사와 연관이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용암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국에 갔다가 귀국하여 552년(진흥왕 13년)에 창건했다고 하며 법주사의 창건보다 1년이 앞선 것이다. 사찰의 이름은 서쪽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용암사(龍岩寺)라 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하여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용암사 아래에 용박골(용바위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인근에 용바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장령산 용암사는 옥천이 자랑하는 천년고찰이자 충북이 자랑하는 명승으로 운해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기도 한다. 용암사를 뒤로하고 오르면 전망대인 운무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보는 일출 광경이 정말로 볼만하다. 낮게 깔린 구름은 마치 춤을 추듯 일렁이고 운해를 품고 떠오르는 붉은 해는 수묵화 같은 산봉우리마저 붉게 물들이는 일출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서 미국의 'CNN go'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50곳에 포함하여 소개된 바가 있다고 한다. 여지도(輿地圖)에는 서대산(西臺山)만 표기되어 있고 장령산은 표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장령산은 인근에 있는 해발 905.3m의 서대산에 가려서 높은 산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듯하며 산이름도 많이 불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장령산은 1995년 5월에 옥천군 지명위원회가 장룡산(壯龍山)을 장령산(長靈山)으로 고치는 '지명개정안'을 심의·의결해 국립지리원 중앙지명위원회에 제출했고 이 개정안이 1999년 5월 1일 받아들여져 중앙지명위원회가 '장령산'(長靈山)으로 지명을 개정 고시함으로써 공식 명칭이 장령산(長靈山)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용바위골(龍岩)이라는 옛 지명과 용암사(龍岩寺)라는 사찰의 이름과도 연관이 있는 장룡산(壯龍山)을 버리고 장령산(長靈山)으로 바꾼 이유는 아마도 무리하게 용(龍)과 연관을 짓기보다는 오랫동안 주민들이 불러온 장령산이라는 이름을 되살리면서 '신령스럽다·영험하다'는 의미의 '령(靈)'이라는 한자표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장령산의 어원은 언어의 변이 과정으로 보아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잣고개(산을 넘는 고개)'로 불리다가 '잣'은 '장'으로 변이되고 '고개, 또는 산줄기'라는 의미를 '령(嶺)'이라는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또 하나는 옥천에서 금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옥천읍 삼청리의 사목골에서 옥천군 군서면 금산리 사목골까지 길게 이어지는 골짜기를 따라 사목치(士目峙)라는 고갯길이 있었다는 기록이 옥천읍지(1899년)에 나타나며 현재도 사목재라 불리고 있는데 이 고개가 길게 이어지므로 '진재(긴 고개)'의 의미로 불리다가 한자로 '장령(長嶺)'으로 표기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 지역에서 불리던 옛 자연 지명들을 더 찾아내어 어원을 밝혀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장령산의 어원을 어떻게 보든지 장룡산보다는 장령산이 옛 지명을 더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장룡산을 장령산으로 바꾼 것은 옛 지명의 보존이라는 의미에서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옥천군 청산면은 오늘날 행정구역이 면 단위로 축소되었지만 옛날에는 청산현, 청산군이 있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와 의 기록에 의하면 청산은 신라시대에는 '굴산현(屈山縣), 돌산현'이었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기산현(耆山縣)'이라 고치어 삼년군(보은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왕건) 23년(940년)에 청산현으로 개칭됨으로서 '청산'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는 보은군의 내북면 창리, 주성부곡을 청산현에 편입하여 500여 년간 청산현에 소속되어 있다가 1906년에 보은군에 편입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황간현과 함께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된 후 청산현(靑山縣)과 황간현(黃澗縣)을 합하여 黃靑縣(황청현)이라 하였으나, 후에 다시 분리해서 靑山縣(청산현)으로 복구하였다. 이때 청산현 소재지를 현내면이라 하고 현 보은군 내북면 지역에 있던 주성 부곡 10개 리를 주성면으로 하였으며 나머지 지역은 동면, 북면, 서면, 남면으로 이름 지었다. 이와 같이 조선 건국에 즈음한 새로운 행정구역 개편에서 새로 구획된 행정면의 이름을 지음에 있어 행정 편의에 의해 동서남북 등 방향, 일이삼사 등 단순한 구별을 위한 지명을 만드는 등 좋은 지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이후 1895年(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청산군(靑山郡)으로 승격한 후 1914年 군면폐합으로 옥천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청산군청 소재지인 현내면과 동면, 서면을 병합하여 청산면으로, 서면과 남면은 청서면, 청남면이라 하여 병합하여 청산(靑山)과 산성(山城)의 이름을 따서 청성면(靑城面)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청산의 옛 이름인 '굴산(屈山), 돌산'은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이었을까·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용천리의 '굴산',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의 '굴산머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의 '뒷굴산',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의 '기정굴산' 등의 지명에서 보면 '굴'은 '동굴이나 골짜기'의 의미로 보인다. 또한 옥천군 청산면 신매리의 '독산', 전남 여수시 돌산읍 '돌산도',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동', 충남 보령시 웅천읍 '독산리'등의 지명에서 '돌, 독'은 대부분 '돌(石)'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청산의 옛 이름인 '굴산(屈山), 돌산'이 이두식 한자 표기로 본다면 '굴(屈)'은 '굽다'는 의미이므로 산줄기가 벋어 내려오다가 굽은 지형을 가리키는 의미로 보이며, '돌(堗)'은 한자의 훈을 이용한 이두식 표기로서 굽이 도는 지형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괴산군 청천면 갈읍리의 굽이도는 지형을 가리키는 '곱돈, 곱돈고개'라는 지명과 같은 유형이 아닐까· 청주시 상당구 남이면 고은리의 '고분재'는 '굽은재'에서 '고분재'로 변이되고 '고분'이 '아름답고 곱다'는 의미의 '고은'으로 진화하였듯이 길이나 산줄기, 혹은 냇물이 굽은 지형을 가리키는 지명은 아주 흔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청산면 인정리의 '구티마을', 청성면 고당리의 '고현', 구음리의 '구비마을', 궁촌리의 '활골재' 등의 지명이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신라 경덕왕 때의 지명 표기는 이두식 표기가 아닌 한화(漢化) 표기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산의 지형이 굽은 것을 노인의 허리가 굽은 것과 관련지어 '기산현(耆山縣)'이라 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면 '굴산현(屈山縣), 돌산현, 기산현(耆山縣)'이라는 지명들의 연관성이 드러나며, 지명들이 생겨난 이유와 어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 태조(왕건) 23년(940년)에 청산현으로 개칭함으로서 '청산'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나는데 '청(靑)'이라는 지명요소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문헌 기록이나 자연 지명에서도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청주시도 고려 태조(왕건) 23년(940년)에 근거를 알기 어려운 청주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 것으로 보아 '청'이라는 지명 요소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앞으로 찾아내야 할 큰 과제라 할 것이다.
옥천읍 가풍리(加豊里)는 옥천읍에서 가장 아래쪽(남쪽)에 위치한다. 가풍리(加豊里)라는 지명의 한자 구성을 보면 '풍년이 더해지는 마을, 해마다 풍년이 드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의미이니 농업이 근본이었던 농경사회에서는 참으로 좋은 의미를 가진 이름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쳐서 이러한 좋은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가풍리(加豊里)는 원래 옥천군 군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척리(加尺里), 옥풍리(玉豊里), 원각리(院覺里), 중삼리(中三里), 서당리(書堂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척(加尺)'과 '옥풍(玉豊)'의 이름을 따서 가풍리(加豊里)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 지역의 이러한 마을 이름들은 한자로 표기된 행정명들이므로 이러한 지명이 만들어지게 된 자연지명을 재구해 보아야만 그 뿌리를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가척리(加尺里)란 가척동리(加尺洞里)라고도 기록되어 전하는데 이 지명은 '가재골'이라는 자연지명을 한자화하면서 '더할 가(加,) 자 척(尺)'으로 표기하여 '가척리(加尺里)'로, 또는 '마을 동(洞)'을 추가하여 '가척동리(加尺洞里)'가 되었다. 마을 뒤 송씨 문중 묘비에 가재동(佳才洞)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때는 '훌륭한 인재가 나오는 마을'의 의미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주민들에게는 마을 골짜기에서 가재가 많이 잡혀 가재골이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재가 잡힐 정도로 맑고 수려한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가재골'은 '가작골(가잣골), 가자골'에서 음운 변화가 된 것으로 보이며 '가잣골'은 '가지(갖)+잣(山)'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즉 산줄기의 한 작은 능선을 산이 갈라진 작은 가지로 보고 '잣(山)'은 지명에서 일반적으로 '재, 작, 자, 장'으로 변이되어 쓰이므로 '가작골(가잣골), 가재골'로 부르다보니 골짜기마다 많이 있는 '가재'를 연상해 자연스럽게 가재가 많이 잡히는 골짜기라는 민간어원설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옥풍리(玉豊里)는 지풍리에서 온 말이다. 가재골 밑 양지쪽에 양짓말(陽地洞)이란 자연마을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산골짜기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은 음지촌(陰地村)이라 기록되어 전하는데 자연지명으로는 '지풍골'이라 전해오며 기록에는 '지풍(至豊)'이라 표기되었다. 이 지풍골은 지형상으로 보아 '깊은 골'의 의미로 추정이 되며 '지푼골'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원각리(院覺里)'는 '지픈골'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1891년 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역에 각리동리, 신원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1910년 군남면과 읍내면이 합하여 군내면이 되면서 신원리의 '원' 자와 각리동리(覺里洞里)의 '각' 자를 한 자씩 합하여 '원각리(院覺里)'라 하였다고 한다. 원각리와 서대리 사이인 신원리에는 옛 관리들이 여행할 때 숙소로 쓰였던 금천원이 있어 이곳이 교통의 요충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원면 건진리와 가풍리 사이에 있는 솔티(우치,牛峙)는 이원면 우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옛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큰 고개였다. 솔티는 옥천읍과 이원면 동이면의 경계에 있는 도덕봉(해발 406.9m)이라는 큰 산을 넘는 험한 고개로서 예부터 도적들이 많아 '사지고개'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나그네들이 두려워했다고 하며 도덕봉은 도적들이 은거하고 있다 해서 도적봉이라고 했으나 이미지가 좋지 않아 도덕봉이라 고쳤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민간어원설과 지형적 특성으로 보아 주변보다 높게 돋아 있는 산이라는 의미의 '돋은 산, 돋은 봉'이 민간어원설에 의해 '도적봉'으로 불리었다고 하지만 '도적봉'에서 '도덕봉'으로 변이된 것이 아니라 '돋은 언덕'이라는 의미의 '도둔봉, 도둑봉'으로 불리다가 '도적봉'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돋은 언덕'은 일부 지명에서는 '둔덕'으로, 그리고 여러 지역의 지명에서 '도둑, 도적, 도덕'으로 변이된 것으로 추정되며, 솔티를 한자로 우치(牛峙)로 표기한 것은 높은 고개라는 의미의 '솟은 고개'가 '솟은 티, 소티'로 불리다가 한자로 '우치(牛峙), 우현(牛峴)'으로 표기된 것으로 본다면 이 지명들의 연관성이 더 긴밀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옥천읍 가풍리(加豊里)는 옥천읍에서 가장 아래쪽(남쪽)에 위치한다. 가풍리(加豊里)라는 지명의 한자 구성을 보면 '풍년이 더해지는 마을, 해마다 풍년이 드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의미이니 농업이 근본이었던 농경사회에서는 참으로 좋은 의미를 가진 이름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쳐서 이러한 좋은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가풍리(加豊里)는 원래 옥천군 군남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척리(加尺里), 옥풍리(玉豊里), 원각리(院覺里), 중삼리(中三里), 서당리(書堂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척(加尺)'과 '옥풍(玉豊)'의 이름을 따서 가풍리(加豊里)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 지역의 이러한 마을 이름들은 한자로 표기된 행정명들이므로 이러한 지명이 만들어지게 된 자연지명을 재구해 보아야만 그 뿌리를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가척리(加尺里)란 가척동리(加尺洞里)라고도 기록되어 전하는데 이 지명은 '가재골'이라는 자연지명을 한자화하면서 '더할 가(加,) 자 척(尺)'으로 표기하여 '가척리(加尺里)'로, 또는 '마을 동(洞)'을 추가하여 '가척동리(加尺洞里)'가 되었다. 마을 뒤 송씨 문중 묘비에 가재동(佳才洞)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때는 '훌륭한 인재가 나오는 마을'의 의미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주민들에게는 마을 골짜기에서 가재가 많이 잡혀 가재골이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재가 잡힐 정도로 맑고 수려한 자연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가재골'은 '가작골(가잣골), 가자골'에서 음운 변화가 된 것으로 보이며 '가잣골'은 '가지(갖)+잣(山)'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즉 산줄기의 한 작은 능선을 산이 갈라진 작은 가지로 보고 '잣(山)'은 지명에서 일반적으로 '재, 작, 자, 장'으로 변이되어 쓰이므로 '가작골(가잣골), 가재골'로 부르다보니 골짜기마다 많이 있는 '가재'를 연상해 자연스럽게 가재가 많이 잡히는 골짜기라는 민간어원설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옥풍리(玉豊里)는 지풍리에서 온 말이다. 가재골 밑 양지쪽에 양짓말(陽地洞)이란 자연마을이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산골짜기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마을은 음지촌(陰地村)이라 기록되어 전하는데 자연지명으로는 '지풍골'이라 전해오며 기록에는 '지풍(至豊)'이라 표기되었다. 이 지풍골은 지형상으로 보아 '깊은 골'의 의미로 추정이 되며 '지푼골'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원각리(院覺里)'는 '지픈골'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1891년 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역에 각리동리, 신원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1910년 군남면과 읍내면이 합하여 군내면이 되면서 신원리의 '원' 자와 각리동리(覺里洞里)의 '각' 자를 한 자씩 합하여 '원각리(院覺里)'라 하였다고 한다. 원각리와 서대리 사이인 신원리에는 옛 관리들이 여행할 때 숙소로 쓰였던 금천원이 있어 이곳이 교통의 요충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원면 건진리와 가풍리 사이에 있는 솔티(우치,牛峙)는 이원면 우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옛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큰 고개였다. 솔티는 옥천읍과 이원면 동이면의 경계에 있는 도덕봉(해발 406.9m)이라는 큰 산을 넘는 험한 고개로서 예부터 도적들이 많아 '사지고개'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나그네들이 두려워했다고 하며 도덕봉은 도적들이 은거하고 있다 해서 도적봉이라고 했으나 이미지가 좋지 않아 도덕봉이라 고쳤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민간어원설과 지형적 특성으로 보아 주변보다 높게 돋아 있는 산이라는 의미의 '돋은 산, 돋은 봉'이 민간어원설에 의해 '도적봉'으로 불리었다고 하지만 '도적봉'에서 '도덕봉'으로 변이된 것이 아니라 '돋은 언덕'이라는 의미의 '도둔봉, 도둑봉'으로 불리다가 '도적봉'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돋은 언덕'은 일부 지명에서는 '둔덕'으로, 그리고 여러 지역의 지명에서 '도둑, 도적, 도덕'으로 변이된 것으로 추정되며, 솔티를 한자로 우치(牛峙)로 표기한 것은 높은 고개라는 의미의 '솟은 고개'가 '솟은 티, 소티'로 불리다가 한자로 '우치(牛峙), 우현(牛峴)'으로 표기된 것으로 본다면 이 지명들의 연관성이 더 긴밀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옥천읍 지역의 대표적인 마을 중 하나로 죽향리를 들 수가 있다. 조선 말엽까지 죽향리에는 관아와 시장이 있는 등 문정리, 상계리와 함께 옥천군의 중심지였다. 죽향리와 문정리 일대를 구읍이라고 부르는 것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고 현재의 금구리, 삼양리 등 신읍이 발전하면서 이 지역이 쇠퇴하면서부터인 것이다. 죽향리라 하면 대나무와 향나무의 이미지가 떠올라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향기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좋은 지명인데 과연 어떻게 만들어진 이름일까· 죽향리라는 이름은 일제강점 후 여러 마을을 합쳐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 때, 마을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마을 앞에는 큰 향나무가 있다 하여 죽향리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와 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역의 옛 행정명이 '저전리'와 '고증개리'였다고 한다. 1910년 행정구역을 일제히 조정하면서 군남면과 읍내면을 합쳐 군내면이라 부르게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저전리를 문정리와 죽향리로 나누고 고증개리는 죽향리에 합하였다. 이 때 죽향리 지역의 자연 마을로 향동(香洞)과 죽동(竹洞)이 있었는데 윗개꼴과 이문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죽동과 향동의 이름을 따서 죽향리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자연 마을의 순우리말 지명은 잃어버리고 한자로 표기된 지명에 따라 죽동(竹洞)은 대나무숲이 있는 마을이고, 향동(香洞)은 마을 앞에 향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해석하고 있지만 다른 지역의 지명의 일반적인 명명 방식에 따라 옛이름을 재구해 본다면 죽동(竹洞)은 대나무가 많아서 '죽골' 또는 '댓골'이라 불렀을 것이고, 향동(香洞)은 '살구골, 살구나무골'이라 하여 '살곶이고개, 또는 사이고지고개'라 부르는 고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가 있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잣나무를 많이 심어 잣밭산이라 부르는 산이 있으며, 이 산을 넘는 고개가 있는데 '가랑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가리뱅이재'로 불렸던 잣밭산 고개는 죽향리에서 군북면 용목리로 넘는 큰 고개였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로는 조선 말엽 죽향리에서는 크고 작은 재앙이 연이어 일어나 주민들이 매우 불안해 했는데, 동네 서쪽에 돌장승을 세우면 편안해진다는 한 선비의 말을 듣고 돌사람과 돌사자를 만들어 세웠다. 이후 마을을 안정됐고, 마을 수호자 구실을 했던 돌사자 등은 도난당한 후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서 잣밭산은 잣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 지역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 저전리(楮田里)인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닥밭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닥나무를 많이 길러 생활용구를 만들어 사용했기에 '닥밭, 저전'이라는 지명이 다른 지역에 많이 전해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옛이름, 조상들의 생활 모습과 애환이 서려있는 원래의 지명을 찾아서 사용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가 아닐까? 또한 가리뱅이재는 '가리(갈라지다)+뱅이(배미)+재(고개)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닥나무를 기르는 밭이 고갯길 양쪽에 있어 '밭이 갈라지는 고개'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이름으로 추정이 된다. 그렇다면 닥밭산과 가리뱅이재, 향동(살구골-사이고지골)의 의미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옛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옥천읍 옥각리는 옥천읍 외곽지역에 있는 마을로 옥곤리와 각신리의 두 개의 마을로 크게 나누어진다. 본래 옥천군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옥곤리, 각신리와 군북일소면의 백석리 일부를 병합하여 옥곤리의 '옥' 자와 각신리의 '각' 자를 한 자씩 취하여 옥각리라 한 것이다. 옥곤리는 마을 뒷산에 차돌이 옥같이 박혔다 하여 구슬 옥(玉), 산 이름 곤(崑) 자를 써서 '옥곤'이라 부르다가 '외꼰이'로 변했다고 전해지지만 '산 이름 곤(崑)' 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그 뿌리는 '외고지(외딴 산능선 마을)'로서 자연지명의 이름은 '외고지, 외꼬지'였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각신리는 마을 앞에 각신서당(覺新書堂)이 있었기 때문에 각신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옥천 지역은 예로부터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기에 원과 역이 설치되고 군사적인 요충지이기도 하므로 일찍부터 지명이 한자화되어 기록되었기에 자연마을의 이름들이 많이 소멸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한자화된 지명을 거꾸로 소급하여 순수한 우리말 지명을 재구해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옥천의 중심지에는 삼양리(三陽里)가 있다. 삼양리라 부르게 된 것은 삼거리(三巨里)의 '삼(三)'자와 양지동(陽地洞)의 '양(陽)'자를 한 자씩 취하여 삼양리(三陽里)라 하였다. '삼거리'는 구어(口語)이고 한자로는 '삼기(三岐)'라 표기하였는데 서울, 부산, 부여 방면으로 갈라지는 세갈래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양지동은 양지말이라는 자연마을의 한자 표기인 것이다. 1739년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삼양리와 금구리(金龜里)를 읍내면 가화리(嘉化里)라 하였다. 이 마을에 가화역(嘉化驛)이 설치되면서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의 기록에는 역리(驛里)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0년 군남면과 읍내면을 합하여 군내면이라 하면서 삼양리가 된 것이다. 삼양리에는 원형이 크게 훼손되고 관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삼국시대 삼양리 토성과 삼거리 토성 등의 성터가 있고 삼양리 네거리(옛 삼거리)에는 경부선 철도가 지나던 산기슭에 1871년 4월 고종황제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알리는 척화비가 있어 이곳이 요충지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옥천읍의 금구리는 현재의 신기리(新基里)와 경찰서 사이에 있는 동산의 지형이 금거북이가 진흙에 빠져있는 형국이므로 풍수설에 금구몰니(金龜沒泥)라 하여 금거북이가 진흙에 묻혀 있는 명당이란 뜻으로 금구리(金龜里)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1905년 경부철도를 개통하면서 옥천역이 현재의 금구리 마을에 세워지자 교통이 편리해져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래서 1910년 군남면과 읍내면을 합하여 군내면이 될 때 마을 이름을 금구리라 하였는데 아마도 금구천이라는 이름이 먼저 존재하고 이의 이름을 따서 금구리라는 이름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금구천이란 '크다'는 의미의 고유어인 '금, 검, 가마'와 '도랑이라는 의미의 한자어인 '구(溝)'가 합쳐진 말로 본다면 '커다란 냇물'이라는 의미로서 하천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옥천읍 장야리(長夜里)는 한자의 의미로 보면 지명의 어원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이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한 덕망있는 선비가 이 마을에 들어와 숙식 이외에는 돈을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마을 한 장소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선비가 죽은 후에 후손들이 선비를 모셔가겠다고 묘소를 파니 그 속에서 백학이 날았다고 하며 그 명당에서는 찬샘이 흘렀고, 가뭄에도 끊이지 않아 주민들이 항상 이용했다고 한다. 173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군남면 야미리(夜味里)라 표기하고 있는데 지금의 상야(上夜)와 장천(長川)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야미리(夜味里)와 장천리(長川里)를 합하여 두 마을에서 한 자씩 따서 장야리(長夜里)라 하였다. 이 지역의 자연 지명으로 윗배미(上夜)와 아랫배미(下夜)가 있었다. 순우리말에 '한 덩어리의 논이나 밭'을 가리키는 '배미'라는 말이 있는데 최근까지도 '논배미, 윗배미, 진배미, 높은배미, 큰배미, 작은배미' 등으로 흔히 써오던 말이다. 여러 지역의 지명에서 '배미'를 그 음과 유사한 한자의 훈을 따서 '사(巳), 야(夜)'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배미'의 '미' 소리까지 충실하게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장천리(長川里)란 '기다란 냇물'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긴내'가 구개음화되어 많은 지역에서 '진내'라는 지명으로 쓰여오고 있던 말이다.
충북도의 남부 지역인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을 남부 3군이라 부른다. 그런데 청주에서 옥천을 가려면 신탄진, 대전 IC 등 대전 지역을 지나 옥천에 이르게 되고 옥천에서 다시 영동을 가게 되므로 충북의 행정 중심지인 청주에서는 상당히 멀리 있는 지역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보은군은 청주시와 인접해 있고 옥천, 영동은 보은에 인접해 있는 이웃 마을인 것이다. 먼저 옥천(沃川)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어떤 의미를 지닌 말들로 이루어진 지명인지, 그리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아보자. 옥천이 옛날 옛적에 불리던 이름은 '골뫼'였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본래 신라 지역으로서 신라시대의 행정명으로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표기되었다. 신라 35대 경덕왕때 이두식으로 표기된 지명을 한자 지명으로 바꾸면서 '관성(管城)'으로 표기하였다. 고려 8대 현종때 경산부(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에 속하게 하였다가 18대 명종 13년(1183년)에 아전과 백성들이 현령인 홍언(洪彦)을 잡아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여 관호를 폐지하였다가 25대 충선왕 5년(1313년)에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하여 경산부 소속의 이산(利山), 안읍(安邑), 양산(陽山)의 3개 현을 관리하게 되면서 옥주(沃州)라는 이름이 나타나게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태종 13년(1413년)에 옥주를 옥천(沃川)으로 고치고 경상도로부터 충청도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지역을 부르는 자연 지명인 '골뫼'의 어원은 무엇일까?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와 광주 광산구 명화동에도 '골뫼'라는 지명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의 '골뫼'는 '골미, 동산'으로도 불린다. 그렇다면 산줄기가 벋어내려오다가 볼록하게 솟아있는 곶의 형태를 '동산' 또는 '곶미'라 할 수 있으므로 '골뫼'란 지형적 특성으로 보아 '곶뫼, 곶미'에서 온 말로 추정이 된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궁촌리의 골미,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상백리의 골미, 강원도 홍성군 갈산면 기산리의 골미,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상안미리의 골미,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리의 골미 등은 '곶뫼'가 '골미'로 변이되어 지명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골미, 골뫼'로 변이되기 전에 '곶뫼'를 한자로 표기한 지역에서는 '곶'을 '꽃'으로 보아서 '화산(花山)'이라 표기하기도 하였다. 괴산군 사리면의 화산리,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의 화산리, 진천군 초평면의 화산리,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의 화산리, 경북 문경시 농암면의 화산리, 충남 서천군 종천면의 화산리, 충남 예산군 대술면의 화산리, 경북 경주시 천북면의 화산리, 전북 익산시 망성면의 화산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의 화산리 등의 많은 예를 들 수가 있는데 이들 지역은 한결같이 꽃과 연결지어 '진달래꽃이 많이 피어있는 지역, 또는 마을의 지형이 꽃잎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유래가 전해진다. 울산시 온산읍의 화산리는 '화산(華山)'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아마도 지역과 꽃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 '화(花)'를 후대에 와서 '화(華)'로 바꾼 것으로 추정이 된다. '조선향토대백과'의 기록에 의하면 황해남도 청단군 화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성터인 화산성에는 '옛날 이 성안에서 한 무사가 말을 타고 10리 정도 거리에 있는 신생리 벌판의 알메산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날린 후 그곳으로 말을 타고 달렸는데, 목표물에 도착해서 열까지 셈을 센 다음에야 화살이 날아왔다. 이때부터 화살산이라 하다가 줄여서 화산이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고 하지만 이 또한 '곶뫼'에서 변이된 '화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충남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의 '구지매'는 '곶뫼'가 발음하기 쉽도록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옥천을 신라시대의 행정명으로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표기한 것은 '곶뫼'의 이두식 표기가 분명하며 경덕왕 때에 자연 지명의 소리값을 버리고 의미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관성(管城)'이라 한 것은 그 의미의 연관성을 더 연구할 과제라고 하겠다. 특히 전북 김제시 금구면도 백제시대에 구지산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금구현(金溝縣)'으로 표기한 것은 옥천 금구천의 어원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