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든 손은 푸근하다. 거친 표면도 생쥐처럼 매끄럽게 빠져나가고, 힘 안 들이고 지나가는데도 뚜렷하게 자취를 남기는 볼펜이 대세이지만 머리에 지우개를 달고 있는 연필이 더 임의롭다. 닳고 낡아지면 잠시 끝을 다시 벼리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막간의 틈이 있어서 숨을 고르고 몸에 힘을 뺄 수 있다. 한나절 내내 개미구멍처럼 좁아져있던 생각이 다시 툭 트일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칼날로 살을 깎아내고 그 속의 까만 뼈를 조심스럽게 갈아내는 무심(無心)의 시간 덕분이다. 판을 갈아엎어야 할 만큼 이건 아니다 싶을 때에도 제 몸을 바치는 지우개로 쓱쓱 지우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인간적이다.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안고 있어서인지 행간의 논리들이 서로 다투려 하지 않는다. 잘 지워지지 않는 글씨라도 연필의 부드러운 첨삭 기호를 빌리면 즉시 바로잡히거나 흐르는 시간에게 맡길 수 있다. 연필은 기존의 글에 간섭과 지적을 하면서도 자신을 돋보이게 내세우거나 우기지 않는다. 언제든지 지워져 물러설 각오가 되어있다. 글쓰기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침을 묻혀가며 꾹꾹 눌러쓰던 기억 때문일까. 연필을 잡을 때면 흐릿한 동심(童心)이 다시 일어난다. 초등학생 시절 필통 속에 잘 깎인 두세 자루 연필이 들어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의 관심과 사랑이 가지런하게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연필은 늘 부엌칼이나 과도로 쥐어뜯듯이 깎아 연필심만 억지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예쁜 글씨가 나오려면 끝을 뾰족하게 다듬어야 하는데 무딘 칼은 그나마 드러낸 까만 심을 댕강 부러뜨리기 일쑤였다. 그냥 뭉툭한 끝에 침을 묻혀가며 쓸 수밖에 없었다. 누렇고 거친 종이에다 뭉툭한 연필 끝으로 한 글자씩 새겨 넣듯 글을 쓰는 일은 중노동에 가까웠다. 가운뎃손가락 마지막 마디의 여린 살이 움푹 들어갈 만큼 꾹꾹 눌러서 숙제를 하고 받아쓰기를 했다. 어느 한 부분에 지나친 힘이 들어가면 사달이 생기는 법이다. 온 손가락에 힘을 주다 보면 연필심 뿌리 부분이 뚝 부러졌다. 그러면 다시 멀쩡한 살을 푹푹 잘라 내고 숨어들어간 까만 심을 파내야 했다. 내가 가진 연필은 그렇게 얼마 써보지도 못하고 몽당연필이 되었고 수시로 새 연필을 사달라고 졸라야 했다. 아마 부모님은 내가 다른 형제들보다 두세 배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어느 날 고모가 사다 준 빨간색 연필에 대한 애착은 차라리 천형(天刑)이었다. 몽당연필이 되어 좁은 필통의 한자리를 떡 차지하고 있었지만 버릴 수가 없었다. 더 깎아내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고 버리자니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이 아까운 '계륵(鷄肋-닭의 갈비)' 같았다. 삼국지의 조조가 한중 땅을 놓고 전쟁을 하던 중 부하 장수에게 내린 암호가 계륵이었다. 영특했던 장수는 조조가 내린 암호의 뜻을 재빨리 알아채고 철수를 서두르다가 너무 앞서갔다는 죄로 처형당했다. 조조도 그러했거늘 어린 마음에 계륵을 포기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몸통에 새겨진 '문화연필'이란 금색 글자가 남아있는 한 쓰레기통이나 아궁이 속으로 던져 넣을 수 없었다. 결국 필통 속에서 한동안 딸각거리다가 책상 서랍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언제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자취를 감추었다. 오래된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은 인생이란 긴 연극에서 비록 조연이거나 작은 소품에 지나지 않더라도 극의 흐름에 있어서 꽤 무게 있는 역할을 한 결과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연필처럼 긴 시간 동안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내 곁을 지켜온 물건도 드물다. 이제 머릿속 생각이 손을 거쳐 활자화되는 과정이 달라져 쓸모라는 측면에서는 퇴장의 시기가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든지 자신의 뜻을 양보하고 지워져도 좋다는 헌신의 모습과 조심스럽게 깎아내고 다듬어야 하는 삶의 자세를 깨우쳐 주는 역할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늘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짧은 내 기억을 저장하고 내 생각의 오류를 고쳐 줄 것이다.
7월의 낡은 달력을 뜯어내고 8월을 바라보다 문득 망막을 자극하는 빨간 글씨, 8월15일! 집 앞에 태극기를 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날이지만 사실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쉬는 날이라는 것이다. 매일 출근하는 사람에게는 달력 맨 왼쪽 줄 빨간색 날짜와 맨 오른쪽의 파란색 날짜 중간에 빨간색 날짜가 끼어 있으면 없던 기운마저 다시 솟는다. 더구나 중간부분이 아니라 왼쪽 일요일이나 오른쪽 토요일 쪽으로 연결되었을 땐 명절 같은 설렘이 부풀어 오른다. 가슴이 뛸 만큼 즐거운 계획이 없더라도 그냥 쉰다는 것 자체가 기다려진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어언 50여년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달력에 표시된 날짜의 색깔들이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되었다. 모두 빨간색 날짜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빨간 날짜의 반가움이나 색깔 있는 날짜를 기다리는 설렘이 없어졌다. 오히려 남들이 다 쉬는 그런 날을 피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교통체증이나 예약중복을 피해 값싸고 편안한 시간여행을 하려면 남들이 일하는 시간을 노려야 한다. 그런데 아직 적응이 덜 되어서일까. 노는 시간이 그렇게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이 불안하고 멍하게 지내는 것이 허송세월인 것 같아 불편하기까지 하다. 창밖에는 대지를 온통 삶아버리려는 듯 무더위가 밤낮으로 식을 줄 모르니 누에고치처럼 방안에서 꼼지락거리며 탁상공상에 빠져 있다. 더위를 견디는 방법 중에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기는 하다. 문제는 하루하루 1분1분 쉼 없이 다가오는 원고마감시간이다. 퇴직을 하면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으며 사색을 즐기겠다는 꿈을 꾸었다. 글쓰기는 여유로운 마음이 되면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 숨은 감성들이 술술 풀어져 나오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 같다. 여유로운 마음은 글을 지어내는 자양분이 되기는커녕 해야 할 일을 뒤로 밀어내고, 몸을 움직이는 동력을 떨어뜨리면서 멍때리는 시간만 늘여놓았다. 나의 착각이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인지 알 것 같은데 마감일은 이미 코앞에 닥쳤다. 오늘도 하릴없이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소설가 김유정의 불행했던 삶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김유정은 1908년에 태어나 겨우 29살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는 죽기 전 3년 남짓한 기간에 3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더구나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다. 평생지기였던 작가 안회남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배고프고 힘든 상황에서 글을 써 내려갔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친구에게 50일 이내 인기를 끌만한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낼 터이니 돈 백 원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돈으로 닭 30마리, 살모사와 구렁이 10여 마리를 고아 먹겠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든 다시 살아나 글을 계속 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생의 막다른 골목에 서서 돈, 돈, 돈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고도 했다. 이렇게 피가 묻어나는 편지를 보낸 후 열흘 만에 세상을 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작가들은 벼랑 끝에서 글을 쓴다. 그래야 좋은 글이 나오는가 보다. 죽음이 다가오는 절박한 심정, 간절한 바람,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안고 쓴 글이어야 사람들의 마음을 진동시킬 수 있나보다. 그것도 아니면 이 세상을 한탄하고 삶을 비관하면서 술에 취해 써 내려간 글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글은 여유롭게, 재미있게 쓰는 것이 아니라 피를 토하고 혼을 쏟아내듯, 몸을 바스러뜨리는 용기로 써야 하나 보다. 8월은 1년 중 가장 혹독한 달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무더위도 그렇지만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태풍,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소나기와 우박이 호시탐탐 우리 삶을 노린다. 한편으로는 뜨거움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시원한 곳이 생기며 예측하기 어려운 혹독함을 통해 나태함을 경계하게 한다. 뜨거움을 통해 식물들은 생장의 힘을 한껏 끌어 모아 열매를 숙성시킨다. 어쩌면 8월은 쉬어가는 달인가 싶지만 사실은 허술한 내면을 채우고 비장한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온다온다 하면서 소문만 무성하던 장마가 마침내 시작되려나 보다. 잔뜩 찌푸린 날씨인데도 후덥지근하여 주변 공기를 움켜쥐고 비틀면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새벽에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려 대더니 오후엔 반짝 하늘이 보였다. 듬성듬성 구름사이로 파랗게 드러난 하늘이 더없이 예뻤다. 텁텁함을 씻어버린 뒤 내리쬐는 햇볕은 따갑지만 우중충한 장마철에도 반짝 틈새가 있어서 한 철을 또 견디게 되나 보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머니는 꿉꿉해진 이불을 내다 말리곤 하셨다. 밤이 되어 바삭한 햇볕의 단내가 스며있는 홑이불을 덮고 누우면 수박처럼 달콤한 여름밤의 꿈을 꿀 수 있었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에서는 장맛비를 '매실이 익어갈 무렵에 내리는 비'란 뜻으로 매우(梅雨)라고 한단다. 이 무렵에 익어가는 것은 매실뿐만이 아니다. 매실의 사촌격인 살구도 있고 앵두, 자두, 복숭아 등도 이 시기에 익어가고 또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리 먹음직스럽지도 않은 매실이란 과일을 앞세운 것은 추운 날씨에 봄을 알렸던 매화의 고고한 잔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내 기억 속의 장마는 모내기가 끝나고 벼가 한창 자라는 시기와 맞닿아 있다. 보릿고개에 간헐적으로 내리던 빗물을 모아 간신히 모내기를 마치면 풍성한 장맛비가 내려 벼가 한껏 자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노릿했던 벼들이 어느덧 시퍼렇게 자라 있었다. 그 해에는 봄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모내기가 늦어졌다. 다행히 가뭄이 곧바로 장마로 이어져 농민들은 서둘러 모내기를 시작했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비라서 반갑기도 했지만 평소보다 시기가 늦어진 탓에 너도나도 모내기에 매달렸다. 그러다보니 점심과 새참은 들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때론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식사를 할 때도 있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해 여름 빗물에 밥을 말아 먹어 보았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듯 힘든 모내기를 끝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해처럼 힘든 시기는 없었다.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다가 실패하여 농사일을 돕고 있던 시기였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실패도 아팠지만 하루하루 농사일에 지쳐 앞날이 암담하기만 했다. 어쩌면 모든 꿈을 접은 채 시골 농군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다행히 장마가 끝나고 논에 물이 그득하여 벼가 한창 자라기 시작할 때쯤 부산의 이모님 댁으로 떠날 수 있었다. 도회지에서의 재수생활은 삶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길 만큼 힘들었다. 책을 놓아버린 기간이 길어서 제대로 따라가기도 힘들었지만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으스대는 친구들 앞에서 폭우에 휩쓸려버린 벼처럼 기가 꺾였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려오던 꿈을 접고 농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혔다. 비는 만물을 성장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매화가 지고난 뒤 매실을 키우고 여물게 만드는 것은 뜨거운 햇볕만이 아니다. 애지중지 돌보아 키우는 모판의 벼를 논에다 옮겨 심은 뒤 필요한 것은 풍성한 빗물이다. 열일곱 살 나이에 장마철 같은 아픔을 겪은 나는 스스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둡고 축축했던 일 년을 통해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인내할 줄 아는 저력을 얻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삶의 일반론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아픔의 연속일 수도 있다. 다만 아픔의 과정에서 무엇을 얻느냐에 따라 성장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마음을 한없이 들뜨게 만드는 흰 눈과는 달리 추적거리며 내리는 비에는 감성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약효가 들어있다. 은은한 음악과 차 한 잔 앞에 앉으면 지나간 시간들이 투명한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린다. 비가 그치면 곧 시작 될 올 삼복더위에는 밀쳐두었던 책을 이번에는 끝까지 읽고 말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나의 주량은 소주 두 잔. 이 한계를 넘어가면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이내 졸리다가 나중에는 두통이 온다. 밤잠을 설쳐야 하는 후유증도 겪어야 한다. 남들이 소주 두 병을 마셨을 때의 증상보다 더 심하니 술에 대해서는 상당히 경제적인 체질을 타고 났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 어느 상관은 말했다. "너처럼 술을 마셨으면 지금까지 절약한 돈으로 집 한 채를 마련하고도 남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되묻고 싶다. 두 잔만 마신다고 두 잔 값만 내게 한 적이 있었는가· 오히려 소주 두 잔의 주량으로 한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을지 상상해 보았느냐고. 술로 인해 얽히고설킨 이야기는 술을 즐겨하고 두주불사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술자리에서 소주 한 잔에 해롱해롱하는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술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쨌거나 술이 있어서 우리들의 삶이 더 다사다난해지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활기를 띠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문하게 되는 것은 '술을 왜 먹느냐·'이다. 술을 자주 먹는, 아니 먹어야 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켜본 관점에서의 그 이유란 것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뉴욕타임즈 기자가 영국의 탐험가이자 산악인이었던 '조지 멜러리'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었을 때 멜러리가 말한 답은 명언 중의 명언이 되었다. '거기에 산이 있기 때문'이라는 간단명료한 말이었다. 이 말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왜 술을 먹느냐·'에 대한 답으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들이 술을 대하는 습관도 등산과 많이 닮아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산 중턱에서 그만두는 경우는 몸에 이상 징후가 오지 않는 한 거의 없다. 술을 좋아 하는 사람도 한 번 시작했다면 꼭 정상까지 가려는 듯이 도전적으로 술을 먹는다. '반주로 딱 한 잔'이란 말, 99퍼센트 거짓말이다. 가끔 술을 통해 자신의 체력을 과시하고 정복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사람도 있다. 그에게 술에 대한 기억은 수많은 산을 정복한 기록처럼 상대를 굴복시킨 전사(戰史)로 가득 차있다. 술을 마시는 이유 중 등산과 유사한 점은 또 있다. 중독성이다. 높은 산에 오르며 고생할 때엔 내가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고 있나 싶을 때가 많다. 심지어 죽을 고비를 넘기거나 동상으로 손과 발가락을 잃은 산악인도 많다. 고통이 엄습할 때는 이제 다시 등산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2년만 지나면 발바닥이 근질근질해진다. 술도 똑 같다. 폭음으로 인한 인과는 늘 고통이 뒤따른다. 육체적인 고통도 있지만 취중 실수로 인해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술 앞에 선다. 술을 먹는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슬픈 이유는 술에 의지하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운 경우이다. 술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재를 잊어야 하는 경우도 그렇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술로 형성되는 인간관계를 쫓아야 할 때도 슬픈 이유에 속한다. 사실 소주 두 잔의 주량으로 술자리마다 쫓아다닌 이유도 술좌석을 통해 형성되는 울타리 안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함께 한바탕 거나하게 취하고 나면 아군이 되고,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될 수 있지만 술잔을 받아두고 주저하거나 일찍 자리에서 사라지면 결코 의리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요즘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술자리에 나를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술좌석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반복적 대화를 통해 아군이 될 수 있다고 믿던 친구들이 술을 못 먹는 나를 술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자기주장만 하는 친구들을 적당히 중재도 하고 차에 태워 각자의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줄 친구 한 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옛 속담에 술과 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이제 그 나이가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대중가요의 또 다른 이름은 유행가이다. 유행가란 '한 시절 유행하다가 사라지는 노래'라는 뜻이다. 클래식음악과 달리 대중가요는 생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꼬집어 약간 경시하는 의미도 담겨있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익히고 부를 수 있어서 서민적이며, 거친 삶이 그대로 녹아있어서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로가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대중가요이지만 유행가의 범주를 훨씬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 노래가 나온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퇴색되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이미자 가수는 2박3일이나 걸리는 긴 여정 끝에 사이공에 도착하여 위문공연을 펼쳤다. 매일 죽음과 맞서고 있는 수많은 장병들은 공연 중 동백아가씨를 따라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예 눈물바다가 되어버려서 공연을 하던 사람들은 격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을 울리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을 할 정도였단다. 10여년 세월이 흐른 후 이번에는 독일로 날아갔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한 공연을 펼쳤는데 그곳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났단다. 공연이 끝난 후에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보고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삶과 죽음이 뒤엉킨 하루하루 힘든 삶을 견디고 있었기에 고국에서 날아 온 가수의 애절한 노래는 저절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세월이 변해 요즘처럼 살만해진 시대에도 그러한 일은 벌어진다. 이미자의 '효콘서트'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저릿함이 가슴에 사무쳐 실컷 눈물을 쏟고 간다. 콘서트가 끝나고 공연장을 나서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이다. 감동의 눈물을 흘린 뒤에 찾아오는 후련함과 행복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또 다른 추억이 된다. 도대체 사람들을 저토록 눈물짓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동백아가씨라는 노래를 통해서 지나간 삶의 아픈 조각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다 보면 울고 웃던 옛 시절의 정(情)과 한(恨)이 가슴 가득 차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는 여든 중반의 장모님이 계신다. 장모님은 지금 대부분의 기억을 잃어버리셨다. 심지어 친동생들의 얼굴과 이름도 잊어버렸고 애지중지 돌보던 손자손녀들도 가물가물하여 앞에 서 있어도 못 알아보신다. 요양원에 자주 들락거리는 딸과 사위만 겨우 반가워하신다. 어저께는 같은 방에 계신 할머니 두 분과 함께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사드렸다. 오랜만의 바깥나들이에 한껏 기분이 좋아지신 장모님은 식사 후 식당 앞 벤치에 앉아 노래를 하셨다. 그런데 형제자매를 다 잊어버리신 장모님은 동백아가씨를 비롯한 옛날 노래들의 가사를 거의 다 기억해 내셨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어려운 노래도 손뼉을 치면서 따라 부르셨다. 끝내는 장모님의 18번 애창곡 '나는 속았네(원곡명; 나는 울었네/손인호)'를 부르셨는데 알 듯 모를 듯 눈가에 무언가가 반짝이기도 했다. 「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 저 달이 날 속일 줄/ 나는 울었네 나는 울었네 나루터 언덕에서/ 손목을 잡고 다시 오마던 그 님은 소식 없고 나만 홀로/ 이슬에 젖어 달빛에 젖어 밤새도록 나는 울었네∼」 갓 마흔이셨던 장인어른이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자 혼자 사남매를 힘들게 키우면서 한탄하듯 부르시던 노래였다. 장인께서 생전에 무엇을 속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몰랐네'를 '속았네'로 바꾸어 부르시는 그 애절함에서 먼저 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껏 견뎌온 삶의 회한이 발갛게 배어나왔다. 모든 것이 지워지거나 희미해져버린 기억의 어느 구석진 곳에 아직 저렇게 생생한 곡조와 가사가 남아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놀랐다. 그 노래는 아마도 머릿속 기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맺혀있던 핏빛 응어리가 한 가닥씩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텃밭에 이른 봄볕이 가득하다. 푸석해진 흙을 한 삽 가득 떠서 뒤집었다. 상큼한 흙냄새와 함께 밝은 햇살아래 드러난 것은 진갈색 흙속의 하얀 풀뿌리들이었다. 봄의 시작이 그곳에 있었다. 겉으로는 지난 가을에 말라비틀어진 고갱이들 밖에 보이지 않지만 땅속으로는 연노랑 줄기와 새잎을 밀어 올릴 준비가 끝나 있었다. 저렇게 가느다란 실뿌리들로 인해 텃밭 가득 피어날 온갖 풀과 꽃들을 상상하니 봄이 코앞에 어른거렸다. 올봄은 그렇게 텃밭을 파 엎으며 만났다. 옛날 친구네 텃밭에서 무 구덩이를 파며 캐냈던 그 봄처럼…. 중학교 1학년 때 사귀었던 그 친구에게는 죄를 지은 것 같은 아픈 기억이 나의 가슴 한편에 얹혀있다. 그와는 쌍둥이 형제마냥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번갈아 가며 친구 집에 들락거리며 무엇이든 똑같이 나누려고 했고, 늘 함께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무관심으로 인해 오해와 다툼이 있었고 그 후 서먹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걸 되돌리지 못하고 아주 헤어지고 말았다. 세월이 지난 후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은 그렇게 똑똑하고 정이 많았던 친구가 청년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 삶을 버렸단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천히 기억의 저편으로 가라앉았나 싶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문득문득 물위로 떠올라 나를 아프게 한다. 올봄에는 텃밭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쩌면 그와의 인연은 끝난 게 아니라 다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슴 아픈 인연이 있는 반면 하루하루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인연도 있다. 요즘 나에게 다가온 제일의 인연은 쌍둥이 손녀다. 그들이 우연하게 나란 사람을 할아버지라 부르는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수년, 수십 년 전부터 미리 예정돼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꼼짝없이 사로잡고도 남을 만큼의 진한 인연의 향기를 그들은 가지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는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비치기도 하고, 그녀의 엄마인 딸의 어릴 적 모습과는 그야말로 판박이다. 둘 중 한 녀석은 사위를 닮았다. 신기한 것은 아직 두 돌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의 성격과 행동이 사위의 과거를 짐작케 해 준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인연을 만들어 가고, 어떠한 인연으로 나타나게 되는지 그 아이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앞으로의 인연과 연결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두려울 정도이다. 인연의 힘은 보이지 않지만 강하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들이 제 편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주변 사람들이 맥을 추지 못한다. 오늘 아침 창가에 이름 모를 새 한마리가 찾아와 한참 동안 노래를 하다가 날아갔다. 새에게는 아침먹이를 찾고 있었거나, 아니면 친구나 짝을 찾는 일상이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아침을 선사해 줬다. 만약 그 시간 늦잠을 자고 있었다던가, 내 마음이 닫혀 있었다면 그 아름다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저귀는 새 한 마리와 그 소리를 인지하게 된 나의 만남, 이런 것이 인연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우리 삶의 순간순간이 인연 아닌 게 없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은 물론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모두 지나간 인연과 연결된 결과이고, 동시에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다. 보잘 것 없는 풀포기, 윙윙거리는 작은 벌레, 활짝 핀 꽃 한 송이가 나와의 인연이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의미심장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수많은 인연들이 가라앉아 있다. 그 인연들을 좋은 인연, 안 좋은 인연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는 아직도 그 인연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옛 친구와의 인연이 지금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처럼…. 아마도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다가오는 인연뿐만 아니라 지나간 인연마저도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 여인이 아들을 앞에 두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 울먹이는 어머니의 어깨를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싼 아들도 그렁그렁한 눈물을 붉어진 콧잔등으로 삼키고 있다. 그 옆에는 다소 뻣뻣하게 서 있는 아들의 목을 한껏 껴안은 엄마가 활짝 웃고 있다. 하지만 눈가에는 이슬처럼 맑은 눈물이 맺혔다. 조금 떨어진 저쪽에는 깔끔한 제복차림의 딸과 아빠가 서로 떨어질 줄 모르고 연인처럼 껴안고 있다. 그 옆에서 엄마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고 있고…. 엉엉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지만 주변이 온통 눈물바람이다. 특이한 것은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매달리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엄마아빠인 어른들이고, 의젓한 자세로 어른들을 다독이는 건 아이들이다. 한 달간의 힘든 기본군사훈련을 마치고 정식으로 사관생도가 되는 입학식장에서 해마다 볼 수 있는 정경이다. 아이들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해내었기에 저렇게 감격의 눈물까지 흘릴까 싶지만 부모의 애틋한 마음은 자식들의 변화하는 모습 하나하나가 감동이다. 첫돌 즈음 스스로 일어서서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을 땐 마치 지구를 들고 일어선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 어리광을 부리던 아이였는데 갑자기 훌쩍 달라져버린 모습이 낯설어서 더 눈물겹다. 태어난 후 가장 혹독하게 춥고, 배고프고, 힘든 겨울을 이겨내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는 아들·딸들을 보면서, 부모가 흘리는 눈물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정성들여 키워온 보람일 수도 있고, 어려운 환경에서 남모르게 쌓여온 한(恨)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이가 이제 내 품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서운함인지도 모른다. 말로는 다 풀어내지 못할 사연들을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과 두 손으로 가려야 할 만큼 쏟아지는 눈물, 눈가에 이슬처럼 반짝이는 눈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눈물은 감성의 바다가 출렁이고 철썩이며 넘쳐흐르는 물방울이다. 격랑을 품은 바다의 말없는 표현이다. 어떠한 사연으로 인해 조용하던 바다가 출렁이게 되었는지에 따라 눈물은 그 성분까지도 달라진다고 한다. 가슴을 쥐어짜는 슬픔으로 흘리는 눈물과 넘쳐나는 기쁨이나 감동에 의해 흘리는 눈물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떠한 성격의 눈물이건 한껏 쏟아내고 나면 바다는 잔잔해진다. 한바탕 비바람이나 태풍이 몰아치고 나면 적막한 평화로움이 찾아오듯 바다는 한층 순해진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눈물은 생리적 현상을 넘어 쩍쩍 갈라진 땅에 내리는 한 줄기 소나기와 같다. 들끓고 있는 콩물을 금세 잠재우는 한 바가지 간수 같은 존재다. 또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나의 바다는 깊이가 얕아서 쉽게 출렁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출렁임을 쉽게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속으로는 번개가 치더라도 그냥 삼키고 억누르며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살아왔다. 눈가가 붉어지면서 눈물이 핑 돌 때엔 얼른 고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하곤 했다. 마치 카드게임에서 내가 들고 있는 카드를 남이 보지 못하게 숨기듯, 혹은 푸른 제복 속의 군인정신이 무너질까 경계하듯 내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했다. 가을이 되면 높아진 하늘만큼 바다는 한층 투명해져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군복을 벗고 젊지 않은 나이가 되면서 눈물을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다. 별것 아닌 일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울컥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처음으로 목 놓아 실컷 울어보았다. 내 속을 숨기기보다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런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가슴 후련한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제 막 군인의 길을 들어 선 아이들이 애써 눈물을 삼키며 서 있는 모습에서 꼭 나의 옛날을 보는 것 같다. 깊은 바다나 넓은 호수의 물이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출렁임을 통한 위아래의 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명경처럼 잔잔한 바다는 배가 다니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결코 건강한 바다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초에 친구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편지는 먼 옛날로부터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날아 온 것 같았다. 그만큼 오래된 친구로부터 온 편지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정성이 느껴지는 편지가 얼마 만인지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풀을 발라 봉한 봉투입구를 열면서 마치 세월 속에 묻혀있던 비밀의 문을 여는 것처럼 떨렸다. 그냥 한 해를 보내는 소회와 함께 새해의 건강과 행운을 비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전화도 있고 예쁜 연하장도 있는데 굳이 옛날식 손편지로 안부를 물어온 그 친구의 아날로그적 우정에 가슴이 찡했다. 서로 자기 삶에 빠져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색이 좀 바래지기도 했지만 닿아있는 인연의 끈이 여전히 건재함을 편지 한 통이 일깨워 주었다. 한 통의 편지가 주는 감동과 여운은 남다르다. 직접 주고받는 대화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꾹꾹 눌러쓴 글자들 사이에 숨겨져 있다. 요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자 메일이나 메신저(문자나 카카오톡 같은)에 담기는 말은 즉시적이지만 가볍다. 반면 편지는 쓰는 순간부터 부치고 전달되는 모든 과정이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그 무엇보다 마음을 가지런히 정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글과 글씨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자꾸만 썼다 지우거나 새 편지지에 옮겨 적어야 한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함부로 먹었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감성은 풍성해진다. 직접적으로는 꺼내기가 낯간지러운 말도 은근하고 아름다운 표현으로 풀어 낼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편지는 문학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편지를 읽다보면 그 속에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10여 년 전 아들이 군대 입대한 후 한 달이 지나자 나름대로는 반듯하게 쓰려고 애쓴 편지를 보내왔다. 훈련 중대장이 의무적으로 쓰라고 한 편지였겠지만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읽고 또 읽고 있었다. 철부지 아들이 의젓한 군인으로 성장했다는 것도 대견스러웠지만 삐뚤빼뚤 써내려간 글씨 하나하나가 평소 사용하던 말이 아니어서 더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평생군인으로 살아 온 아빠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 때문에 나도 갑자기 뿌듯했다.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시간이 더 많아 관계가 소원했던 아들에게서 존경받는 아빠가 되었다는 생각에 약간의 흥분마저 일었다. 편지 한 통으로 인해 아들과 아빠 사이는 한 차원 달라졌다. 편지의 힘이었다. 그때의 편지는 가족관계를 입증하는 소중한 증거라도 되는 듯이 가족 앨범 속에 간직해 두고 있다. 세상은 급격하게 인공지능화로 바뀌어가고 있다. 일본에서는 벌써 인공지능이 쓴 소설도 나왔다고 하지 않는가. 머지않은 미래에는 명령만 내리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메시지를 만들고 전달하게 될 것이다. 편지는 옛 이야기에서나 등장하고 사전에만 존재하는 단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을 전하는 비밀스런 일에 인공지능이란 매개체가 끼어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꺼림칙하다. 마치 글을 잘 쓰는 친구에게 연애편지를 대신 써 달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은 역시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정(情)과 사랑이리라. 아무래도 옛날식 방법이 더 순수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은 속성자체가 지극히 원시적이고 아날로그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적 우정과 사랑에는 아날로그적 속성을 지닌 편지가 적격이다. 전자메일이나 SNS의 메신저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깊이와 넓이, 그 무엇보다도 품격을 지닌 그 아름다운 공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졸리는 눈을 참으며 새로운 한 해가 열리는 시간을 기다렸다. 예전에는 이 시간이 다가오면 꼭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두근거렸었는데 지금은 그저 밋밋하다. TV에 방영되는 제야의 종소리가 여운도 없이 둔탁하게만 들리고 종을 치는 사람들의 하얀 입김은 그냥 춥다는 생각만 든다.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던 어린아이가 크리스마스 밤에 일어날 일을 이미 알아버린 후의 기분이랄까? 드라마에서 다음 편의 전개가 빤하게 그려질 때의 그 김빠진 맛이랄까. 한 살을 더 먹게 된다는 것, 그리고 한 해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봐도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인 순간에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애써서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변화를 향한 굳은 결심을 하더라도 삼일이 채 지나기 전에 흐지부지해질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다면 진지해질 수가 없을 것 같다. 전에는 그걸 알면서도 부지런히 계획을 세우곤 했다. 하다못해 일 년 동안 도전해보고 싶은 일의 목록이라도 써 붙여야만 마음이 편했다. 요즘은 TV나 신문에서 떠드는 '새로운 변화'이란 말이 왠지 나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들린다. 이미 습관화된 삶의 틀에 갇혀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언뜻 생각해 낸 것은 옛날 이맘때쯤 세웠던 각오나 계획을 다시 뒤적거려보는 것이었다. 삼십대 후반 쯤, 작은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돼 살림이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 집에서 떡국을 먹고 놀다가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지만 희망의 씨앗을 심어보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마침 '주부생활'이라는 여성잡지의 부록으로 가족의 미래를 예상해보는 표가 붙어 있었는데 그 표의 빈칸을 채워보기로 했다. 연도별로 가족의 나이를 계산하고 예상되는 직책과 수입·지출을 따져 내 집 장만은 언제쯤 가능한지 등을 예측하도록 돼 있었다. 몇 년도에 애들이 대학교에 가고 내 나이 몇 살쯤 아이들이 결혼을 할 것이며, 내가 환갑을 맞이했을 때 손자는 몇 살쯤 될 것인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표는 미래에 대한 계획서라기보다 그저 정초에 가족의 소망이나 꿈을 담아 알아보는 토정비결 같은 것이었다. 표를 완성해놓고 보니 제법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혹시 더 이상 진급이 안 돼 이른 나이에 전역을 해야 한다면 작은 아이의 대학 등록금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교육보험을 들기로 했다. 꼬박꼬박 모은 돈으로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도 까마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그 표는 가계부 갈피 속에 들어가 잊혀졌다. 언젠가 짐정리를 하다가 그해의 가계부와 표를 발견해 아내와 함께 감회에 젖은 일이 있다. 사진앨범이 잔뜩 쌓인 책장을 뒤져 마침내 옛날의 그 표를 찾아냈다. 누렇게 퇴색된 종이 위에 지나간 25년의 삶이 겹쳐졌다. 언제 그날이 올까 싶었던 날들이 대부분 지나가버렸거나 지금 코앞에 닥치고 있었다. 일정표대로라면 제대로 맞추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실행여부로는 이뤄지지 않은 것이 거의 없어 뿌듯했다. 살아가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거나 겪어야 할 일이었으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표가 내 삶의 이정표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집 마련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아이들을 생각해서 안정된 주거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급을 해 군 생활을 명예롭게 마칠 수도 있었고, 약간 늦었지만 손자도 봤다. 살다보면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이정표가 필요하다. 다음 지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알려준다. 외국의 유명 여행지에서 '서울까지 0000㎞'라는 이정표를 만나면 한참동안 그쪽을 바라보게 된다.
시간의 흐름이 2016년이란 매듭을 남기며 지나가고 있다. 매년 한 해가 오고 가는 이맘때쯤의 감회이지만 또다시 새롭다. 만약 흐르는 시간에 일 년, 한 달, 하루와 같은 매듭이 없다면 살아가는 흔적을 무엇에 의존하여 기록하고 또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아마도 "언제·"라는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먼저 태어난 사람과 나중에 태어난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 삶 속의 크고 작은 일들과 희로애락의 감정마저도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져버릴지도 모른다. 매듭이 있기에 고달픈 하루를 내려놓고 쉴 수 있으며, 계절이 오고 감을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떠오르는 해이지만 '새해'라는 희망을 실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태양의 공전과 자전의 주기를 바탕으로 만든 약속에 지나지 않지만 시간의 매듭은 우리 삶을 단위별로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새해가 정유년(丁酉年) 닭띠 해란다. 그러고 보니 내가 태어난 해도 정유년이었다. 세월이 삽시간에 지나쳐 버린 것 같지만 꼬박꼬박 한 해씩 지나가 드디어 60번째에 이른 셈이다. 정유년에서 시작하여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인과 같이 59개의 매듭을 거쳐 다시 정유년이 되기까지 나는 어떠한 발자취를 남겼을까. 아무래도 내가 남긴 발자취는 대부분 군인으로서 그리고 조종사로서의 흔적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흔적은 평상시 사용하던 소소한 물건들이거나 인연이 닿은 사람들의 뇌리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 전부다. 3천 시간이 훨씬 넘는 나의 비행시간도 큰 발자취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자체로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느냐가 실질적인 나의 발자취일 것이다. 작년 1월부터 지금까지 충북일보를 통해 총 34편의 '하늘이야기'를 남기게 되었다. 평범한 조종사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내가 일간지 지면을 통해 글을 남긴 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커다란 영광이요, 뚜렷한 발자취였다. 나 스스로 긍지를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글재주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지면을 내어준 '충북일보사'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그 누구보다도 한 편 한 편의 글을 읽어준 애독자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머릿속의 생각 조각들을 엮어 한 편의 정리된 글로 써낸다는 것은 도공이 도자기를 구워내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흙으로 정성들여 빚었다 해도 막상 구워진 것을 꺼내놓고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글을 쓰기위해 소재를 찾고 다듬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들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지난 40년의 삶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2년 전 1월7일자 신문에 실린 나의 첫 글은 '진정한 하늘의 아름다움'이었다. 하늘의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하늘 위의 멋진 풍경이나 신기한 자연현상에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며 땀을 흘리는 훈련장으로서의 하늘은 내게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하늘의 아름다움은 조종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삶의 터전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썼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이었다.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치고 있지만 진즉 삶의 아름다움은 그 고통을 참아내고 극복하는 데에 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요즘 국내외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로 인해 다가오는 새해가 불안하다. 중요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는 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람들이 주인공임을 가르쳐 주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근간을 튼튼하게 지켜야 한다. 다 같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건강한 편대정신(編隊精神)이 요구되는 때이다. 전망이 다소 어둡더라도 희망의 밝은 기운을 모아 새해를 맞이하자.
군대 내에서 지휘관 한 사람의 모습이 부하들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수직적 조직체계를 갖춘 사회에서는 다 비슷하겠지만 나라를 지킨다는 대의大義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 사람의 멋진 지휘관으로 인해 수많은 부하들과 후배들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꿈을 꾸게 만든다. 역사적으로도 영웅은 군인인 경우가 가장 많았다. 내 기억 속에도 존경해 마지않는 멋진 대대장이 있다. 겉모습도 남자답지만 호탕한 성격에 유머감각마저 갖추고 있어서 누구나 호감이 가는 분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대대원들을 아끼는 생각이 남달랐다. 한 후배 조종사가 술에 취해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을 때였다. 대대의 기강을 무너뜨릴만한 실수였기 때문에 엄중한 처벌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대대장이 내린 처분은 우리들의 추측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대대장의 말을 잘 따르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모범생들만 있다면 누구인들 대대장을 못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진정한 대대장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공적인 임무수행을 할 수 있도록 이끌고, 문제를 일으키는 대대원이 있다면 그들을 다독이고 가르쳐서 정상적인 군인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대대에서 방출될 위기에서 살아난 후배조종사는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고, 우리들은 커다란 교훈을 배웠다. 마침내 내가 대대장이 되었을 때 그분의 모습이 줄곧 나의 지표가 된 것은 당연지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임기를 마친 후 2년이 채 되지 않아 전역을 신청하고 다른 길로 가버리셨다. 무슨 연유가 있어 의욕에 차 있던 그분을 전역하시게 만들었는지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 일로 인해 우리들의 심리적 충격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어린 마음에 그 분을 전역하게 만든 공군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최근 그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비행교육대대의 대대장이 2년의 임기를 마치면서 전역을 하겠다고 털어 놓았다. 비록 연륜이나 사관학교 졸업기수 차이가 많은 후배이지만 존경했던 그분을 떠올릴 만큼 훌륭한 대대장이라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역이라니· 또 다시 폭탄을 맞은 기분이었다. 군 조종사의 전역은 민간항공사로 간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하늘을 지킨다는 큰 뜻을 향한 비행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가족과 개인의 행복을 위한 비행을 하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그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아왔다. 또한 지智와 덕德을 겸비한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올곧은 성격은 이제 조종사의 길을 막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귀감으로 생각해왔는데 갑작스런 진로변경으로 후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공군을 이끌고 갈 중요한 역할을 내려놓고 민간항공사의 평범한 조종사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겠다니 그가 갈고 닦은 인격과 자질이 아깝고 안타깝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가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고 싶은 욕망이 있나보다. 그도 많은 시간동안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다져지고 쌓아온 경력과 노력한 결과가 엄연한데 그것들을 미련 없이 내려놓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길을 새롭게 도전하게 된 것은 공군에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멋있는 삶을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끝까지 생각의 전환점이 된 그 이유를 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금도 우직하게 한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이 멋있는 삶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수많은 외부의 유혹과 내부적 갈등을 이겨내고 처음 생각했던 가치관을 끝까지 고수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때 군을 떠나 더 나은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세태와 타협하는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최선을 다해 주어진 역할을 다했으니 이제는 다른 길을 찾는 것도 멋있는 일인 것 같다. 다만 나처럼 심리적 충격을 받는 후배들이 적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공군에는 훌륭한 지휘관이 많이 남아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사람이 그리워진다. 외로워서가 아니라 보고 싶어서 그렇다. 숨겨 놓은 사랑이야기가 없더라도 떨어져 구르는 낙엽위에 겹쳐지는 시詩 구절이 있고, 좌판에 놓인 빨간 홍시를 보면서 스치듯 떠오르는 인연도 있다. 추수가 끝난 들길을 한없이 걷고 싶은가 하면 저녁상에 올라온 매콤한 국 한 그릇에 울컥하기도 한다. 일조량이 줄어들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호르몬 변화가 사람들을 감성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그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가을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사색에 빠지게 하고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며 따스한 정이 그리워지게 한다. 이러한 증세가 깊어지면 이른바 '가을 탄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가 가을을 타고 있나 보다. 종일 울적한 기분에 빠질 정도는 아니지만 흐르는 시간이 아쉽고 무언가 허전하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키워주신 분들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 늘 가슴에 얹혀 있다. 평생 갚아도 모자랄 만큼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나 싶다. 사관생도 시절, 퇴교의 벼랑 끝에서 구해주신 스승 한 분은 영영 연락할 길이 없다. 같은 중대의 소속인원들을 단결시키려고 벌였던 일이 중요한 교칙위반 사건으로 번졌을 때였다. 조직을 지탱해 온 규율과 전통이었기에 모든 훈육담당관들이 주동자의 퇴교를 주장했다. 한 개인의 딱한 사정은 바람 앞에 등불 같았다. 하지만 담당중대장이었던 그분은 끝까지 나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 한 명의 제자를 구명하기 위해 학교당국의 상관들과 후배장교들까지 일일이 찾아가 설득하였다. 지은 죄는 무겁지만 그동안 보여준 생활태도와 규율을 위반하게 된 과정을 고려했을 때 퇴교는 너무 가혹하다는 뜻이었다. 그분의 열정적인 설득으로 인해 나는 겨우 살아남았고, 힘든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또 한 분의 은인은 비행교관이셨다. 고등비행과정 중 몇 가지 고민과 갈등 속에서 혼자서 뜨고 내려야 하는 솔로비행(Solo Flight)평가를 맞이했다. 평가 비행 전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러나 막상 비행이 시작되자 '엉터리'란 말이 듣기 싫어서 온 힘을 다해 주어진 비행과목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죽어라 해도 모자라는 판에 한동안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었으니 정해진 기준을 통과하기는 어려웠다. 조종하는 모습을 뒷좌석에서 찬찬히 지켜보던 교관님은 갑자기 평가를 중단하고 기본적인 조작부터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착륙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혼자의 힘으로 착륙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여러 차례 시도하였지만 교관님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착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종착륙시간이 임박한 마지막 기회에서 겨우 한 번 혼자의 힘으로 착륙했을 뿐이었는데 교관님은 합격판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모험 같았다. 교관님은 무엇을 믿고 합격평가를 내렸는지 밤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그 다음날 활주로 통제탑에 계신 교관님의 조언을 받아서 안전하게 착륙을 하였지만 등에 식은땀이 흥건할 정도로 긴장한 순간이었다. 두 번의 위기에서 만약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또는 정확한 규정을 적용하려 했다면 지금 나는 분명히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군인의 길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조종사가 아닌 평범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물론 지금의 이 길만이 자랑스러운 길이란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었다는 점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그분들은 현실이 아니라 나의 잠재력을 믿어 주셨다. 나는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살긴 했지만 그 분들에게 직접 감사함을 전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은혜를 갚는 올바른 방법은 내가 후배들에게 그분들과 같은 믿음과 사랑을 전하는 것임을 잘 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그분들이 그립다.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매일 매일의 삶이 지옥 같아서가 아니라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으려는 발버둥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에는 생각이 필요하지 않고 습관화된 일상만 있을 뿐이다. 굳이 깊은 사색이나 고민을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면 몸과 마음은 한 곳에 갇히게 된다. 그저 무탈하기만 하면 되는 시간에 떠밀리면서 무력해지고 만다. 먹고 자고 일하고 배설하는 것 말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 속에 섞여있으면서도 무언가 다른 개별성이 있어야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내가 사라져가는 것이다. 가을엔 더욱 그렇다. 여행은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시간을 나의 시간이라 할 수 없다. 나의 의지에 따라 무엇인가 할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는 그 시간만이 오롯한 나의 시간이다. 돈과 명예, 또는 생존만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행위를 해야 하는 시간은 나의 시간이라기보다 사로잡혀 끌려가는 시간이다. 나이가 들면서 세월의 흐름이 빨라지는 것도, 지나간 시간이 허무한 것도 그냥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연, 낯선 풍경, 지나가는 바람마저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 선택을 했고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감동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독자적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여행은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행위이다. 낯선 공간에서 무언가 특별함을 찾는 행위는 결국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려는 의지이다. 그냥 사라지고 있는 내가 아니라 아직 살아있고, 희망이 있으며,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은 삶의 여유가 있다고 격려하고 싶은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힐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래 맞아!"라고 맞장구 쳐주는 동행이 있으면 된다. 그곳에 아름다운 풍경이나 옛 사람들의 유적,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여행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여 몇몇 글쓰기 동호인들이 1박2일을 떠나자는 의기투합이 이루어졌다. 목적지는 문학의 도시 경남 통영. 날짜가 정해지고 동행할 인원과 일정이 잡혔다. 하지만 출발을 이틀 남긴 상태에서 암초를 만나는 듯 했다. 일본을 향해 태풍이 접근하고 있고 그 영향으로 남부지방에 강한 바람과 폭우를 예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출발이 임박해도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다. 결국 하루 전날 대장에게 우려의 문자를 날렸다. 돌아온 답은 딱 한 마디였다. "우리는 그냥 갑니다." '우리'가 누구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우리'라는 그룹에 들기 위해서는 더 이상 꼬리말을 달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여행의 목적이 분명한데 뭐가 문제냐는 뜻이었다. 경치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닷가의 맛난 음식이나 문학의 향기를 느끼는 일은 어디까지나 표면일 뿐이다. '우리'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어딘가로 훌쩍 떠난다. 그것이면 족하다는 뜻이었다. 더구나 '낯선 곳에서의 하루 밤'이 있지 않은가. 남쪽으로 다가가자 예상했던 대로 비와 바람이 앞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것들이 여행의 설렘을 가라앉히기는커녕 더욱 들뜨게 할 뿐이었다. '동피랑 벽화마을'을 한 바퀴 돌고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여행지의 밤은 벌써 다가와 있었다. 빗물로 인해 도시는 온통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시가지를 벗어난 숙소주변은 짙은 어둠 속에서 빗방울만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너도 나도 뒤얽힌 삶의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창밖에는 세찬 비바람과 성난 바다가 하얀 거품을 튀기며 싸우고 있었지만 방안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파트에 살다보니 먼 추억의 소리가 되어버린 낙숫물소리를 푸지게 들으며 여행지의 낯선 밤은 어느덧 새벽을 달리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전에 타던 비행기를 조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늘 타던 비행기도 수많은 작동절차에서 혹시 실수가 있을까봐 조심스러운데, 과연 날 수 있을까 싶은 고물 비행기로 왜 비행을 하라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기억을 되살려서 시동을 걸고 이륙을 해야 한다. 이래저래 시도를 하다 보니 마침내 시동이 걸렸다. 하지만 이륙을 앞두고 안전할지 자신이 없다. 어쩌면 명령이 취소되지 않을까 싶어 머뭇머뭇 시간을 계속 끌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개꿈이려니 하였지만 이륙을 앞두고 고민하던 기억이 하도 생생하여 출근하는 기분이 찜찜했다. 비행은 습관화된 절차와 몸에 익혀진 감각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두뇌가 조종이라는 3차원 공간에서의 빠른 상황판단과 반사적인 조작을 제대로 통제하기 어렵다. 그래서 비행훈련은 뜨고 내리며 기동하는 전 과정을 몸의 감각에다 새겨 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매일 반복적인 훈련을 하면서도 심리상태나 몸의 컨디션 유지가 중요한 이유이다. 뒤숭숭한 꿈자리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출근한 후 비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묻혀 버렸다. 하지만 감각은 무의식중에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다. 공중에서 계획된 비행과목이 거의 다 끝날 때쯤 항공기의 진동이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즉시 엔진계기를 점검했지만 이상이 없었다. 다시 마지막 과목을 시작하려고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각 실린더의 온도를 점검하는 스위치를 하나씩 돌려가며 세밀하게 점검하였다. 결국 마지막 6번 실린더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두 번, 세 번 다시 봐도 결과는 똑 같았다. 즉시 비행장 쪽으로 기수를 돌렸으나 제법 거리가 먼 모(母)기지까지 귀환은 어려울 것 같아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점점 진동이 심해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계획을 바꾸어 근처에 있는 육군 비행장에 비상착륙을 시도하겠다고 알렸다. 헬기를 운영하는 육군 비행장이라 활주로가 좁고 짧았지만 평소 훈련한 비상절차대로 착륙을 시도했고, 무사히 내렸다. 착륙 후 문득 지난 밤 악몽이 떠올랐다. 조종사들은 꿈이 주는 의미를 섣부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과의 연관성이 얼마만큼 있는지 밝혀진 것은 없지만 그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종사가 출근과 동시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일 컨디션 점검표를 하나씩 점검하는 일이다. 잠을 잘 잤는지, 아침식사는 했는지, 혹시 감기약이나 술을 먹지는 않았는지, 심신이 피로하지 않은지, 오랜만에 비행하는 것은 아닌지 등 시시콜콜 20여 가지나 된다. 자신이나 가족의 꿈자리에 대한 내용도 있다. 아내나 부모님께서 안 좋은 예감을 밝히면 비행계획을 취소할 수 있다. '머피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나에게 가장 안 좋은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그렇게 될 것이란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진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심리학자들은 공교롭게도 일이 잘 안 풀린 경우나 재수가 없다고 느끼는 일만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른바 '선택적 기억'이란 심리현상으로 설명한다. 뇌에 대한 연구결과, 꿈도 본능적 욕구나 심리적 불안감으로 인한 심리작용일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꿈으로 인해 찜찜했던 나의 예감이 그대로 적중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쨌든 심리현상이 비행기의 물리적 고장을 불러올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도 일치했을 뿐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어딘가 미심쩍지 않은가? 모든 꿈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암시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직관에 의한 미래의 예지 능력은 경험적으로도 분명히 있어 보인다. 옛날 사람들도 해몽을 통해 중요한 일을 감지해 내지 않았는가. 전적으로 꿈에 의지할 수는 없지만 경각심으로 받아들이면 그 나름대로의 의미는 충분히 있다. 꿈을 그냥 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보니 어쩔 수 없이 나를 걱정하시던 부모님만큼 나이가 들은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특별하다. 생태적 특징을 주고받는 밀접한 관계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수많은 화두(話頭)를 던지는 관계여서 그렇다. 아버지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삶의 지혜를 전해주려는데 아들은 그것을 무의미한 잔소리로, 또는 불필요한 간섭으로 받아들일 때 화두가 일어난다. 나도 그랬다. 올바른 길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아들에 대한 참교육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늘 아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들의 눈에는 나의 좋은 점보다 좋지 않은 점이 더 많이 보였던 것 같다. 서로에게 수많은 화두를 주고받은 후 비로소 가로 놓인 깊은 골짜기가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했다. 심리학자들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경쟁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는 생각이 더 우세하단다. 신경림 시인은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집으로 들어오고, 노름으로 밤을 새기도 하며, 종종 장바닥에서 광부들에게 멱살을 잡히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자랐다. 그 다음날 아버지에게 아무 말 없이 술국을 끓여내는 어머니가 한없이 애처롭게 보였다. 그래서 가족을 힘들게 하는 짓은 일체 하지 않았고, 남에게 빚지는 일이 없도록 열심히 살았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아서 주변사람들에게 늘 당당하고 떳떳한 삶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바라보니 자신은 간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 있더란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던 것이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초라해진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그의 술회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들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기도하다. 유난히 질기고 텁텁한 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무렵, 알프스의 몽블랑 트레킹(TMB) 여행을 떠났다. 일행 중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행한 팀도 있었다. 같이 먼 여행길을 나섰다는 것만도 한없이 부러운 일인데, 다정하게 걸어가며 사진도 찍고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 모습은 알프스의 풍경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아버지의 허리통증이 도져서 모든 짐을 아들이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게 되었다. 홀가분해진 차림으로 산길을 걷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몸도 가뿐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들에게 의지할 수 있고, 무언가 넘겨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없는 기쁨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아버지는 무언가를 아들에게 전수하여 흔적을 남기려는 잠재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것이 무거운 짐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분신이 되어 준 아들에게서 뿌듯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혹시 아버지와 아들간의 일반적인 갈등은 그러한 본능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실망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공군사관학교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비행기와 한 몸이 되어 교정을 바라보는 동상이 서 있다. 아버지가 비행사고로 순직했을 때 어린 아들은 고작 다섯 살이었다. 홀어머니 아래서 훌륭한 물리학자의 꿈을 키우며 자라던 아들은 어느 날 제복차림의 친구를 만나고는 군인이 되겠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어머니는 한사코 말렸지만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조종사는 절대 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미 들어선 그 길에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아들마저 비행사고로 순직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조종사의 길을 택하면서 아들 스스로 한 말도 운명이었다. 운명이란 미리부터 정해져 있는 대로 흘러간다는 뜻이라면 그들에겐 너무 잔인한 말이다. 차라리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꿈을 꾸고, 같은 방향으로 이끌렸던 것은 유전적 요인이 아니었을까? 요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힘든 전투조종사의 길을 택하는 아들들이 많아졌다. 조종사가 인기직종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좋은 조종사아버지가 많다는 뜻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