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굵은 자막으로 뉴스특보라고 올라오던 누군가의 검찰청 입장과 퇴장에 관한 내용이 하루 종일 지겹도록 방송에 나오고 또 나오고, 지난해 하반기부터 계속 똑같은 주제를 다루던 여러 시사 프로그램들도, 이제는 슬금슬금 다음 우리의 지도자가 누가 될지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방송하기 시작했다. 절망에 빠진 국민들도 이제는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면서 아주 조금씩 만성 피로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대권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은 하나같이 일자리 공약에 많은 공을 들인 모양세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 그간 청년 실업의 문제를 청년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어른들의 시선이, 그나마 지금부터라도 같이 해결해 보자는 지금의 변화는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물론 그간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이 이번 국정 농단 사태에 있어서는 SNS라는 강력한 매체를 동원해 온-오프라인상에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의 인기(·)를 끄는 것 역시 선거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됨을 깨달은 정치인들의 전략 중 하나일테지만, 어떤식으로든 청년 실업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게 된 사실 만으로도 꽤나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후보는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려 청년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준다 하고, 또 어떤 후보는 청년들의 중소기업 취업 활성화를 위해 중소기업 임금을 대기업의 80%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지원 해 준다고 한다. 또 어떤 후보는 좀 더 거시적으로, 우리나라 경제 여건 자체를 개선해서 경기를 회복시켜서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하고, 또 어떤 후보는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도 하다. 사실 모든 후보들이 내 세운 이러한 공약들은 현재 우리나라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두 필요한 내용들이다. 매 년 공공기관이든 공기업이든 인턴이라도 해서 일단 취업을 물꼬를 트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 수 십만명이니, 공공부문에 일자리가 늘어나면 당장은 이들에게 희망적인 일은 될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취업을 희망하는 젊은이들의 장래희망이 모두 다 공무원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고, 누군가는 화가가 되고 싶었을 텐데, 다만 그런 꿈을 잠시 접고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공공기관이나 공기업 인턴에 기웃거리고 있는 이들도 있을텐데... 왠지 이들의 꿈은 뒷전으로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취업을 앞둔 취준생들은 부모님과 부모님 친구분들이 가장 신경쓰인다. 이름만 대면 알법한 회사에 취직한 어머님 친구 아들얘기가 나오면 슬며시 집 밖 놀이터로 나오는 젊은이들은, 부모님께 떳떳하게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노라 알려드릴 순간을 상상하면서, 하염없이 대기업 공채만 손꼽아 기다리며 스펙을 쌓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 중소기업 임금을 대기업의 80%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면, 점차 대기업만 선호하는 우리의 인식도 변화는 하겠으나,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 아무리 연봉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유일한 선택의 척도는 아닐텐데...최근 대학생들의 구직성향 조사에 따르면, 기업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인 중 연봉에 버금가는 요소로 기업의 비전과 발전 가능성이 중요하다고 응답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의 열정과 능력을 높은 연봉만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청년 취업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공약들이 있고, 이러한 공약들은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왠지 당사자인 청년들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정권에서는 다만, 수 없이 뿌린 나의 이력서를 받은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응답이 더욱 많아지기를, 나의 능력과 역량을 인정해주는 비전 있는 회사가 더욱 많아지기를, 더 나아가 취업을 하고 직업을 갖는 일이 결국 나의 꿈을 실현 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기를 바래 본다.
'통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막힘이 없이 들고 나다'이다. 이 의미를 잘 살펴보면, 무언가 들고 나야하는 '나'와 '너'가 있어야만 '통한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인가. '막하지 아니하고 잘 통하다'이다. 즉, 2명 이상의 관계에서 무언가 막힘이 없이 잘 들고나는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소통'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소통'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너'의 생각이 막힘이 없이 잘 들고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너'의 생각이나 의견에 대해 그렇다고 느끼거나,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방과 내가 같은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그와 나의 생각이 막힘없이 들고 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과의 '공감'이 필요하고, '공감'을 위해서는 서로의 생각이 같아지려고 하는 노력 즉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여러 가지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사람들은 서로간의 '소통'을 강조한다. 그러나 보니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무작정 한 자리에 불러다 놓고 그저 서로의 의견을 '말'해 보라고 종용한다. 그렇게 시작된 자리는 결국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이 너무나 다름을 상기시켜주기만 하고, 어느새 누구의 논리가 더욱 탄탄한지, 누구의 세력이 더욱 강력한지 등을 견주고는 싱겁게 끝나버리고 마는, 무늬만 '소통의 장'이 펼쳐진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같은 생각이 되도록, 혹은 나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같아지도록 노력하는 작업, 즉 '공감'이 필수적이다. 소통을 위해 만났다면 적어도 나의 생각이 상대방의 노력에 의해 바뀔 수도 있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인데, 우리는 항상 상대방의 생각을 나와 같은 방향으로 바꾸려고만 하고 있지 않은가. 곧 다가 올 대선에 출마하는 대권주자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나의 생각이, 나의 계획이 다른후보의 것 보다 좋은 것이니 나를 선택해 달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우리를 그들의 생각과 주장에 공감하도록 재촉하기 전에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이려하는 자세는 보여줬었던가. 사회 이 곳 저 곳에서 누군가는 새벽부터 홀로 피켓을 들고 무언가를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누군가는 매일 학교로, 학원으로, 다시 학원으로 뱅글뱅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을 하고, 또 누군가는 아픈 가족을 위해 병상 옆에 간신히 쪼그리고 잠을 청하는, 정말 여러 가지 사람들이 있다. 과연 이렇게 각자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정치인들은 진지하게 '공감'을 하고 있을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자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무실에 앉아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다보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배달시켜 먹어야 할 때가 많다. 그 때부터 동료들과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제 과음 한 탓에 해장국이 필요한 직원도 있고,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누군가는 달달한 자장면이 필요하기도 하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는 생각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메뉴를 선정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나의 생각을 양보하고 상대방의 생각에 동조 해야만 한다. 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끊임없이 '공감'과 '소통'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 굳은 심지를 가지고 나의 생각과 주장을 관철시켜내는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변화 하였다면, 융합이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언제든 상대방의 설득에 내가 설득 당할 자세를 가진, 그래서 더 많은 공감과 소통을 할 줄 아는 사람, 즉 공감과 소통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리더가 되지 않을까.
기업이 가진 대표적인 재산은 무엇일까 떠올려 보면, 제일 먼저 기업이 가진 '돈'이 떠오른다. 주식, 건물, 예금 등의 재무적 자본이 그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내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에서, 사람이 가진 지식이나 기술이 요구되는 산업의 분야가 늘어나면서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역시 기업이 가진 중요한 자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기업은 더 나아가 그 '사람'들이 가진 역량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똑똑한 직원들이 많을수록 기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학습한 기업 관리자들은 직원들이 하는 일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필요한 기술에 대해 온라인 강의까지 도입하여 직원들을 교육하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기업에서 뛰어난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직원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기업은 그 직원 한사람의 힘으로만 움직여 질 수 없는 구조로, 분명히 여러 사람과 협업하여 원만하게 일을 처리해야하기 때문에 직원들 간 팀웍을 높이기 위해 항상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경험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일수록 삶에 만족할 가능성이 높고, 더 많은 양질의 대인관계를 형성한다. 협업과 팀웍이 중요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갖는 양질의 대인관계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며, 따라서 개인의 '긍정성'역시 기업이 확보해야 할 중요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근로자들이 갖는 긍정성에 자본의 개념을 접목하여 '긍정심리자본'이라는 영역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의 자본이 될 수 있는 긍정심리자본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긍정심리자본은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구분 할 수 있는데, 근로자가 열심히 일을 하고 싶도록 긍정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희망', 내가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내가 하는 일이 회사에 매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효능감', 역경과 실패가 닥쳤을 때 빠르게 회복하는 힘인 '회복력', 언제나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 이라는 생각하는 '낙관'이 학계에서 근로자들의 '긍정심리자본'을 구성하는 요인들이다. 더 이상 기업 입장에서는 새로운 직원을 채용할 때 토익이나 학력 등과 같은 기술적인 요인들만 살펴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긍정적'인 사람인지, 즉 그 사람이 가진 '긍정심리자본'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세운 계획이나 목표가 꼭 달성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그 업무를 잘 수행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있는 사람, 혹시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실패를 겪더라도 빨리 툴툴 털어버리고 다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 항상 나의 회사생활은 행복 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어야 융합과 통합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흔히 '웃으면 복이 온다'라시며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면 언젠가는 꼭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일러주신다. 이러한 어른들의 말씀에 대해 왜 그러한지 분석하고 구체화 한 것이 '긍정심리자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행복하고 즐거운, '긍정적'직원들이 많은 기업일수록 성과도 좋아질 수 있다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접하면서, 기업은 더 이상 근로자들을 '수단'이 아닌 행복한 직장생활을 통해 기업에 성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며, 직장생활을 하는 근로자들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긍정성이 업무 수행에 필요한 기술을 갖추는 것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근로자가 일을 하면서도 행복을과 만족을 느끼고 작금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성'을 잃지 않는 환경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혼밥(혼자 밥먹기) 난이도'란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와 클릭하게 되었다. 먼저 입문코스라고 소개된 곳은 '학생식당' 이었다. 식당에 들어서면서 몇 명이냐고 물어보는 점원이 없고, 자동판매기에서 원하는 메뉴를 골라 식권을 받으면 되는, 그야말로 혼밥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진화하여 중급코스라고 소개 된 곳은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테이블 간 높은 파티션이 쳐져 있고 어두컴컴한 조명 때문에 혼자 밥 먹기에 그리 민망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혼밥의 고급코스라고 소개 된 곳은 고깃집으로, 간혹 1인분 단위로 주문 할 수 없는 곳도 많으며, 대부분 옆자리에 누가 밥을 먹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구조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의야한 눈빛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더니 이러한 틈새를 파고들어, 독서실 칸막이 같은 장소에서 홀로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도록 한 혼밥족 전용 고깃집이 문을 열기에 이르렀다. 혼밥 전용 고깃집을 살펴보니, "혼자서 편하게 드세요"라는 안내문구가 적혀있고, 각 자리마다 놓인 TV는 이어폰을 꼽고 볼 수 있었으며, 옷걸이에 스마트폰 충전기 까지 구비되어 있다. 정말 새롭고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96.4%가 혼밥의 경험이 있다고 했고, 74%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혼밥을 한다고 응답하였다. 사실 기존의 혼밥은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어서 불가피하게 혼자 먹는 상황을 일컬었으나, 최근의 혼밥의 이유는 자발적인 경우들로, 이제 혼자 먹는 것이 '편하게'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청년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가정을 꾸리기 힘든 사회적 구조 속에서 점점 결혼의 적령기가 늦어지고, 더 나아가 혼자 살겠다는 비혼주의 남녀들이 늘어나는 사회 현상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과 분야 간 '융합'이 키워드이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에 발맞추어 아이들의 교육 역시 과거, 혼자만 잘 하면 되는 방식에서, 두루두루 친구들과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기업에서도 과거, 능력이 출중한 소수의 인원이 기업 전체를 끌고 갔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기업 근로자들 간의 집단지성을 이용한 협력이 기업 경쟁력의 근원이 되는 시대이다. 이처럼 청년들이 자리 잡아야 할 기업에서는 융합과 교류를 강조하고 있지만, 청년들이 홀로 밥 먹는 것이 편안하도록 느끼게 하는 현재 우리의 상황이 왠지 아이러니 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얼마 전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부동의 점심메뉴 1위 김치찌개를, '가정식 백반'이 제쳤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한 변화로 가정식 백반, 즉 집 밥이 최근 혼밥과 함께 부상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유행처럼 번지는 '집밥'에 대한 관심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TV프로그램에서도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각종 비법과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집 밥, 즉 '가정식' 백반은 메뉴가 중심이 아닌,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관계'가 핵심이다. 집밥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요리의 기술을 알려주기 보단, 출연진들이 소소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거기에 약간의 요리 팁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이러하니,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떠 먹는 겸상의 따뜻함을 기억하는 이에게 혼밥은 얼마나 그들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것일까. 타인의 간섭 없이 편안하게 식사 할 수 있는 혼밥 전용 식당에서, '가정식' 백반을 선택 해 먹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엄마가 끓여주시던 된장찌개, 아버지 앞에 바짝 놓여진 고등어구이, 동생과 나눠먹던 계란후라이가 그리운, 이러한 따뜻한 온기와 관계에 목말라 있는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어느 순간 뉴스를 보다보면, 전혀 생소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등장한지 한참이나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4차 산업 혁명, 핀테크... 도대체 아나운서의 음성과 화면의 자막이 한국어와 한글로 표현하고 있지만, 관련 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저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는 다시 한 번 핸드폰으로 다시 검색 해 봐야 대략이나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점점 생소한 단어와 상황들이 많아지는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하루에도 수십만가지씩 새롭게 생겨나는 사건과 이슈와 상황들을 얼마나 알아채고 대비하고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 간 우리 나라의 조직은 마치 군대와 같았다. 규율과 위계가 중요시 되고, 시키면 해야 하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조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마치 소속 된 근로자들은 당연히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돌격대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결국 전쟁 후 눈부시게 발전한 대한민국을 일구어낸 저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전에 해 왔던, 우리가 성공해 왔던 방식과 원리대로 그저 부지런히 단계를 밟고 절차를 밝고, 조직에 순응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하루에도 수십만가지 발생하는 변화에 대응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사건과 상황의 본질을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先행동 後보고와 같은 순간적인 판단력과 날렵함이 무기가 되지 않을까· '세상의 룰이 바뀌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 돌아가는 그 모든 상황을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 한 일이 되어 버렸다. 즉, 현대사회의 조직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원리와 법칙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해열제를 만드는 제약회사에서 속옷 매장을 할 수도 있고, 가구를 만들던 회사에서 의약품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열제를 만드는 제약회사에서 왜 속옷 매장을 운영하는지 상황과 원리와 이유부터 단계적으로 파악하는 일 보다, 그들이 가진 경쟁력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며, 가구를 만들던 회사에서 만든 의약품은 어떠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지, 나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빠르게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욱 필요한 활동 일 것이다. 우리 시대 청년들의 취업 전략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 대기업에 취업 한 선배들이 해 왔던 방식으로, 즉 토익 성적, 학점관리, 해외 봉사활동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기업 환경에서 싸우기에는 너무 오래 된 구식 무기들인 것이다. 청년들은 그들의 이름과 뼈대만 남기고 모든 것이 흐르고 변신하고 상상하고 창조 해 낼 수 있는 유연성이 있어야 더 큰 세상을 호령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자면 실패가 반복되어도 기꺼이 이를 통해 성장해야 하며, 기성세대 역시 이러한 과정을 겪는 청년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을 거두어야만 청년들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기회를 움켜쥐고 그 것으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내는 것이 가능 해 지는 것이다. 유연한 인재는 가고 싶은 기업을 고를 때 기업이 주는 월급과 연봉이 아닌 그 기업의 미래 가치와 비전으로 평가해야 하며, 속도는 에너지이고, 시간이도 돈이 됨을 잊지 말고 여러 가지 상황을 체험하고 준비하기 위해 더욱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과민반응 하지 말고 항상 내가 최고 인 것처럼 행동하며, 본인이 겪고 생각한 일들에 억지로 논리를 부여하기 보다는, 본인만이 가진 스토리를 강화해야 한다. 먼저 지나간 선배들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때로는 나만 가지고 있는 나만의 특징을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청년들에게 실패를 두려워 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말이 매우 진부해져 버린 시대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의 기회 역시 오직 청년들에게만 관대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변화하는 시대에 부합하는 '유연한'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생각 해 봐야 할 것이다.
올 해 정부에서는 일-가정을 양립하기에 적합한 근로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근무혁신 10대 제안'을 발표하였다. 이 제안의 내용은 ⓛ 정시 퇴근, ② 퇴근 후 업무 연락 자제, ③ 업무집중도 향상, ④ 똑똑한 회의, ⑤ 명확한 업무지시, ⑥ 유연한 근무, ⑦ 똑똑한 보고, ⑧건전한 회식문화, ⑨ 연가사용 활성화, ⑩ 관리자부터 실천 이다. 최근에는 많이 유연해 졌으나, 아직도 많은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는 소위 윗분들이 퇴근하지 않으시면 나의 일이 끝났어도 자유롭게 퇴근하지 못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만약 정시에 퇴근하는 것에 크게 어려움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가정으로 돌아가서 또 다시 육아와 살림 등의 두 번째 근무를 회피하기 위해 야근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퇴근하여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는 것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너무나 발전하고 진화 한 SNS 매체들로 인해 사실상 집에서도 상사의 업무 지시를 받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매우 당연한 업무 소통 방법이며, 오히려 이러한 업무 처리 방식이 굉장히 '스마트'하고 '세련'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일부의 시각도 있다. 워킹맘의 하루를 살펴보면, 어린 아이가 있는 경우에는 해도 뜨기 전부터 일단 아이를 깨워서 친정엄마댁으로, 시댁으로, 아니면 아이 봐주시는 이모댁으로 데려다 줘야한다. 그렇게 서둘러도 9시까지 출근하는 것은 언제나 빠듯하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경우에도 본인 출근준비와 더불어 아이들 남편 아침 챙기고 출근을 해야 하니, 출근하는 차 안에서 1분단위로 시간을 확인하며 종종걸음으로 가까스로 회사에 입성한다. 직장에서의 회식은 어떠한가. 회사에서의 직급이 곧 서열이 되어 식당 좌석이 결정된다. 본인이 높은 직급이라면 자리의 가장 중앙에서 여유롭게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높은 분(?) 옆에 자리 잡은 부하직원은 직장 상사께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삼겹살을 구워드리리라는 각오로 고기를 구워야 하며, 그분의 술잔이 비어 있는 것은 옆에 있는 부하직원의 센스가 부족하다는 증거가 된다. 2차로 노래방이라도 가게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떠오르지도 않는다. 오로지 즐겁고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어드리기 위해 슬쩍슬쩍 휴대폰 검색창에 '분위기 띄우는 노래'를 검색한다. 매일 계속되는 야근과 회식으로 인해 하루쯤 쉬고 싶은 때가 있어도, 휴식을 위해 휴가를 내고 싶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조직은 많지 않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아이들 학교 행사가 있어서 등등 눈치껏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분명히 법적으로 보장 되어 있는 연가임에도 상사가 기분 좋을 때 말씀드리지 않으면 회사는 바쁜데 혼자 빠진다는 식의 꾸중을 들으며 어느 샌가 나는 이기적인 직원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의 일-가정 양립 제도는 사실 선진국의 제도와 비교해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제도들은 그저 제도일 뿐, 이러한 장치를 활용할 수 있는 문화를 가진 조직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아이가 있는 직원이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이를 학교나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할 수 있도록 조금 늦게 출근하고 대신 늦게 출근 한 시간만큼 퇴근시간을 늦추는 유연근무제도가 있으나, 문제는 근로자가 이 제도를 활용하겠다고 회사에 요청하는 과정인 것이다. 있는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대단히 '눈치'를 봐야하는 문화가 좋은 제도의 활성화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직장과 가정생활 모두 잘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제도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기업의 문화 변화가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기업의 가장 큰 자산은 '사람'임을 인식하고 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가정생활 역시 행복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갑작스럽게 내린 눈 때문에 내일 출근길이 걱정되어 아주 잠시 짜증이 났다가, '찹쌀 떡~'하고 지나가는 소리에, 아주 오래 전 아버지 퇴근하시거든 드리려고 어머니께서 사 두셨던 찹쌀떡이 생각난다. 빨리 아버지가 퇴근하셔야 찹쌀떡을 먹을 수 있는데, 아버지는 왜 이리 안 오시던지. 그 무렵 기억을 떠올려 보면, 늦게 퇴근한 아버지는 피곤해 보였지만, 그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셨다. 최근 젊은이들이 과감하게 회사에 사표를 쓰고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가는 과정과 이유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그토록 원했던 취직을 하고 신입사원이 조기 퇴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젊은이들은 6시 땡 하면 집에 갈 수 있는 권한이 없다. 5시 50분부터 컴퓨터 전원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거울 보면서 머리스타일도 다듬고, 퇴근 준비는 되었는데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은 자리에서 미동도 없으시니 도저히 사무실을 떠날 용기가 없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선배님들보다 일찍 출근해 윗분들께 '나는 매우 부지런 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드려야 한다. 기성세대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어른'들 퇴근하시는 것을 보고 집에 가는 것이, '선배'님들 출근하시기 전에 먼저 와 있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고 하실 일이다. 회식자리는 어떠한가· 신입은 가장 끝자리에 앉아 가지런하게 수저를 준비하고, 술잔은 절대 상사보다 위에서 부딪히면 안 된다. 상사가 드시는 반찬 접시가 비기 전에 재빠르게 채워드려야 하고, 그 분이 집에 귀가하시기 전에 신입들에게 퇴근할 권리는 없다. 늦은 퇴근에도 별다른 불만이 없으셨던 우리 아버지 세대에서는 '직장'이 곧 삶이고, 그 직장은 우리 가족들을 먹고 살게 해 주는 아주 고마운 현장이다. 아버지의 직장생활이 곧 생계와 연결되는 상황 때문에 별 다른 불평과 문제의식 없이 그들의 삶, 가족구성원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아버지의 '직장'생활로 정해졌을 것이다. 우리 가족을 지탱해 주는 고마운 직장이니, 일찍 출근해서 회사 앞마당도 깨끗하게 쓸어두고, 쓰레기통도 비우고, 어제 상사가 주문했던 자료도 말끔하게 정리해 책상 위에 놔 드리는 일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아주 지극히 자발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ㅤ젊은이들의 상황은 좀 다르다. 그들에게 '직장'은 그들의 생활을 좀 더 윤택하게 해 주는 '도구'이며, 대학에 들어가서도 토익학원으로, 논술학원으로 쉴틈 없이 스펙을 쌓아 만든 그들의 '브랜드'이다. 기성세대 삶의 '전부'였던 직장생활과, 젊은 세대 삶의 '일부'인 직장생활, 서로의 계층에 대해 불만을 품기 전에 '직장'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힘든 과정을 거쳐 대기업에 입사 한 젊은이가 입사 1년 만에 퇴사를 결심하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해 다이빙 보조강사로 일하는 과정이 소개됐다. 이를 두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참을성 없는 놈', '한심한 놈'이라며 불만스러워 하셨지만, 정작 서울의 명문 대학을 나와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대기업에서 기계처럼 일하며 생긴 스트레스 때문에 공황장애까지 앓았던 그는, 다이빙 보조강사로 일하는 지금의 '직장'은 그에게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직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직장'에 대한 생각이 다른 두 세대가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생각과 행동이 틀렸다고 지적 할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직장'이 갖는 의미가 기성세대와는 조금 '다른'것이라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바빠서 항상 쫓기는 것 같을 때 /고민 때문에 생각들이 꼬리를 물 때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아 힘들 때 /미래가 깜깜하고 불안하기만 할 때 /우리 잠시 멈추어요. 멈추면 비로소 보여요. /내 생각이 /내 아픔이 /내 관계가. 그리고 멈추면 내 주변이 또 비로소 보여요. /나를 항상 도와주는 가족과 동료들의 얼굴들 /매일 지나치지만 볼 수 없었던 거리의 풍경들 /들어도 잘 들리지 않았던 상대방의 이야기들. 내가 지금 하는 것을 잠시 쉬면 /내 안팎의 전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요. -혜민 스님의 글 중에서- 나는 한동안 등산을 참 좋아했다. 동료들과 전국 유명산을 찾아 정산에 오르는 기쁨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기분이다. 등산을 할 때 쉬지 않고 오르다보면 앞서가는 사람의 발뒤꿈치만 보면서 걷게 된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중간 중간 쉬면서 오르다보면 보이지 않던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신비로운 모습으로 포개진 건너편 다른 산도 보이고, 숲과 나무가 보이고 나뭇잎들이 보인다. 봄에는 연둣빛 어린잎들을 보면서 희망을 키우고, 녹음 짙은 여름엔 살아있음이 행복하게 느껴지고, 가을 산 고운 단풍을 보면서는 마무리하는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으며, 겨울엔 꽁꽁 얼어붙은 자연 속에 생명이 숨죽여 봄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정말로 가던 길 멈추어야 비로소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 한다. 이제 우리는 임진년 끝자락에 와 있다. 정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는 것이다. 가는 세월이 아쉬워 망년회라는 이름을 걸고 각종 모임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목청을 높이며 한바탕 거나하게 취하기도 한다.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주부들은 가정의 알뜰한 살림을 위해, 취업준비생은 자신이 바라는 직장을 구하느라 애쓰고, 학생들은 좋은 성적과 진학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을 것이다. 나 역시 아침저녁 두 시간씩 출퇴근 시간에 쫓기면서 쉬지 않고 일에 몰두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아쉬운 시간 위에 서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중간 중간 멈추어 쉬면서 지나온 길도 더듬어보고 가야할 코스로 제대로 잘 달리고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동물들의 경주가 생각난다. 처음 한 마리 동물이 달리기 시작하자 다른 동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달리고, 그 다음엔 많은 동물들이 큰 일 난줄 알고 덩달아 달리기 시작하여 끝도 없이 달리는 우화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우리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닌데도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흉내 내면서 덩달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들이 돈을 버니까 나도 벌어야 하고, 남들이 소유하니까 나도 무조건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동물들의 경주처럼 그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나는 요즘 강제 멈춤을 당한 느낌이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나만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달리다보니 형제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형편이 어려운 동생이 사채를 끌어다 쓰고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혼자 감당키 어려워 도움을 청해왔다. 이제 동생의 빚은 무거운 짐이 되어 내 어깨를 누르고 있다. 앞만 보고 달리던 길 잠시 멈추고 주변도 살폈더라면 일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야 형제의 아픔을 보게 된 것이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돈이란 꼭 필요한 것이며 참 좋은 것인데 그 물건이 인간 마음대로 조정이 안 된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 모두는 가던 길 잠시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가야 하리라. 함께 가는 대열에서 낙오되는 형제는 없는지 간간이 살피면서 말이다. 하루코스의 등산길에서도 잠시 멈추면 많은 것들이 보이듯이 우리의 긴 인생 여정에서도 가끔씩 멈추어 서서 지나온 길과 주변을 둘러보아야 하리라. 그러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보일 테니까. 여러분을 둘러싼 세상이 너무 바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지요? 이럴 땐 잠깐 멈추고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하네요. 지금 내 마음이 바쁜 것인가, 세상이 바쁜 것인가?
어느 교회 목사님이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몸이 굳어 움직여지질 않았다고 한다. 팔다리는 물론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빨리 일어나 새벽예배도 인도해야 하고, 낮엔 여기 저기 심방도 다녀야 하며 약속된 이런저런 할 일이 많은데 큰일이다 싶어서 몸을 뒤척여 보려 했지만 여전히 꼼짝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혹 내가 죽은 것인가?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그 순간 목사님은 자리에 누워 하나님께 빌었다고 한다. 가족들과 작별인사도 못했는데 지금 떠나기에는 너무 억울하니 가족들에게 유서라도 남기고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자 거짓말처럼 꼼짝할 수 없던 몸이 자유로워져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에게 유서를 썼다고 한다. 그 동안 고생만 시킨 부인에게는 얼마의 돈을 남긴다는 내용과 자녀들에게는 이런저런 당부를 하는 유서를 마치고 자리에 누워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정신이 점점 맑아지고 몸이 자유로워 졌다고 한다. "아,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구나."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전과는 아주 다른 삶을 멋지게 살았다고 한다. 요즘은 유서를 미리 써 두기도 한다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하거나, 아니면 아주 많이 가진 자들이 죽은 후가 염려되어 유서를 써서 공증 받아 두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나는 처치하지 못할 만큼 많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 관계가 복잡하지 않아 유서로까지 남겨야 할 처지도 아니라서 미리 유서를 써 두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어느 날 하나님이 '이제 이 지상에서 그만 살고 오거라' 하면 가야하는데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고생하여 이제 살만하니 좀 더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다가 가겠다고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떠날 날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큰 선물이지만 언제 떠날지 모르는 것은 또 다른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음이 늘 염려되어 건강을 체크하고 돈을 모으면서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선물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길기도 하고 가장 짧은 것이 되기도 하며,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죽음을 체험하고 미리 유서를 써본 목사님처럼 멋지고 완벽하게 살 수는 없지만 내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한번쯤 유서를 써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다. 그리하면 유한한 인생에 대한 욕심도 줄어들 테고 좀 더 선하게 살아지지 않을까? 손해를 보는 듯 사는 것이 흑자 인생이라고, 그리 사는 것이 당장은 손해 같지만 시간이 가면 복이 되어 돌아온다고 어른들은 말한다. 부부나 친구 사이 또는 직장 동료 사이에도 '내가 좀 못났지' 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고 말이다. 우리의 생명은 너무나도 짧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부자나 거리의 거지나 결국은 똑같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꿈과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고, 어떤 사람은 불안과 초조, 공허와 후회로 채워나간다는 점이다. 내가 만약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유서를 남겨야 한다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어떤 내용으로 써야할까? 남편에게는 뭐라고 쓰며, 자식들에게는 어떤 말을 써야 도움이 될까? 돈 이야기를 쓸까, 아니면 살아가는 지혜를 쓸까? 이도저도 아니면 무슨 소리를 해야 할까?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동안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으니 죽은 후에라도 오래 기억해달라고 할까? 이왕이면 근사한 유서를 남기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쓸 말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허송세월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느 날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준비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20년 전쯤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경제적 성공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우리 가족이 불편하지 않게 생활할 수 있는 넓은 아파트 한 채와 자동차 한 대 그리고 몇 천 만원의 예금통장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목표만 달성되면 정말로 욕심 부리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며 살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지금 나는 20년 전 내가 작정한 경제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우리 가족 수에는 한참 넓은 평수의 아파트와 자동차 등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고, 옷장에는 옷들이 차고 넘치며 냉장고엔 다 먹지 못해 유통기한 지난 식품들이 남아 뒹군다. 집안을 둘러보면 그다지 필요치 않은 물건으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마음에 흡족함이 없어 늘 더 갖고 싶은 욕심으로 목마르다. 혹 남이 가지고 있는데 나만 가지지 못한 것은 없나 이웃을 늘 곁눈질 하면서 풍요 속의 궁핍을 느끼며 산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는 부족한 것이 참 많았는데도 크게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평화롭게 잘 살았다. 잘 사는 이웃들을 시기하기보다는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우리도 노력하면 저렇게 잘 살 수 있겠지' 하고 그들을 모델삼아 성공의 꿈을 꾸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빈곤 속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행복했었고 가난했던 유년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요즘은 부족해서 목마르고, 가진 것이 없어서 마음이 비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정한 바를 다 이루었는데도 괜스레 더 가진 자와 끝없이 견주면서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아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성공은 보지 못하고 이웃들의 행복과 성공만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늘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 애를 태운다. 어떤 일을 이루고 나서 누군가로부터 성공에 대한 축하 인사를 받으면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성공은 무슨, 아직 멀었다.' 며 부정의 손사래 친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충분히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이담에 성공하면 어찌하겠노라고 말하며 성공을 무작정 나중으로 미룬다. 아마도 성공이란 보통의 것이 아니라 대단히 어마어마한 것으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이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정한 목표가 이루어지면 그게 바로 성공인데도 말이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나 역시 성공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끝없는 욕심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이루고 싶은 많은 것들을 이루고 가지고 싶은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여러 가지 꿈을 다 이루어야 제대로 성공한 것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이웃과 비교하면서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다.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강한 요소는 비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비교하는 순간 삶의 리듬은 헝클어지고 자신의 목표 달성은 초라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 속의 작은 성취를 그때그때 자축하며 행복을 느끼고 또 축하도 받으면서 좀 느긋하게 살 필요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이웃들의 풍요로움만 바라보지 말고 그들의 숨겨진 노력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내게 성공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해 올 때 '아! 그래.' 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며, 함께 기쁨을 나누고 나름의 성공 노하우 일러주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는가· 나는 그 동안 성공이 행복인 줄 알고 살았다. 행복을 위한 성공이 아니라 성공 그 자체를 인생의 목표로 살고 있는 오늘의 내 모습을 보고 놀랐다. 가족과 한 지붕 이고 오순도순 정답게 서로를 챙기며 살고, 직장에서 동료들과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이 바로 행복이고 삶의 향기인데도 말이다. 목표한 바가 이루어졌는데도 그저 실체도 없는 허황된 또 다른 성공을 쫓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한번쯤 가던 길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어느 날 고도원님의 '꿈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를 읽다가 '누군가 어깨에 기대어 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라는 대목에서 나의 인생관, 나의 친구관, 나의 가치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늘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기대고 싶어 하면서도 누군가를 위로하고 도와주기 위해 노력했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살면서 지치고 힘들면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지 않나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고 나를 편들어주고 챙겨주는 사람 어디 없나하고 늘 목말라 했다. 친구도 나를 챙겨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면 더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이웃도 나에게 다정하게 대하면 좋은 이웃이라고 쉽게 얘기했다. 사람들을 판단할 때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내는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나에게 냉정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분류하면서 편을 갈랐다. 모든 것이 '나' 위주로 나에게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보내고 호의를 베푸느냐에 따라 분류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친절한 사람은 마음에 좋은 사람으로 새겨 넣었다. 직장에서도 나에게 좀 더 공손하게, 나에게 좀 더 다정하게 다가오면 좋은 동료, 괜찮은 직원으로 생각하며 따뜻한 눈빛을 건네고 그렇지 않으면 쉽게 다가가지 않았다. 인간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못 박아 놓고 상대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나도 열지 않고, 마음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 어깨도 빌려줄 수 없노라고 옹졸한 생각을 했다. 내가 먼저 누군가가 편하게 쉴 수 있는 그루터기가 될 준비는 못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멀리보지 않아도 가까이에 힘들어 허덕이는 이웃들이 참 많다. 어떤 이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또 어떤 이는 외로움으로, 건강하지 못한 이유 등으로 도움 받고 위로받고 싶어서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이웃을 보면서도 그냥 모른 척 하면서 내 갈 길에만 몰두했다. 그들의 삶의 무게와 고담함을 헤아리기가 겁났다. 혹여 그들의 아픔이 내게 짐이 될까싶어 다가가기가 겁났던 것이다. 내가 동료의 고통이나 짐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겠지만, 나를 믿고 어깨에 기대어 때로는 펑펑 울 수 있도록 배려했어야 했는데. 그러면서 위로받고 아픔을 완화시키면서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해 달릴 수 있도록 받쳐주면 되는 것인데 말이다. 아프고 힘들 때 언제든지 기대어 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고단한 세상살이도 한결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가진 것이 참 많다. 건강한 몸과 매일 출근할 수 있는 직장, 서로를 걱정해 주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마음을 나누는 다정한 친구들. 그 많은 가진 것들로 누군가를 힘나게 하고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에 인색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부족하면 서로 힘을 보태면서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문득 누군가 내 어깨에 기대어 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헤아려 보았다. 어쩌면 한 명도 없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옹달샘 속의 두 마리 물고기 이야기가 생각난다. 먹을 것이 부족한 좁은 공간에 둘이 있는 것보다는 혼자가 더 자유롭고 풍족할 거라 생각하고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물어 죽였다. 죽은 물고기가 부패하여 옹달샘 물을 상하게 하였고 결국 남은 한 마리도 얼마 못가서 죽고 말았다. 그 곳엔 혼자만의 자유와 행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혼자서는 완벽할 수 없다. 그 부족함을 서로 보완해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 세상 아니겠는가. 마음의 거리를 좁혀 서로의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받혀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딸아이가 결혼을 하여 멀리 타지방으로 떠나지 않고 청주에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살게 되어 참 다행이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 어쩔 수 없어 저녁이면 딸아이가 쓰던 빈방에 들어가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놓고 간 대학졸업 사진을 한없이 쳐다보기도 하고, 딸이 쓰던 침대에 걸터앉아서 허공을 바라보곤 한다. 딸의 웃음이 베어있는 벽과 천정에 시선을 주다가 비어있는 옷장도 열어보고 괜스레 딸아이가 쓰던 컴퓨터도 만지작 거려본다. 함께하던 행복한 시간들을 더듬으며 추억에 잠기다보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른 방을 나오곤 한다.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많이 그리워져 전화기를 든다. "엄마∼" 다짜고짜 어머니를 부르면 수화기 너머로 힘없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파를 탄다. 어쩐 일이냐고 걱정스레 물으니 그냥 전화 드렸다면서 딴소리를 하고 만다. 친정어머니는 심상치 않은 딸의 마음을 눈치 채셨는지 무슨 일 있느냐고 되물으시며 걱정 하신다. 지금 어머니는 건강이 별로 안 좋으시다. 정신도 맑지 못하고 힘이 없어서 우리에게 맛난 음식도 못해주신다. 뇌수술 이후 느린 회복으로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아버지 그림자처럼 하루하루를 살고 계신다. 그런 어머니가 요즘은 참 많이 생각난다. 내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야 30년 전의 어머니 심정을 읽는다. 그 때 천리 길 멀리 시집보내는 딸이 얼마나 걱정되셨을까· 얼마나 염려스럽고 안타까우셨을까· 애지중지 키우고 공부시켜서 떠나보내는 섭섭한 심정을 지금에야 깨닫게 되어 친정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 때 먼 곳에 계시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뵐 수는 없었더라도 문안전화 자주 드리고 행복한 목소리라도 자주 들려드릴 걸. 그 쉬운 전화도 미루고 미루었다가 내가 아쉽고 필요할 때에만 했으니 말이다. 팔남매 낳아 시집 장가보내면서 그 때마다 허전함 마음 달래시느라 마음으로 늘 울고 계셨을 어머니 모습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식은 품에 끼고 있을 때 보다 품을 떠나보내고 나서 걱정이 더 많다하시던 어머니. 시집가서 때 되면 아들 딸 잘 낳고 시부모님 사랑 받고 잘 사는지 한시도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마음이 오늘은 절절하게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그 때는 어머니의 걱정도 귀에 들리지 않았고 어머니의 한숨소리도 느끼지 못했다. 직장 일을 핑계 삼고, 사랑하기 바빠서 부모님의 걱정이나 염려를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었다. 얼마 전에는 결혼한 딸이 전화를 했다. 손님 접대를 해야 하는데 부엌용품이 부족할 것 같다는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릇 가게로 달려가 제일 값비싸고 질 좋은 부엌용품을 이것저것 마구 골랐다. 딸의 집으로 가서 여러 가지 준비해간 용품을 정리해 주고 나서니 마음은 조금 안정되었지만 손님 접대는 잘 할까하고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자식에게는 그리도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내 자신을 보고 스스로 놀랐다. 전에 친정어머니가 무얼 부탁하면 내 할일 볼일 다 끝내고 나서야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드렸는데 말이다. 흔히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부모님 대하는 태도와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그리도 다른지 내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딸은 어쩌면 애물단지 인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세상 떠나는 날까지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 그렇게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연민과 걱정으로 삶을 채울 것이다. 내가 딸에게 그리하듯이 나의 친정어머니가 내게 그리 사랑하셨고 외할머니도 어머니께 그리하셨듯이 말이다. 딸이 전화하면 나는 또 모든 일 제쳐 두고 딸을 위하여 필요한 것 챙겨 달려가겠지· 나의 어머니가 내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아! 어머니, 나의 어머니! 이제야, 어머니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이 죄송하고 많이 사랑합니다.
교육청에 근무하다보면 학교 방문을 자주하게 된다. 여러 가지 행사 지원이나 장학지도 등 이런저런 이유로 유치원을 비롯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방문의 기회가 고루 주어진다. 교육장님을 수행하여 방문하기도 하고 장학사들과 동행하여 협의회를 갖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학교에 들어서면 참 다양한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은 참으로 묘하다. 같은 지역에 비슷한 규모의 학교 간에 참 많이 다른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어떤 학교는 교문이나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차분하게 학교 교육이 알차게 이루어지고 있음이 직감되고, 어떤 학교는 뭔지 모르지만 어수선하고 불안한 느낌이 든다. 단지 느낌이며 아직 교육활동의 이모저모를 다 살펴보지 않았음에도 첫 인상은 대부분 맞아 떨어진다. 현관을 들어설 때의 기운이 썰렁하거나 찬 느낌이 들면 교실의 느낌도 차고 무겁다. 그 곳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표정도 무미건조하고 학생들의 표정도 어둡게 느껴진다. 그런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활동이 원만할리 없다. 뭔가 부족한 듯하고 아쉬운 가운데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방문자를 맞이하는 모습에도 따뜻함 보다는 귀찮아하는 모습이 숨겨져 있다. 걱정이 앞서는 학교다.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이 든다. 그건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라 동행한 사람들의 공통 느낌이다. 반면에 교문이나 현관에 들어설 때의 기운이 활기차고 밝으면 전반적인 학교 교육활동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골마루에서 만나는 학생들의 모습도 밝고 건강하다. 생동감이 느껴지고 학생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번지고 낯선 방문객에게도 예쁘게 인사를 건넨다. 아마도 지도하는 선생님들의 좋은 모습을 보고 배워서 실천하는 바른 자세일 것이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학교는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지고 방문을 끝내고 돌아오는 발걸음도 가볍고 행복하다. 우리 교육지원청을 방문하는 분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맞이하는 분위기에 따라 기분이 많이 좌우 될 것임을 알기에 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 최선을 다해 반갑게 맞이하려 애쓴다. 날씨가 더울 때면 얼음 띄운 시원한 냉차를 대접하고, 쌀쌀한 날씨에는 따끈한 커피 한잔으로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진실한 마음을 드린다. 별것 아닌 차 한 잔에 고마워하는 방문객을 대하면 덩달아 신이난다. 화가 잔뜩 나서 찾아온 민원인도 따뜻하고 공손한 자세로 맞으면 금세 화를 누그러뜨리게 되고 어려운 문제도 쉽게 해결된다. 사무실 분위기는 근무하는 구성원들이 조금만 신경 쓰고 배려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이 40이 넘어서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선다. 평소의 감정이나 생각이 얼굴에 차오르기 때문에 얼굴을 통해 사람의 속마음이 다 보여 지는 것이다.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상대의 속마음을 알아버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잘 생긴 얼굴인데도 그늘지고 어두워 다가가기 싫어지고, 어떤 이는 그다지 잘난 얼굴이 아닌데도 자석처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모두 그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과 함께 하면 덩달아 행복해 진다. 하찮은 일도 재미있어지고 세상은 살만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사람과는 자꾸 만나고 싶어진다. 행복바이러스가 저절로 옮겨와 엔돌핀이 우리 몸을 채운다. 어쩌면 밝은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넘길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일상의 밝은 표정 하나가 때로는 크고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게도 한다. 첫인상에 반해 결혼까지 이르는 경우를 보면 첫인상, 첫 느낌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첫인상, 첫 느낌 모두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밝고 아름다운 첫인상을 위해서 무한한 노력과 연습이 필요함도 알아야 한다. 추석명절로 많이 지치고 고단한 심신이겠지만 우리 모두 처한 위치에서 밝은 생각, 좋은 모습으로 주변을 행복바이러스로 채우고 내일의 희망을 열어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마음이 울적해서 깊숙이 넣어둔 사진첩을 들여다보았다. 몇 년 동안 사진첩이 있다는 자체도 잊을 만큼 무관심 했던 사진들이다. 꿈 많던 풋풋한 시절의 모습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내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하고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진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리움에도 나이가 있다더니 꼬박꼬박 나이를 먹은 그리움이 사진 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가 한꺼번에 밀려온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너무나 바쁘게 달려 오다보니 인생의 가운데 부분이 어느 새 저만치 멀어졌다. 그 땐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내 아이들은 좀 더 다르게 키우겠다는 야무진 계획도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인생이 모두 계획한 데로 흘러가 주지는 않았다. 이제는 사진속의 어린아이가 커서 어느 새 어른이 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시간이 언제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모를 일이다. 행복한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가운데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만 말없이 사진 속에 남아있었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그냥 눈물이 핑 돌았다. 유행가 가사를 빌리지 않더라도 인생은 생방송이며 일회성이라는 걸 시간이 많은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사용해도 계속해서 공짜로 나오는 것이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무한정 많은 시간이 남겨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다지 아까운 줄 모르고 낭비했었다. 그건 한정된 아껴 써야 할 귀중한 시간이었는데 말이다. 하긴 모든 게 영원하다면 무엇이 그립고 무엇이 또 행복하겠는가. 나는 가끔씩 황당한 상상을 하곤 한다. 내가 만일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워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영화 속에서 봐 두었던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도 지어서 살아본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완벽하게 살아내지 못한 삶의 여정에 대한 미련과 후회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그리워만 하면 안 되겠지? 후회 한다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신이 아닌 인간은 다 후회하며 살게 된다. 삶을 돌이켜보면 때로는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그 때는 그 게 최선이었고 가장 신중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은 인간 개개인에게 얼마의 시간이 남겨졌는지 알지 못함이라 한다. 내일 내 인생의 끝 날이 기다리고 있다하더라도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한 내일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남겨진 시간을 안다면 불안하고 초조해서 아마도 미쳐버릴지 모를 일이며 모두가 희망의 끈을 놓고 소모적이고 방탕한 일들로 세상을 어지럽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나는 한 십년 쯤 후에는 오늘의 내 모습을 또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 십 년만 젊어도 뭔가를 거창하게 해 볼 텐데.' 하고서 말이다. 그 때 더 늦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오늘을 잘 살아야 함은 물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면 꿈을 이룰 수 있는 옳은 판단을 하는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수시로 점검하고 특별관리 하면서 남겨진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잘 써야 하겠지. 자신이 택한 인생길을 제대로 선택했는지 평생 의심하며 그 길을 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니까. 꿈꾸는 것은 누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서 꿈꾸는 것도 그 꿈을 이루는 것도 아주 특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누구나 이루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은 각자 주어진 삶 속에서 모두 다른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갖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주변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분명 행복의 문을 여는 시작일 것이다. 또 그렇게 인내하며 살다보면 한때는 눈물로 얼룩졌던 날들이 나중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뀌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정말로 꿈꾸며 살고 있는지요? 아니면 아직도 사진첩 속에 이루어야 할 꿈들을 묻어두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제 2학기가 시작 되었다. 많은 교사가 교단을 떠나고 남겨진 교사는 동료들이 떠난 허전한 자리를 메우며 교단을 지킨다. 교사가 좋은 모습으로 교단을 떠나는 것은 정년을 맞아 영예롭게 떠나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중도에 명예퇴직이라는 명목으로 교단을 등지는 경우는 안타까운 일이다. 전국적으로 올해 명퇴자는 오천 명에 육박하는 숫자다. 충북은 8월 말 교단을 떠난 교사의 수가 이백 명이 넘어 지난해보다 60% 증가했다.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정든 교단을 떠나는 교사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이제 더 이상 교단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가 많다. 교사로서 자존감과 긍지를 찾기가 어려워지고 더 이상 학생들을 신명나게 지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진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교권이 붕괴되는 것에 더 이상 견디고 버틸 힘이 없어진 것이다. 평양 감사 자리도 하기 싫으면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일을 좋아서 하게 되면 열정을 가지고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이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마다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해마다 명퇴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명퇴자가 비워준 자리로 신규교사가 들어오니까 별 문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무서운 생각이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교단에 섰던 교사들이 같은 문제로 고민하다가 같은 생각으로 교단을 떠나는 것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모든 것에는 조화가 필요하다. 원로교사와 신규교사가 조화를 이루어 교단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이끌어주고 지도해줄 선배교사들이 떠나고 있음이 걱정이다. 며칠 전 '아들이 선생님 폭행하면 엄마도 함께 교육받는다.'는 신문 제목을 보면서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에 참 많이 찹찹했다. 학생 인권이나 교사 인권 중 어느 것이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학생 인권을 높이자는 목소리는 커지는 반면 교권은 추락하고 있음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교권 추락은 결국 부메랑 되어 학생들의 학습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수도 있다. 교권 추락과 교사 멸시 풍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누구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회복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교직사회는 존중과 배려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함께 교단에 섰던 동료들이 더 이상 교단을 지키지 못하겠다며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참 씁쓸한 기분이 든다. 덩달아 힘이 빠진다. 어쩌다 모임에 나가면 남아있는 교사들도 떠날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옛말에 '선생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가르치느라 하도 속을 썩여서 유독 쓰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요즘은 가르치는 일이 더 힘들어졌다. 학생들도 모두 개성이 더 강해졌고, 학부모들의 요구도 다양해졌으며, 교단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그리 곱지가 않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에서 언제부터인지 학부모와 교사의 대립, 학생과 교사의 힘겨루기가 만연하다. 교사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절대 지지 않으려 함이 안타까운 노릇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닌데 말이다. 져주는 것이 바로 이기는 것이란 말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이기고자 애쓰기 보다는 지켜보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져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아량이다. 내 아이가 올바른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무조건 큰 목소리를 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교사가 교단을 떠나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어려운 결단 없이는 정말로 결정하기 힘든 일이다. 언젠가는 교단을 향하는 사회의 시선이 따뜻하게 바뀌어 가르치는 일에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학부모가 교사를 믿고 응원해 주는 그런 행복한 날이 하루빨리 오도록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오늘은 옥천예술문화회관에 '오 마이 캡틴' 뮤지컬이 준비되어있다. 학생들과 학부모, 선생님이 함께 관람하면서 따뜻한 눈빛으로 서로를 응원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