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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수필가

사거리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서서히 버스가 움직이자 사람들도 천천히 발에 시동을 건다. 눈으로는 차를 쫓으며 발로는 설 자리를 어림한다. 어디쯤 서면 빨리 차에 오를까. 앉을 자리는 있을까. 발과 눈치라는 원초적 무기를 가진 무리들이 승차 작전을 펼친다. 나도 슬그머니 대열에 끼어든다.

차가 없는 나는 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계절이 흐르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시답잖은 감상에 빠질 수도 있고, 오르내리는 사람을 쳐다보며 영양가 없는 상상을 할 수도 있는 버스가 좋다. 물론 자리에 앉았을 때 이야기다. 앉으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대다수 기사가 승객의 손에 눈길이 머문다는 것도 앉고서야 알았다. 교통카드는 잘 태그 하는지, 반입금지 음료는 들고 있지 않은지 살피려는 게 아닐까 싶다.

버스가 들어온다. 아, 인사 아저씨다. 누구라도 차에 오르면 "어서 오세요" 인사하는 아저씨를 나는 그렇게 부른다. 처음부터 별칭으로 부른 건 아니다. 1‧4후퇴 때 헤어진 먼 친척이라도 만난 듯 반기는 아저씨의 태도가 사실 영 거북했다. 간지러운 말은 또 얼마나 어색했던가. 들을 적마다 스멀스멀 얼굴이 가려웠다. 좋은 기운은 옮는다나, 어쩐다나. 시나브로 아저씨의 너스레가 장날 각설이 타령처럼 구수하게 들리더니 가끔 사돈의 팔촌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다 해도 아저씨의 인사에 맞장구를 친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다.

운 좋게 자리에 앉았다. 멍 때리기 좋은 운전사 뒷좌석이다. 자연스레 시선이 문으로 향한다. 검은색 가방을 멘 중년 남자가 황급히 올라온다. 운전기사의 유별스러운 인사가 마뜩잖은가보다. 양미간을 찌푸린다. 나도 그랬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은 이어폰을 꽂아서인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양 화장걸음으로 차에 오른다. 이어 들어선 줄무늬 원피스 아가씨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후다닥 안쪽으로 걸어간다. 저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다양한 얼굴만큼이나 승객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여섯 정거장이 지나도록 아저씨 인사에 호응하는 사람이 없다. 정거장에 멈출 때마다 기대와 실망으로 맥이 빠지는 건 아저씨가 아닌 지켜보는 나이다. 일곱 번째 정류장이다. 뽀글거리는 머리에 알록달록한 아웃도어를 입은 아줌마가 잽싸게 들어선다. '샐쭉한 눈초리가 성질깨나 있겠는걸.' 나의 망상이 우지끈 깨진 건 순간이었다.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가 "네~에~" 말꼬리를 올리며 맞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차에 오르자 얼른 손까지 잡아드린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 얼굴이 펴지는 게 뒤통수에서도 느껴진다. 나 혼자 머쓱할 따름이다.

시내로 들어서자 길과 건물이 쭉쭉 곧다.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병원 간판이 붙어있는 건물 앞에 차가 서자 "수고하세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뽀글이 아줌마다. 목소리만큼이나 경쾌한 몸짓으로 훌쩍 내리는 그녀가 멋지다. 깍쟁이 같던 그녀가 따뜻하고 보드라운 여인으로 변신한 것은 실상 간단했다. 상냥한 인사와 따뜻한 행동이면 충분했다. 여하튼 파마머리 아줌마나 기사 아저씨가 건네는 인사를 나는 왜 하지 못할까.

인사人事는 사람의 일이며 예를 표하는 일이다. 마음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는 일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다. 인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남과 더펄더펄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속내를 한 꺼풀 벗겨보면 부끄러운 진실이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삿된 생각이 내 입을 막고 몸을 묶은 것이다. 기실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는 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과 태도가 아니던가. 저들은 '저수하심低首下心'을 실천하며 입 다물고 있는 나를 말없이 나무란다.

귀가 순해지면 마음도 순해지는가. 요즘 들어 부쩍 헐렁해졌다. 예전 같으면 흘러들었을 아저씨 인사가 마음에 툭툭 걸리지 않나. 옆에 서 있는 아줌마에게 "나 다음에 내려요. 여기 앉으세요." 따위의 고급 정보를 흘리지 않나. 아들 녀석이 어미의 오지랖을 봤다면 어떤 얼굴일까. 생각만 해도 헤실헤실 웃음이 삐져나온다.

오래 앉아 있었다. '뽀글이 아줌마처럼 멋지게 내려야지' 생각하며 '수고하세요.'를 입속으로 되뇌며 일어선다. 오늘 승차 작전은 성공했지만 하차 명령은 불발이다. 아직 멀. 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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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